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15
1970년대 한국 사회는 경제 성장과 도시로의 인구 집중으로 주거난, 교통난 등의 삶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서울 확장 계획이 세워졌고, 도시 기반 시설의 정비도 착수되었다. 해결방안으로는 영동(강남)과 여의도 개발이 모색되었고, 지하철과 고속도로 건설이 추진되었다.
글 |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1966년 이후로 한국 경제는 매년 수출 증가율 40%를 기록하며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다. 대량생산체계를 갖춘 공장이 신설되고, 산업 시설이 확장되면서 생산량은 빠르게 증가했고 경제 활동의 속도 또한 가파르게 상승했다. 산업의 발달은 자동차와 교통 분야의 공장 화물 운송 수요를 상승시켰고, 신시가지의 개발로 시멘트, 골재, 목재 등의 건축용 물자 운송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처럼 수송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당시철도라는 수송수단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도로사정은 형편없었다. 정부는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했다. 고속도로 건설은 엄청난 규모의 인력과 장비, 자금, 자재를 요구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실정으로는 재정도, 기술도, 장비도 부족해 이를 염두에 두지 못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1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 울산정유공장이 준공되어 대량의 아스팔트 생산이 가능해졌고, 시멘트 생산시설도 확충되었으며 해외 도로사업 진출로 건설기술을 익힌 기업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67년 착공한 경인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세워진 고속도로건설 10개년계획과 함께 70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이후로 고속도로는 호남, 영동, 남해, 동해, 구마, 부마 등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수송구조는 철도에서 도로 위주로 바뀌게 되었고, 자동차의 생산 또한 촉진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한다는 의미를 넘어, 한국경제의 지속적인 경제적 번영을 약속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고속도로가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있었을지라도, 대중에게 고속도로는 삶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인 건축물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전국토를 일일생활권으로 좁혀 놓았고 사람들의 거리 공간 인식을 확장시켰다. 기차로 10시간이 걸리던 서울~부산 구간이 5시간으로, 동해안은 8시간대에서 4시간대로 시간이 단축되면서 기차만을 이용하여 지방으로 이동하던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게 되었다. 장거리 여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바캉스’라는 외래어도 유행했다. 이전에는 뚝섬, 창경원, 인천 월미도로 놀러 갔다면, 동해안이나 제주도로 여행하는 일이 잦아지는 등 레저와 여행을 위한 장거리 이동이 일반화되었다.
더불어 고속도로는 도심으로 인구의 유입을 유도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도심 인구 집중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증가한 주거 및 교통 문제는 도심의 건물들이 주거공간과 도로,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고층으로 세우도록 했다. 이렇게 고속도로는 한국 사회전반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심외곽으로 지방을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활발하게 건설되는 동안, 서울에서는 본격적인 도심 교통수단의 정비에 착수했다. 그간 성장일변도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도시민의 이동을 담당하는 대중교통수단과 도로망의 정비는 인구 증가를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서울시는 교통난을 완화하고 대중교통수단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지하철을 건설하기로 했다. 1968년부터 전차가 철거되기 시작했고, 71년에는 지하철 건설이 착공되었다. 지하철이 개통되기까지 버스는 서울 시민의 대중교통 수단의 역할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지하철이 개통된 74년 통계에 의하면 서울의 대중교통수단의 수송분담율은 버스 81%, 택시 18%, 지하철 1%로, 버스는 70년대 서울의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었다. 버스에만 의지한 교통체제는 대중의 삶에 심각한 불편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하철이 건설되는 동안에 강남과 여의도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버스 수요는 폭증했고, 신시가지 강남의 주민들은 공사 중인 허허벌판에서 길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할 만큼 당시의 대중교통 환경은 피폐했다.
이러한 교통난은 차량의 배치가 산업 활동에 집중되면서 더욱 가증되었다. 1977년 8월말 서울시의 자동차등록대수는 관용과 자가용이 전체차종의 71%를 차지하는데 반해, 영업용차는 29%에 불과했다. 이 비율은 전년도말에 비해 승용차 22%, 화물차 13%, 버스 10%가 증가한 것으로 자동차 생산이 대폭 증가했지만, 늘어나는 자동차는 개인 사업용 또는 산업 활동에 필요한 화물 운송 등에 집중되고, 대중의 교통편의에는 비중이 덜 실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집단적인 물질의 향상을 위해 개인의 삶의 질은 부차적인 문제로 여기는 당시의 정서를 투영하고 있었다. 더구나 육교, 지하도, 터널, 고가도로, 시내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간선도로 등 교통도로가 건설되면서 진행된 노면 공사 는 교통 혼잡을 더욱 가증시켰다. 자동차의 증가와 도로망의 미비 속에서 승차난과 도심 정체는 ‘지옥’을 방불케 하였지만, 그래도 대중은 조국의 근대화와 미래의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서 그 정도의 고통은 감수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인내했다.
이전 시대에 교통지옥은 자동차가 부족한 데서 오는 승차난을 의미했지만, 70년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차량의 급격한 증가가 가져온 도로의 정체도 포함하게 되었다. 특히 대기업체에서 간부급 임원들에게 회사차를 직접 운전하도록 운전사 없이 차량을 제공하면서, 중류층 이상의 봉급생활자를 중심으로 오너 드라이버붐이 일어났고, 면허를 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 운전학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개인 기업에서도 업무용 차량의 구매가 늘었으며, 상가나 농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물품운반과 자가용을 겸한 용도로 포니픽업, 브리사픽업 등의 구매도 증가했다.
대중 교통기반시설이 아직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구가 늘어나고 생산 활동이 증가하면서 도시의 삶은 빡빡해져만 갔다. 특히 출퇴근시의 교통상황은 도시민의 치열한 삶을 대변했다. 도시 샐러리맨의 출퇴근은 ‘전쟁’이라 표현될 만큼 사람들은 항상 콩나물시루처럼 만원인 버스에서 시달려야 했다. 교통신문은 1978년 정원이 72명인 버스에는 155명이 승차하여 혼잡도가 215%였다고 발표했고, 뉴스는 교통 전쟁을 매일의 화제 거리로 소개하고 있었다. 버스가 정차한 곳으로 여기저기 뛰는 사람들, “빨리 빨리 타세요”라고 외치며 만원버스에 승객을 밀어 넣는 버스안내양, 승객을 안으로 몰아넣기 위해 급출발과 급정거를 되풀이 하는 ‘조리질 운전’, 조리질 운전에 이리저리 서로 부딪치며 넘어지듯 쏠리는 버스 안의 풍경 등은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만원버스는 사람을 짐짝처럼 다루어 ‘살인버스’로 언급되기도 하였고, 버스기사가 부족하여 운전솜씨는 차치한 ‘초보운전’이라는 표지를 단 버스가 출현하여 화제에 오르기도 하였다. 버스 안내양의 열악한 근무조건과 빡빡한 작업강도, ‘삥땅’에 대한 기사도 자주 등장하였다. 삥땅은 주로 취업을 위해 서울에 올라온 10대 후반이나 20대의 시골처녀들로 구성된 버스안내양들이 승객으로부터 받은 차비나 차표를 빼돌린다는 것으로 삥땅 의심을 받은 안내양이 몸수색을 당해 인권시비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삥땅’시비는 ‘공순이’라고 불리는 여성들과 함께 한국의 고도 성장기에 드리워진 어두운 일면을 말해 주었다. 이러한 교통전쟁은 90년대 중반을 넘어 지하철과 도시철도가 대폭 확장되고 버스와 택시도 다양해지기 전까지 도시민의 일상적인 삶의 부분을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심의 거리는 대단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중은 기초적인 질서의식이나 공중도덕에 관한 관념이 부족했으며, 운전에 대한 상식도 별로 없어 교통사고가 급증하고 있었다. 정부는 교통사고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시키고 안전의 생활화를 위한 범국민적인 운동을 연일 펼쳤다. 이러한 캠페인은 전국민의 질서 의식을 바로 잡아 나가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발적인 참여의식을 유도한다기보다는 강제적인 것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경찰관은 거리 한복판에 목책을 둘러놓고 ‘보행위반자‘라고 써 붙인 임시유치장을 만들어 통행위반을 한 사람들에게 범칙금 고지서를 배부하고 있고, 범칙금고지서를 발부받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규칙을 위반했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경찰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러한 임시유치장은 인권 침해의 비난을 받을만하지만, 당시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배려 없이 시민의 의식과 행동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집단적 문화 속에서 이와 같은 통제는 문제시되지 않았다.
캠페인은 질서의식을 강조하는 것 외에도 기초적인 운전 상식과 요령을 알려주는 내용도 많았다. 당시 발행된 “안전운전요령”은 현재에는 너무도 당연시 하는 기초적인 내용이지만, 자동차를 처음으로 운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시대에서 새로운 도시생활의 규율과 행동을 체득해야만 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1970년대 자동차와 도로는 경제 성장과 함께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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