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06
이 세상에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오직 디자이너 한 사람의 스케치 속에서만 존재하는 디자인.
그 소중한 디자인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스튜디오 바프의 아티스트 북 콜렉션인 ‘바프 콜렉션(the BAF collection)’의 신작- 자동차 디자이너 김성룡의 스케치 작품집 'DREAM DESIGN'은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구두나 백팩, 안경과 같은 패션 소품에서부터 모터사이클, 스포츠카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고 볼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면 발 사이즈에 따라 밴드를 별도로 탈,부착 할 수 있도록 한 샌들이라든지, 신발창에 카 스타일링에서 영감을 받은 유기적인 선과 면의 흐름을 강조한 것이라든지, 롤러블레이드의 스피드를 훌쩍 뛰어넘는 고성능 소형 엔진이나 모터가 장착된 싱글 휠 개념의 롤러 스틱(Roller-stick)이라든지, 이와 같이 기발한 디자인은 마치 발명품을 보는 듯한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상상 속의 디자인이 언젠가는 멋진 제품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즐거운 기대를 하게 하는 'DREAM DESIGN'을 소개한다.
취재 I 박현영 기자 (maria@yoondesign.co.kr)
글 I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나미
“어느 날 문득, ‘디자이너의 머리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가까이서 관찰하는 것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직업이 디자이너이다 보니 주변에 가까이 지내는 사람 중에 많은 이들 또한 디자이너라는 점이 내게는 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자동차 디자이너(그래픽 디자이너와는 또 다른 감성과 개성을 지닌 디자이너 친구들-Ford, GM, BMW 등의 전 현직 디자이너)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의 일상과 더불어 드러나는 그들만의 독특한 머리 속 구조에 대해 늘 감탄을 하곤 했지만, 그것을 나의 작업과 접목시켜 책으로 만들어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전화를 받는 중에도 술이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메모장 위에, 또는 냅킨 위에 자연스럽게 늘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이들. 그들의 그 습관적인 끄적거림 속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모양의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그 자동차가 때로는 전화기가 되었다가, 시계가 되었다가, 패셔너블한 스타일의 구두가 되었다가, 선글라스도 되었다가, 급기야는 “있잖아, 어젯밤 꿈에 정말 기가 막힌 걸 봤는데 말이야...” 라며 밑도 끝도 없는 이상한 물건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이상한 종(種)의 친구들과 어울려 깔깔대며 웃다가 어느 날 문득, 디자이너의 머리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가까이서 관찰하는 것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역시 디자이너인, 나의 머리 속에서는 그것을 재빠르게 나의 영역인 '책'으로 데려 오려는 생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북디자이너인 나의 경우 그와 같은 발상을 미처 스케치로 내놓을 틈도 없이 머리 속의 자가발생적인 기능들이 작동을 하여 그 가능성의 최대치와 최소치를 넘나들며, 그것을 '책' 속에 아우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 더해야 할 것과 빼야 할 것들을 빠르게 가늠하고 있었다. 책을 만드는 작업은 ‘그림으로 표현해야 할 부분’ 보다 ‘생각으로 가늠해야 할 일’ 이 더 많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스케치'란 디자이너의 머리 속에 수없이 발생하는 호기심과 문제제기, 그 해결에 대한 모색의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디자이너만의 독특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그것은 바로 디자이너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하나의 발상 속에서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꺼내어 시각화하는 매우 창의적인 표현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까운 미래 우리의 생활상을 더욱 편리하고 흥미롭게 변화시키기 위한 발상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최초의 제안이기도 하다.
하나의 가능성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가능성이 설득력을 갖추어 가는 과정은 어떠한 양상을 띠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스케치에는 어떠한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이루어지는지, 디자이너의 '스케치' 속에는 볼 게, 배울 게 너무도 많다.
그러므로 북디자이너인 나는 그것들을 이용하여 매력적이면서도 보고 배울 게 많은, 그런 '스케치' 작품집으로서의 '책'을 구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떠한 의무로부터도 자유로운, 디자이너의 머리 속의 발상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스케치 작업들이라니…”
나의 이러한 생각에 이른바 찍힘을 당한 디자이너는, 나의 친구이자 현재 예술종합학교 미술원의 디자인과 교수로 재직중인 김성룡氏. 그는 포드자동차의 디자이너였으며, 파나소닉, 카시오, 모토로라 등 수많은 제품을 디자인한 제품디자이너이자, 미국 아트센터의 자동차 디자인과 교수,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를 역임했던, 그야말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앞서 그와 함께 그간의 스케치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가 한 스케치들이라도 그의 책으로 내놓을 수 없는 스케치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간의 작업들이란 대부분 누군가를 클라이언트로 가지고 있는 일들이었다.
그 클라이언트들에게는 이 최초의 스케치들이 때론 기업의 긴밀한 사안들과 연결되어 있는 일인만큼 누군가에게 의미 있고 흥미로운 책이 되기 이전에 누군가의 이익에 배치되는 긴요한 사안을 세상에 노출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프로페셔널 디자이너의 스케치에는 클라이언트를 위한 보안의 의무가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춤하던 나에게 의기소침할 겨를도 없이 건네진 또 다른 뭉치의 그림과 파일 들이 있었으니, '그냥', 혹은 '재미 삼아' 스스로 발생한 '자유로운' 스케치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클라이언트의 어떠한 요구조건으로부터도, 어떠한 의무로부터도 자유로운 디자이너의 머리 속의 발상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스케치 작업들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유연한 사고와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의 보고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들을 묶어 책으로 만드는 일은 사실 그간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의 노출이 디자이너 개인을 위해 스스로 보호해 두어야 할 아이디어의 방출이 아닌지를 묻자,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 명쾌했다.
"또 하면 되지, 뭐..."
하긴, 책으로 그의 머리 속을 세상에 노출시킨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것이 모두 그의 소유라는 것을 온 천하에 알리는 셈이니… 그런 걸 두려워하거나 말거나 하여 머리 속을 영원히 서랍 속에 잠재워 둘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아무도 요청한 적이 없는, 그러므로 아무도 작업료를 지불하지 않을 일, 그러나 스스로의 흥미와 도전을 위해 발생되는 일...”
'자가발생'의 작업들 즉, 클라이언트가 존재하지 않는, 그러므로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들을 담고 있는 스케치 작업은 생각할수록 깊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것은 디자이너의 본연에 관한 문제 제기와 같은 것으로써 자가발생적인 아이디어와 자기 표현에 대한 본능, 그리고 스스로 날기 위해 날개짓을 해 보는 일 등, 어쩌면 디자이너이기 이전에 한 개인이 지닌 자유의지의 실천에 대한 문제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그것은 '프로페셔널'이란 타이틀을 달고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조건의 한도 내에서 발휘되어온 그간의 나의 작업들을 되돌아 보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스케치들을 살펴 책으로 묶기 위한 목차를 구성하고 나니, 이번에는 편집자적인 이런저런 욕심이 생겨났다. 그의 머리 속에 잔류하고 있던 생각들 마저 모두 책 안에 담고 싶어진 것이다. 하나하나의 스케치들을 들추며 각각의 작업의 배경을 글로 옮길 것을 채근하는 과정에서 심한 마찰을 겪기도 하였다.
디자이너에게 스케치는 발상의 무조건적인 시각화가 아닌, 개인적인 스타일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함축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기도 한 것이므로, 무언가 부연의 설명을 더하여 중언부언한 느낌의 '자기표현'이 될 것을 원치 않는 그의 입장과 책으로 구성하였을 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려는 나의 '편집증적인' 노력이 팽팽히 대치하였다.
자칫 우리는 책을 별개로 한 우리의 우정에 손상이 될 뻔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는 당연했던 과정으로 이해되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die-cut’으로 파여 있는 글자들을 완전히 빼내지 않고 빼기 쉽게 약간만 돌출하여 둔 채, 독자의 참여를 통하여 완성하게 하자는 아이디어는 마지막 단계에서 내부의 논의를 통해 더해진 의외의 소득이다.
언제나 그렇듯 책으로써의 'what’을 결정하고 난 후 모양새로서의 'how’를 결정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수월하다.
'DREAM DESIGN'은 가방에서부터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에 쓰이는 다양한 물건들에 대한 새로운 발상을 선보이는 책인 만큼 이 책의 형태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북디자이너의 의도는 하나의 ‘object’로써 새로운 발상을 선보일 수 있는 책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책이라는 기본 위에 '제품(product)'으로써의 부가적인 설정을 더하기 위한 질감과 양감이 필요하였고 이를 손쉽게 해결해줄 수 있는 재질로 스폰지를 선택하였다.
표지의 설정에 가벼운 스폰지를 더하는 일이 책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스폰지는 훌륭한 표지 재질이 되어주었고, 스폰지가 지닌 재질의 유연성을 최대한으로 활용, 'die-cut’을 이용하여 제목에 입체감을 더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스폰지 재질의 장점은 책의 '오브제성'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을 양보하지 않고도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die-cut’으로 파여 있는 글자들을 완전히 빼내지 않고 빼기 쉽게 약간만 돌출하여 둔 채 독자의 참여를 통하여 완성하게 하자는 아이디어는 마지막 단계에서 내부의 논의를 통해 더해진 의외의 소득이다.
또한 그와 같은 설정은 ‘소유하고 싶은 책’으로서의 우리의 '바프 컬렉션(the BAF collection)’의 하나로 탄생시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책 한 권 한 권 일일이 글자를 빼내야 하는 우리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쁘게 선택되었다.
'DREAM DESIGN'은 한 디자이너의 자가발생적인 작업들의 모음집으로써 뿐만 아니라 북디자이너의 자가발생적인 작업의 결과물로써 총체적인 'DREAM DESIGN' 이 되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로써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책을 ‘the BAF Collection’에 추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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