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CA | 2015-02-02
고즈넉한 분위기의 흑석동 언덕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한강과 흑석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언덕 꼭대기에 그래픽 디자이너 채병록의 작업실이 있다. 그는 언덕길을 오르는 게 힘들진 않았느냐 물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올랐노라 답했다. 단촐한 그의 작업실에 앉아 그가 가진 디자인에 대한 생각과 그의 작업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기사제공 ㅣ 월간 CA
먼저 간단히 지금까지의 경력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경희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안병학 선생님께서 운영하시던 디자인 사이에서 인턴부터 시작하여 1년가량 일을 배우며 근무하였습니다. 이후 유통기업에서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재직 중 돌연 그래픽 표현의 본질적 연구를 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난해 귀국해 현재 ‘cbr 그래픽’이란 작은 스튜디오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유학을 생각할 당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디자이너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선보인 모던 타이포그래피의 작업들이 유행을 선도했죠. 저 역시도 그러한 작업들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하지만 동양적 사상과 서양적 사상은 생활에서부터 가치관이 다릅니다. 때문에 디자인의 기본적인 맥락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양의 농경생활과 서양의 수렵활동에서의 차이에 의해 미적가치와 정보수용방식도 다른데요. 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접근 방식도 다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서양권의 방식이 아닌, 동양적인 디자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동아시아의 문화를 담은 디자인적 표현을 연구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물론 디자인이라는 것이 서양학문에 그 시초를 두지만, 민간예술에 기반을 둔 아시아 및 동양의 미의식에는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에서 시각적인 표현 그 자체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타마미술대학을 선택하였고, 그곳에서 사토 고이치 선생님 밑에서 시각 표현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둘러보면 포스터가 주를 이루는데요. 특별히 포스터 작업을 선호하시는 건가요?
기본적으로 포스터라는 매체에 가장 큰 매력을 느낍니다. 포스터는 설명문이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그래픽 디자인의 궁극적인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지부터 문자까지 모든 시각요소를 단 한 장에서 표현할 수 있는 시각전달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포트폴리오 사이트에는 제가 지난 10년 동안 작업한 포스터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제 디자인이 변해온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책이라는 매체가 마치 여러 편의 긴 드라마와 같다면 포스터는 강렬한 단편영화 같은 느낌이 듭니다. 펜싱과는 다른 검도를 하는 듯한 움직임인 것이죠.
최근 <모스크바 국제 그래픽 디자인 비엔날레>에서 수상하셨죠? 축하드립니다. 수상작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누들 월드(NOODLE WORLD)>라는 일본의 면 박람회 포스터 입니다. 워낙 개인적으로 면류를 좋아해서 언젠가는 면에 대한 그래픽작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장인들의 손길에서 뻗어나오는 면발의 흐름이 저에게는 마법같이 보였습니다. 무한함과 점점 얇아지는 메커니컬한 요소들이 저의 작업과 잘 맞았던 같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총 여섯 작품이 선정되었고 그 중 <누들 월드>가 포스터 카테고리에서 본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표현 자체를 강조하시는데요. 국내에 이렇게까지 표현을 중시하는 디자이너는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한 학생이 있었는데요. 그 학생의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던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해서 보여주더군요. 그래서 왜 이런 작업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게 그래픽 디자인 아니냐고 되묻더군요.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생각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꼭 모던 타이포그래피만이 그래픽 디자인의 전부는 아닌데 말이죠. 학생들이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으려면 그래픽 디자인 작업물들에서 보다 다양한 스타일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일본에서 배워온 것은 그래픽 표현방식이 아니라 꾸준히 자신의 길을 지키는 디자이너들의 태도였습니다. 일본에서는 길거리에 있는 자그마한 가게만 들어가도 수십 년 이상 지속해온 곳이 많은데요. 그들이 오랫동안 그 가게를 유지해온 이유는 다른 것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만의 생활방식을 꾸준히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일본의 힘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삶의 태도들이 보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사회가 될 수 있게끔 만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태도만을 고집하며 타인의 태도를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 자신 만의 것을 꾸준히 유지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표현의 정체성과 독창성을 꾸준히 유지해나갈 생각입니다. 이러한 저의 모습이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길로 보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더 좋은 디자인 작업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가요?
계속해서 호기심을 갖고 배우려고 합니다. 디자인이란 완성된 내용을 되짚어보는 학문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바뀌는 현재진행형의 학문입니다. 때문에 계속 다방면에 습득을 해야 시대에 맞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클라이언트 작업 외에도 지속적으로 그래픽 표현에 대한 연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제작했던 <축>, <복> 포스터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죠.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 맛있는 쌀이 필요하듯이, 적절한 활자와 서체를 선택하고 형태의 변형 및 색의 쓰임에 대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손을 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한국적인 디자인이기를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