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피 서울 | 2015-11-30
사람들이 보통 길을 걸을 때 무엇을 보면서 걷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걸음이 빠른 편인데, 양옆을 살피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가곤 한다(그래서 사람들이 필자를 피해 홍해처럼 갈라질 때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곳을 가거나 동행인이 있을 때, 혹은 아무런 목적지 없이 한량처럼 걸어 다닐 때는 찬찬히 걸으며 주변을 살피기도 한다. 사람들이나 먼 하늘을, 또는 주변 풍경을 보기도. 그런데 직업은 못 속이는지, 주변 풍경 중에서 주로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작년 겨울, 친구네 회사 앞으로 놀러 가서 친구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무언가 낯설지만 신선한 이미지가 눈에 포착됐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기사제공 ㅣ 타이포그래피 서울
바로 '카페 파스쿠찌' 간판이었다(참고로 이 글은 특정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영어로 된 간판만 보다가 한글 간판이라니!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낯설지만 왠지 친숙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관광객처럼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여기는 바로 종로구 재동(북촌로).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있는 그곳이다.
보통 '안국역' 하면 인사동 거리를 떠올리게 된다. 필자도 어렸을 적 인사동 거리를 줄기차게 다니곤 했다. 인사동 거리에서는 이런 '한글' 간판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특화된 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거리는 상점들의 간판을 한글로 써야 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순우리말의 이름을 가진 상점 간판들도 있고 기존 영문을 한글로 바꾼 간판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 인사동 메인 거리를 지나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한글 간판들(기존 영문명을 한글로 바꾼 사례에 한함)을 찍어봤다(찍어놓고 나니 화장품 가게가 참 많다). 주로 일반적인 고딕체가 많이 보이고 몇몇은 브랜드 전용서체나 무료서체, 명조체이더라도 고딕의 느낌이 드는 서체들이 사용되고 있다. 고딕체가 많이 사용된 것은 명조체보다 주목성이 좀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의도는 알겠지만, 기존 영문의 BI와 전혀 상관없는 서체를 택한 것 같은 간판이 많이 보여서 아쉬웠다. 지금 인사동과 주변 거리에 해외 상점이 많이 들어선데다가 영문 간판을 단 상점들도 간혹 보이지만, 과거 인사동 거리에는 외국 브랜드가 들어오거나 영문 간판을 다는 일에 사람들이 큰 우려를 표했었다.
바로 스타벅스 인사점 이야기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이 인사동 거리에 외국 브랜드인 스타벅스가 들어선다고 해서 큰 논란이 일어났다. '전통문화 거리에 영어 알파벳이 웬 말이냐'라는 것. 그래서 스타벅스는 한글 간판을 달고 문을 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를 시작으로 영문명을 가진 브랜드들은 다 한글로 된 간판으로 인사동 거리에 진입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스타벅스 인사점을 두고 사람들이 '외국 브랜드가 간판을 한글로 단 좋은 사례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 스타벅스 인사점의 간판을 볼 때마다 참 아쉬운 점이 있다. 스타벅스(STARBUCKS)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나 할까? 그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적으로 나와 있는 간판의 모습이 좀 아쉽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이 글을 읽을 때 염두에 두면 좋을 것 세 가지)
하나, 이 스타벅스 간판은 십 수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니 시대적 미감을 감안해서 봐주시길.
둘, 기본적으로 영문과 한글은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글자임을 전제로 깔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문자 모두 표음문자이긴 하지만, 매우 다른 특성이 있다. 영문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수평으로 나열하는 식의 문자이지만, 한글은 글자 구성하는 낱자를 세로나 가로 혹은 섞임으로 나열하여 만들어지는 모아쓰기 문자다. 그래서 영문의 특징 모두 그대로 한글에 대입할 수는 없다. 일부 특징들은 적용할 수 있겠지만, 적용한다고 해도 구조적으로 다르므로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셋, 앞으로 나오게 되는 검은색의 글자들은 다 사진에서 뽑아낸 이미지다. 화질이 좋지 않고 글자의 형태가 매우 불완전하니 대략적인 느낌으로만 볼 것.
이 한글 '스타벅스 커피'를 보게 되면, 글자 간격이 넓다. 영문 BI가 탁탁탁탁, 연달아서 타이핑되는 타자기 소리 같이 쫀쫀하게 느껴진다면, 한글의 형태는 망치로 탕, 탕, 탕, 탕, 이렇게 네 번을 내려치는 듯, 무겁고 엉기성기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한글의 자간을 수정해 보았다. 그랬더니 한결 짜임새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분명 자간만 조절한 것뿐인데 왠지 모르게 글자의 굵기도 더 도톰하게 보이는 것 같다. 글자를 만들 때 보통 검은색 면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흰색 면(공간) 또한 중요하다. 이 공간은 글자의 바깥 공간과 속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바깥 공간은 위 같은 경우처럼 글자의 자간(문단일 경우에는 행간도 포함됨)으로 조절하게 되고, 속공간은 글자의 내부에서 초, 중, 종성의 위치, 크기, 넓이 등을 조절함으로써 조절할 수 있다. 이렇게 흰 공간과 검은 공간을 모두 다루는 것이 바로 글자(한글) 디자인이다. 그리고 이 글자들을 보면 BI의 한글화를 위해 새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상용서체와 유사하게 보인다.
이것과 동일한 서체를 찾지는 못했지만 유사한 느낌이 드는 서체들을 나열해보았다. 맨 위 글자가 한글 간판에 사용된 글자이고 나머지는 상용서체들이다. 기존 서체를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 만든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새로 만들었다고 해도 기존의 서체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태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앞서 언급한 카페 파스쿠찌 안국점은 간판을 한글화하면서 파스쿠찌만의 서체 형태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맨 처음 영문 BI를 보고 떠올린 서체가 있었는데 바로 '길 산스'였다. 동글동글한 느낌과 'C' 단면의 직선적 형태, 'A'의 크로스바 위치 등이 유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비교해보니 BI에 쓰인 글자가 좀 더 오밀조밀하며 글자 폭의 변동이 그리 크지 않음을 발견했다.
이런 특징적인 부분이 한글에도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글 브랜드명에서 받침(종성)이 없기 때문에 그 특징을 살려서 초성과 중성으로만 꽉 채운 글자를 만들었다. 알파벳의 대문자 느낌처럼 상, 하단을 맞춰서 꽉꽉 채워 넣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가지런하게 보이고, 기본적으로 글자 폭을 글자 높이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먼저 '쿠'와 같은 글자를 보면 'ㅋ'이 크다 보니 모음 'ㅜ'의 세로기둥이 짧아졌는데, 이 모습에서 알파벳 'A'의 크로스바(가로 줄기)가 하단과 거의 닿을 만하게 내려와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다리가 짧아 보이는 것이 닮았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글자의 무게중심이 하단에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세로 기둥 형태의 모음들(ㅏ, ㅔ)이 가진 곁줄기들이 다 내려와 있다.
'파스'의 경우, 'ㅅ'의 두 획 하단에 맞춰서 'ㅏ'의 곁줄기 높이를 맞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BI니까 이런 형태를 허용한 것 같다. 서체에서 글자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분명히 검수 과정에서 지적받았을 것. 개인적인 생각은 '카페'의 경우에선 곁줄기를 올려주고 싶다. 하단으로 너무 내려와 보이는데다가 '페'의 속공간이 조화롭게 분배되지 않아서 제 눈에는 그 부분들이 계속 걸린다.
또한, 영문의 'C'에서 단면이 직선적으로 잘린 특징을 한글에서 'ㅋ'과 'ㅅ' 부분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ㅉ'에서는 적용하지 않았을까? 무언가 의도적인 형태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자리가 모자라서 그랬다면 'ㅉ'의 가로 폭을 좀 더 넓혀서 'ㅅ'처럼 직선적으로 마무리하는 게 같은 글자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카페 파스쿠찌'의 전체적인 느낌은 영문과 한글이 1대1 식으로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영문의 대략적인 특징을 대입하면서 한글의 독특한 모습이 나타난 것 같다. 그래서 지난 겨울 필자의 시선을 단번에 강탈했던 것을 보아, 충분히 주목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한글화된 글자 형태에 대해 사람마다 디자인적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필자는 이렇게 한글화를 시도한 것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싶다! 이 한글 '파스쿠찌' 간판은 아쉽게도 지금은 안국점이 문을 닫아서 직접 볼 수는 없다. 필자도 최근에 다시 갔다가 카페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조그맣게나마 볼 수 있다. 최근 간판을 새로 정비한 다른 지점들을 가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방법과는 또 다르게, 영문 BI에서 독립적인 형태로 한글 간판을 만든 곳이 있다. 그곳 역시 스타벅스이다. 최근 스타벅스는 이렇게 한글 필기체를 사용한 간판을 내걸고 있다(이런 간판은 안국역 주변뿐만 아니라 광화문점, 경복궁역점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심플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영문 서체와 부드러운 한글 필기체의 만남이 무채색의 석조 건물 안에서 마시는 은은한 향의 커피와 만남을 보여주는 것 같다. 14년 전 인사점에서는 영문이 한글로의 변신을 첫 번째로 시도했다는 것 자체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면, 지금은 '영문과 한글이 비슷해야 한다'라는 고정된 생각의 틀을 깬 시도라는 것, 그리고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적 취향을 감안한 시도라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영문의 한글화를 시도하는 것이 한글을 디자인하는 필자에게는 굉장히 흥미롭고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안국역 주변에서 만난 한글 간판이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