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17
앞의 이야기(탈네모틀 한글꼴의 가독성)는, 그 책의 앞 부분에 밝힌 대로 대부분 3벌식 탈네모글꼴에 해당되는 얘기로 볼 수 있다. 초기 탈네모틀 한글꼴이 제안된 이유는 타자기라는 기계에 적합한 글쇠와 조합 글꼴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난 번 글에도 언급했듯 이후 일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탈네모꼴 글자가 네모꼴에 비해 가독성이 높다는 확신과 심미적으로 우수하다는 생각이 신념의 수준으로까지 강조되었다. 이와 함께 많은 서체 회사와 개인들에 의해 탈네모 한글꼴이 만들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제작된 대부분의 서체가 제작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에 근거한 '조합형 서체(한글 자모(ㄱㄴㄷㄹㅏㅑㅓ...)들을 조합해 표현하는 방식)'가 아니라 '완성형 서체(한글 글쓰기에서 많이 사용되는 글자들을 골라 "가" "나" "다" "라" 등으로 미리 만들어 놓고 한 덩어리로 표현하는 방식)'인 것을 보면 탈네모꼴 글자의 원리보다는, 네모틀을 벗어나면 보기에도 좋고 가독성도 높다는 외형적 우월성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 서체 제작자와 디자이너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된 듯 하다.
기사제공 | 타이포그래피 서울
비록 개인적인 관점이기는 하지만, 조합형 탈네모틀 세리프 글자 중 현재까지 가장 실용성이 높은 본문체로는 '공한체'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산세리프 글꼴은 이보다 좀 더 여러 종류들이 공개되어 있지만, 본문용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지난 번에 한 바 있다. 이들을 제외한 많은 완성형 탈네모틀 글자들은 그야말로 탈네모라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네모틀 글자와 같은 완성형으로 만들어졌다. 기존의 글꼴들과 비교해 네모틀을 조금 벗어나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다만 윗부분은 가로로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고, 아래쪽으로 들쭉날쭉한 탈네모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들 글자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가 받침 없는 모음의 세로획이다.
조합형 탈네모틀 한글꼴에서 받침이 없는 글자들의 아래쪽 공간은 비어 있다. 기계적으로 글자들이 조합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받침이 없는 자리는 비게 마련이다. 시각적으로 받침이 없는 글자의 세로획은, 그래서 충분히 길게 내려 뻗지 못하고 엉거주춤 움츠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네모틀 글자와 같은 완성형으로 만들어졌다. 기존의 글꼴들과 비교해 네모틀을 조금 벗어나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다만 윗부분은 가로로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고, 아래쪽으로 들쭉날쭉한 탈네모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들 글자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가 받침 없는 모음의 세로획이다.
조합형 탈네모틀 한글꼴에서 받침이 없는 글자들의 아래쪽 공간은 비어 있다. 기계적으로 글자들이 조합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받침이 없는 자리는 비게 마련이다. 시각적으로 받침이 없는 글자의 세로획은, 그래서 충분히 길게 내려 뻗지 못하고 엉거주춤 움츠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알파벳에서 탈네모의 주요소는 위쪽이나 아래쪽으로 삐친 직선 획들이다. 탈네모꼴의 가독성이 높다는 논리는 이들 어센더(ascender)와 디센더(descender)의 역할에 근거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글 탈네모꼴에서는 이와 유사한 획들이 오히려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받침(종성)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과 함께, 한글 탈네모꼴의 가독성이 알파벳의 가독성에 비교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차이다.
같은 포인트의 받침 없는 네모틀 글자에 비해 탈네모틀 글자는 현저하게 작다. 가독성(legibility)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는 크기다. 무엇이든 클수록 잘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폰트 디자이너들은 같은 포인트로 타이핑했을 때 최대한 커보이도록 글자를 설계하려고 노력한다.
조합형도 아닌 글자들이 굳이 탈네모틀로 디자인되는 이유가 가독성 때문이라면, 글자의 크기를 포기한 대신 무엇으로 가독성을 높일 수 있을까? 가독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들 글꼴들에는 다른 어떤 장점이 있을까? 다리를 뻗을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종성을 위해 짧은 다리로 움츠리고 있는 글자인 완성형 탈네모 한글꼴을, 심하게 말해 가독성과 조형성 어느 쪽에서도 장점을 찾아볼 수 없는, 이론과 유행의 사생아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위아래로 들쭉날쭉한 글자들도 있다. 글자의 위쪽이 빨래줄에 매달린 것처럼 가지런한 초기 탈네모틀 한글꼴과 차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자들이다. 글자에 대한 다양한 요구와 취향을 감안하면 네모틀을 상하로 벗어난 글꼴들이 어느 정도 조형적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판단은 로고타입이나 간판, 포스터, 패키지 등의 그래픽 용도에 제한되어야 한다. 단어나 짤막한 구절을 넘는 글에서 이런 글자들은 어떤 다른 글자들보다 가독성이 떨어질 것이다. 별다른 가로 기준선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글자들이 글줄의 가로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탈네모틀 한글꼴의 연구는 일단 조합형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적이다. 특히 본문체의 개발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완성형 탈네모틀 글꼴은 네모틀 글자와 견주어 이야기되기보다는, 구조의 묘미를 가진 독특한 그래픽용 장식체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본문용이 아니라면 굳이 그 글자가 탈네모꼴인지 네모꼴인지를 논할 필요가 없다. 디스플레이 용도의 글꼴은 어떤 논리나 디자인의 원리보다 화면에 새롭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면 된다. 탈네모라는 용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정리하면 이렇다. 탈네모틀 한글꼴의 논리적 장점은 있으나 아직 가독성을 비롯해 우수한 글자로서 실용적 증명을 못했다. 타자기 같은 구식 기계가 아직도 유용하다면 탈네모틀 글자의 연구가 시급하겠지만 컴퓨터가 글자 구현을 해결하고 있고 메모리 용량도 충분히 확장되어 있는 현재로서는 탈네모틀 글자를 한글의 그래픽적 표현 가능성을 높여주는 한 가지 방식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특히 완성형 탈네모틀 글자는 특별하게 분류되거나 다루어질 아무런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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