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연 | 2003-07-13
고호 집에 놀러가기
고호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으로 다가온다.
작품들도 해바라기나 귀가 잘린 자화상이나 꿈틀꿈틀 용솟음치는 들판을 날아가는 까마귀를 그린 작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산책이나 하듯 고호네 집에 놀러가는 방법을 알려주마.
고호네 가는 길은 파리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거리인 오베르 쉬르 오와즈 AUVERS-SUR-L'OISE 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작고, 아담한 마을이다. 그 하숙집이 지금은 고호 박물관이 되었으니, 하숙집과 고호의 인연은 세기를 넘어서는 우정을 자랑하는 셈이다. 그런데 고호가 묻혀 있는 AUVERS-SUR-L'OISE 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잠자는 것 또한 마찬가지인데, 그럴싸한 호텔이 하나 없다.
가난했던 고호가 물감을 사기 위해 헐값에 그림을 팔고 다녔던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깡 시골일 수밖에 없었다.
고호네 가는길은 보통 어려운 코스가 아니다. 가는 것도 힘들고, 돌아오는 길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에서는 아무리 시골이라고 하더라도 기차를 타고 가서 택시로 바꿔타면 못가는 곳이 없고, 아주 손쉽게 갔다 올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러나 고호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는 '오베르.슈르.루와즈'(AUVERS SUR L'OISE)는 예외이다.
파리에서 불과 1시간 거리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교통편이 잘 이어지지가 않는 촌동네이다.
"과연 고호같은 가난뱅이 화가가 살다 묻힌 동네는 고호가 죽어서 까지도 소외된 동네로 남아 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는데 말이다.
사진1: 귀가 잘린 고호의 자화상을 이용해 그린 달걀모형
고호는 '오베르'동네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공동묘지라고 하면 으시시한 느낌이 들지만, 막상 가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특히 날씨가 좋은 날 가보면 양지 바른 곳에 고호와 테오, 두 형제가 나란히 누워있는 무덤이 아늑해 보이기까지 한다.
거무티티한 이끼가 끼어 있어서 스산한 느낌은 들지만, 따사한 햇볕, 그리고 세느강 지류를 끼고 소담스럽게 앉아있는 마을 풍경이 보여서 좋다.
'오베르' 마을은 한마디로 완전히 '고호의 동네'나 다름이 없다. 고호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마을은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서 지도에서조차 사라졌을런지도 모른다. 마을 한가운데에 '고호'가 그의 마지막 여덟달을 살았던 여인숙 겸 까페가 '고호 기념박물관' 간판을 달고 버젓이 서있다.
박물관은 옛 모습 그대로를 그대로 살려서 내부를 싹 뜯어 고쳤는데, 고호의 이미지와는 달리 꽤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루브르나 오르세 박물관처럼 많은 발길이 미칠 수는 없지만, 일부러 이 시골구석까지 찾아온 전세계로부터의 방문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고호가 잠자던 다락방이 그대로 보존 되어있어서,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마치 한쪽 구석에서 당장이라도 고호가 튀어 나올 거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1층의 식당 자리도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고호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빵을 씹으면서 포도주를 한잔 마시느라면, 감회가 착찹하기 그지없다.
한마디로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37살 인생을 가난의 극치에서 살다간 그의 영혼에 대한 상념으로 뭉클하고, 머리가 무겁다.
고호가 여덟달동안 내내 거닐고, 그림을 그리던 동네 골목길로 들어서면 감동은 깊이를 더 한다.
사진에서 많이 보아온 너무나 낮이 익은 친근한 풍경들이 기다리고 있다.
고호의 그림속에 나오는 성당, 밀밭들이 고호의 그림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다.
마치 나 자신이 100년전 고호의 그림속에 박제되어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 손쉽게 고호네 집 놀러가는 방법 ---
1) 북역에서 '뽕뚜와즈'(PONTOISE)까지 가서 택시 타고 왕복한다.
(북역-뽕뚜와즈 교외선은 편수가 아주 많다. 교외선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가면 택시가 한 두대씩 있다.)
돌아 올 때는 마을 까페에 가서 차 한잔하고 콜.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해서 뽕뚜와즈까지 와서 교외선으로 갈아타고 파리 북역으로 들어온다.
빈센트 반 고호 (Vincent Van Gogh 1853-1890)
반 고호 1853년 네델란드생,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생활하게 된 고호는 몽마르트르에 거주.
고호 그림의 스승은 렘브란트
초기의 걸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Les Mangeurs de pommes de terre)'을 완성. 노동자 농민등 하층민의 그림으로, 색조는 렘브란트나 밀레를 따라 지극히 어두었다. 주변의 생활과 풍경의 반영이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결코 귀족이나 귀부인들이 아니다. 농부 광부 직조공 우체부등 하나같이 가난하고 소외된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군상들로서 반고호 자신이 애정있게 보아온 존재들이다.
파리에서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에서 베르나르와 로트렉을 알게됐고 또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끼요에를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나 밀레의 어두운 화풍을 접고 밝은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다.
그후부터 고흐는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화가인 툴르즈 로트렉 역시 반 고흐에게 남프랑스로 갈것을 권했다. 그러나 재정형편상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일본의 풍광 을 닮은 남불 프로방스로 가게된다. 그는 1888년2월 아를르로 이주했다. 그뒤 2년간 고흐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예술을 불꽃처럼 불태운다. 그러나 곤궁한 생활은 여전했다. 나흘동안 아무것도 못먹고 커피만 23잔을 마신 적도 있다.
그는 남프랑스에서 이글거리는 밝은 태양, 빛나는 별, 삼나무 숲, 카페, 강과 다리등 맑고 밝은 풍광에 사로잡혀 건강도 돌보지 않은채 오로지 그림만을 그렸다. 또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것을 간곡히 청했다.
고갱은 1888년 아를르에 도착하여 두 화가의 공동생활이 시작. 그해 12월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다.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날로 자신의 귀를 잘라 버렸다. 고흐는 발작과 입원의 생활을 계속했다. 발작이 없는 동안에는 불꽃처럼 그림을 그려댔다.
'셍레미 정신병원의 복도(Le Couloir de l'asile de Saint-Remy)'는 당시의 걸작이다.
권총자살 성당위 공동묘지에 묻히다
정신병에 지친 그는 예술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와즈의 정신신경과 의사 가세에게 찾아간다. 90년 5월. 그는 오베르에서도 많은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렸다.
<의사 가셰>
나 그의 딸인
<마르그리트 가셰>
는 이 때의 걸작이다. 권총자살을 기도해 죽었다. 그리곤 오베르 쉬즈 성당위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1987년11월12일 Les Iris(붓꽃)은 소더비 예술품 경매에서 3억2천만프랑(약 768억원)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값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생전의 그는 그림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었다.
1903년의 유작전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주목했다. 그는 짧은 생애에서 875점의 회화와 1,100점의 데셍을 그렸다. 특히 남불의 시대에서만 보면 아를르의 시절에 회화 185점 데셍 125점을 그렸으며 셍레미시절에는 150점의 회화 140점의 데셍을 그렸다. 저명한 작품은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
<아를르의 도개교>
,
<해바라기>
<아를르의 침실>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삼나무와 별이있는 길>
등이 특히 유명하다.
회화를 소장국가별로 보면 네델란드364점, 미국 190점, 스위스 80점, 프랑스 45점, 영국 35점, 독일 25점, 러시아 10점, 암스테르담의 반 고호 미술관 205점, 오텔로의 크롤러 뮐러 미술관 95점등이다.
삼나무와>
밤의>
별이>
아를르의>
해바라기>
아를르의>
마르그리트>
의사>
고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또한 우울한 기분에서도 헤어날 수 없다. 비록 소박한 감정과 양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인도해 주는 유일한 요인도 아니고 더구나 우리들을 결정적으로 지켜주는 것도 아니다. 젊은 시절의 예술가의 생활개념으로부터 이처럼 멀어진 상태에서 사는 처지에 있어서는 우연이란 일도있으므로 너도 무리한 책임을 굳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면 어느 쪽으로도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 둘은 공통된 운명의 친구인 동시에 동료와도 같다....
...보랏빛이 내가 상상하고 있던 대로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과연 오베르는 멋진 곳이다.
캔버스 때문에 여러 가지 비운을 만날 것을 예감하더라도 제작하는 편이 제작하지 않는 편보다는 훨씬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 곳은 색채가 대단히 풍부한데, 나의 취미에 맞는 빌 다브레이 등보다도 더 아름다운 상류의 별장이 있다.
... 여기서는 여러 가지를 그릴 수 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나의 작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책이다. 다른 일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너무나도 뒤떨어진다. 다른 재능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오히려 일을 하지 않거나 일을 줄이면 배의 비용이 든다. 그것만을 마음에 두고 있다. 당연히 걸어가야 할 길인 일 이외의 길을 찾다가는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일을 하고 있으면 이 곳 사람들은 내가 일부러 찾아가지 않더라도, 또한 애써 알려고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된다.
... 전원이나 그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고장을 보는 도리밖에 없다.
...그렇다. 틀림없이 우리들은 자기들의 그림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 관련성 있는 위기에 즈음하여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네게 그 말은 적어도 중요한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현지 실존하고 있는 예술가나 과거의 예술가의 그림과 화상과는 지금도 완전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
... 그렇다. 나는 자신의 일을 위해서 목숨을 내던졌으며, 내 이성을 반쯤 잃어버리면서까지…….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고흐의 편지 - 베르나르에게
...앞으로 회화가 그러할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지만, 현대 미술 그 자체가 동떨어진 개인의 힘을 넘어서, 그리스 조각가나 독일 음악가, 프랑스 소설가들에게 필적할 높은 지위로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사람들이 결합하고 공통의 이상을 수행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색채의 멋진 구성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창의가 결여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호소력과 매력이 풍부한 참신한 착상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나, 겁쟁이여서 정해진 팔레트는 바꿀 줄도 모르고 빛깔이 완전히 노래하는 표현을 취하지 않는다.
불행의 크나큰 원인은 예술가들 사이에 단결심이 결여되어 있고 서로 비난을 하거나 박해를 하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어떻게든지 출세시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는 시시하다고 자네는 말하고 싶겠지. 좋다! 그러나 새로운 르네상스의 실현은 모두 여기에 달려 있는 것으로, 물론 시시한 것은 아니다. 기술문제에 관한 자네의 의견을 다음 편지에서 알려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