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30
단돈 몇 백 원으로 만날 수 있는 껌. 구멍가게, 편의점, 대형 마트를 막론하고 꼭 구비해 두지만 먼지 쌓이기 십상인 구석에 자리잡은 껌. 하지만 꼬맹이부터 어른까지 두루두루 사랑 받는 껌. 사람마다 껌을 씹는 이유도 가지각색, 좋아하는 껌도 천차만별이다. 오늘은 질겅질겅 껌 타이포를 씹어보자.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운전석에 후줄근한 제복을 입은 사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따금씩 창 밖에 재를 털고, 재를 털 때마다 자판기 커피를 홀짝인다. 사내는 오늘 채워 넣을 사납금을 계산해 본다. 아니, 사납금을 채우고 얼마가 떨어질지 계산해 본다. 운이 좋으면 3~4만원 정도가 떨어질 것 같았다. 담뱃불을 자판기 커피 종이컵에 끄고 보조석 수납함에서 은단 껌을 꺼내 씹는다. 질겅질겅, 지일겅. 천천히 껌을 씹으며 시동을 건다. 쌉싸름한 은단향이 꼭 찌푸린 하늘같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슈퍼에 들어온다. 슈퍼에 들어오자 마자 엄마 손을 팽개치듯 놓아버린 여자아이는 껌 진열대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색색의 껌들을 황홀하게 바라본다. 그 중에서도 아이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껌이다. 계산대 앞에 선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아이는 냉큼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껌을 집어 들고 엄마에게 달려간다. 잠깐 망설이던 엄마는 아이의 손에 들린 껌을 뺏지 않고, 아이는 엄마의 손을 힘주어 잡는다. 가게를 나서는 아이 얼굴에 함박 웃음이 물렸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전화벨 울리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발자국 소리, 김부장이 이대리 부르는 소리…. 시끄러운 사무실 풍경. 이대리가 김부장 책상 앞에 서 있다. 침까지 튀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김부장. 이대리는 어두운 얼굴로 듣고만 있다. 서류뭉치 하나가 이대리 머리 위에서 화려하게 흩뿌려지고 김부장은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처량하게 흩어져 떨어진 서류를 챙기는 이대리. “점심으로 뭘 먹었길래… …. 양치질을 안 할거면 껌이라도 씹고 다니든가….” 애꿎은 푸념을 늘어놓는다.
오물오물 질겅질겅, 이미나 씨가 껌을 씹고 있다. 점심식사 후 입가심할 캔커피를 사러 들렀던 편의점에서 산 껌이다. 씹으면 몸에서 향기가 난다는 문구에 혹해, 일본에서 수입됐다는 말에 솔깃해 산 껌이다. 껌을 씹고 1~2시간 후에 몸에서 은은한 향이 난다는 문구를 속는 셈치고 믿어보자며 퇴근 후에 있을 그와의 약속 시간에 맞춰 오물오물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다. 단물도 다 빠져가고, 티 안 나게 입을 오므리고 씹으려니 턱도 아파오는데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는지 잘 모르겠다. 씹던 껌은 버리고, 새 껌을 꺼내 오물오물 질겅질겅. 장미향이 나는지 보려고 킁킁거리는 데 지나가던 이대리가 말한다. “미나씨, 오늘 샤워 안 했어요?”
야근을 끝내고 집에 가는 길, 담배와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늘 지나다니는 공원 앞 편의점에 간다. 과자 한 봉지, 컵라면 하나를 골라 계산대 올려놓고 시즌 한 갑을 부탁한다. 점원이 담배를 꺼내는 그 잠깐 동안 무심코 내려다 본 껌 진열대. 하필 아카시아 껌이 눈에 띈다. 저게 아직도 나오나. 밥 먹고 나면 그녀는 껌을 씹곤 했는데 거의 ‘아카시아’를 씹었다. 꽃을 먹는 느낌이라나 뭐라나, 후식으로 꽃을 먹는다는 게 낭만적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필이면 눈에 띌게 뭐냐. 가물가물하기만 하던 기억이 껌 하나에 생생해진다. 오늘 밤, 잠은 다 잔 것 같다.
작은 테이블 위에 선곡 번호를 담은 책과, 꽁초와 담뱃재로 지저분한 재떨이와, 빈 생수병 한 개, 물이 반쯤 남은 생수병 한 개, 탬버린과 반주기 리모컨, 껌 한 통과 구겨진 껌종이가 아슬아슬하게 올려져 있다. 반주기에 연결된 모니터에서는 노래와 맞지 않는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부스스한 머리에 후줄근한 차림의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윽고 반주가 끝나고, 노래에 푹 빠진듯한 남자는 반주가 끝날 때까지 눈을 감은 채 허밍을 한다. 빰빠밤- 빠라바라바암- 가수에 소질이 없군요, 더 연습하세요. 남자가 새로운 껌 하나를 꺼내 씹으며 문을 열고 외친다. 아줌마! 여기 30분 더 주세요!
철수 : 영희야, 껌 먹을래?
영희 : 응, 무슨 껌인데?
철수 : 우리 엄마가 사준 건데, 맛있는 거야. 우리 엄마가 어제 파워레인저랑 햄버거랑 사주구, 사준거야.
영희 : 하나 줘봐.
철수, 주머니에서 껌 상자를 꺼내 조심스럽게 꺼내 뚜껑을 연다. 또르륵 굴러 나온 껌을 영희에게 건넨다. 껌을 받으려던 영희가 중심을 잃고 철수 쪽으로 넘어지고, 그 바람에 껌 상자에서 껌이 모두 쏟아진다.
철수 : 야! 껌 다 흘렸잖아! 너 때문이야!
영희 : 미안.
철수 : 아씨, 짜증나! 너 때문이야!
영희 : 껌 하나 가지고 되게 그러네. 유치하게.
철수 : (금세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리며 영희를 노려보다 울음을 터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