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그래픽 | 리뷰

어찌됐든 산티아고만 가자

2009-01-13

인디 계의 서태지와 아이들이라 불리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달이 차오른다, 가자’가 최근 인기다. 이 노래는 “가자”는 외침만으로 다리를 들썩거리게 만든다. 엽기 발랄 세 남자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여행기를 담은 <어찌됐든 산티아고만 가자> 역시 마냥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목적지를 소개하는 여행서가 아니라 그곳에 도착하기까지의 길에 대한, 그 흥겨운 여정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에디터 | 이상현( shlee@jungle.co.kr)

산티아고 순례기를 담아낸 여행서가 꾸준히 발간되고 있다. 그 가운데 새책 <어찌됐든 산티아고만 가자> 가 눈에 띄는 건, 종교적인 깨우침이나 교육적인 가르침을 삭제한 채 800 킬로미터의 순례길 역시 흥겨운 여행길이라는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hozo’라는 이름으로 촌철살인의 유머를 날리고 있는 유명 웹카투니스트 권순호, 마음 따뜻해지는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이경욱, 그리고 출판기획자 조명찬, 이렇게 유쾌한 세 남자의 산티아고 여행기는 한 편의 ‘1박2일’이나 ‘무한도전’이 따로 없다.

1박2일이나 무한도전이 목적보다는 그 과정에서의 좌충우돌이 더욱 재미있고 중요하듯, 이 책은 애초부터 산티아고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동양의 세 남자가 언어와 피부색을 뛰어넘어 그 길에서 낯선 외국인들과 나눈 끈끈한 소통, 그렇게 그들과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따뜻하고 즐겁게 담고 있을 뿐이다. “어느 여행지를 가느냐, 어떤 일정으로 어떤 여행을 계획하느냐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 길 위에서 가지게 되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만남과, 소통 그리고 교감이 그 여행을 진정으로 빛나고 값진 여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뛰고 구르고 찧고… 그렇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과 벌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책은 전개된다. 주된 내용 역시 특정 장소에 대한 묘사보다는 사람과 사건에 더 할애된다. 그리고 각각 일러스트와 웹카툰을 업으로 하고 있는 두 사내는 이 여정을 글과 그림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림 일기를 쓰고, 유리창에 윈도우페인팅을 선사하는 등 실제로 그들의 여행은 늘 그림과 낙서가 함께 한다. 이러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책은 이경욱이 서정적인 일러스트로 각 장의 포문을 차분하게 열면, 권순호가 익살스러운 카툰으로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 형식으로 꾸려졌다.

또한 이 책은 산티아고 순례 길에 관한 사전 정보와 지식을 나열하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걸었던 것만을 이야기할 뿐. “인터넷 검색만으로 정보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여행보다는 여행길에서 사람들과의 소통이 중요했듯, 이 책 역시 사실을 전달하는 것보다 독자와의 내밀하고 즐거운 소통, 대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술자리에 모여 앉아 친구들의 여행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처럼 친근하고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소소한 에피소드가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건, 자유로운 형식도 한 몫 한다. 일례로 여행기 속 화자로 등장하는 이경욱의 글에 에피소드마다 권순호와 조명찬이 댓글 형식으로 이야기의 살을 더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보여주는 책으로 그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본문 내용은 친절한 스토리텔링과 설명적인 사진으로 배치되어 무엇보다 독자들로 하여금 현장감을 더욱 느낄 수 있게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보여주는 책보다는 텍스트를 읽는 재미가 더 많은 책이 되도록 주안점을 뒀다”는 이승욱 편집 디자이너의 말대로, 본문은 조금 심심하다 싶게 심플한 레이아웃을 구사하고 있다. 판형 역시 전형적인 문고판이다. "적어도 네이버 블로그나 싸이월드 미니홈피와는 달라야하지 않는가." 이러한 의지가 가장 드러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사진 사용이다. 여느 여행서가 풍경 사진에 많은 컷을 할애하며 시쳇 말로 어깨에 힘을 주는 반면, 이 책은 비록 초점이 나갔을지언정 그곳 친구들과 어울려 찍은 소소한 사진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저도 이미지의 나열이 아니라 본문 내용을 설명하고 보충하는 용도다.

“준비한 내용의 십 분의 일도 못 실었다”는 권순호의 말은 상징적이다. 글과 일러스트, 카툰과 사진 등 보여줄 게 너무 많은 책 <어찌됐든 산티아고만 가자> . 이 책의 편집 디자인의 핵심은 먼저 비워내는 것, 그리고 나머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읽는 책'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facebook twitter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