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 통신원 | 2008-08-05
좋은 포스터란 무엇일까? 아름답거나 메시지가 분명한 포스터일까. 혹은 아이디어가 기발하거나 상업적 영향력이 큰 포스터일까. 지난 한해 제작된 포스터 중에서 가장 좋은 포스터를 선정하는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 최고의 포스터 100’ 공모전은 매년 이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고민한다.
취재ㅣ
포스터 도판 자료제공ㅣ © 100 Beste Plakate e.V. (www.100-beste-plakate.de)
지난 6월 12일부터 25일까지 베를린의 쿨투어포룸(Kulturforum)에서 ‘2007년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 최고의 포스터 100’ 포스터 전시가 열렸다. 전시 오프닝에 맞추어서 전체 수상작을 수록한 책자도 출간된다. 매년 베를린 전시를 시작으로, 유럽과 세계 여러 도시들을 순방하며 전시를 가진다. 새해가 시작하면서 한달반 동안 지난해에 만들어진 포스터들이 접수되고, 심사는 2월말에 이루어진다. 올해는 488팀의 개인과 단체가 보낸 1662편의 개별 및 연작 포스터들이 접수되었다.
이 행사는 1966년 구동독 지역의 포스터 공모전에서 출발하여, 2001년부터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아우르는 독일어권 전지역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1등, 2등 같은 순위나 등급이 매겨지지 않은 채, 100선이 완전히 동등한 자격으로 뽑힌다는 점에서 이 공모전의 재미가 있다. 출품 자격에도 제한이 없어서, 학생 작품이 선발되는가 하면 그를 지도하는 교수의 작품이 탈락되기도 한다. 이름있는 작가의 포스터가 미술대학 학생이나 신인의 작품과 대등하게 전시된다.
심사위원단이 매년 새롭게 구성되기 때문에, 이 포스터 공모전은 특정한 성향에 좌우되는 고정된 틀을 가지지 않는다. 심사위원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3개국 5명의 전문가로 위촉된다. 심사는 이틀에 걸쳐서 이루어지는데, 첫날에는 별다른 이견없이 누가 봐도 좋은 포스터들 수십점이 순식간에 결정된다. 이튿날, 100선이라는 커트라인에 가까워질수록 심사위원들의 고민은 깊어진다. 포스터라는 매체에 관한 심사위원들 개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이 갈리면서 토론이 이어진다. 그들의 결정이 대중에게 공개된 후에는, 결국 관객들의 심사를 받게 된다. 도대체 무슨 기준에 의해 좋은 포스터로 꼽혔을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작품들도 어쩔 수 없이 등장한다.
이 공모전의 또다른 특징은 독일어라는 언어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독일어권 지역에서 사용된 포스터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스위스의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출품된 포스터도 뽑혔지만, 독일어가 전반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것은 분명하다. 언어란 때로는 그 자체로 포스터의 아이디어와 시각적 문법을 결정하기도 한다.
und du bisch duss!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는 본토 독일인들조차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던 극심한 스위스의 독일어 사투리이다. 스위스 사투리란 아랍 문자만큼이나 알아먹기 어렵다는 비유가 재치있게 표현되었다. 오른쪽은 쥬시 후르트(Juicy Fruit)라는 껌 광고이다. 달콤한 껌에 새콤한 맛을 가미했다. 독일어로 ‘달콤하다(süß)’라는 단어에는 ‘귀엽다’라는 의미가, ‘시다(sauer)’라는 단어에는 ‘열받는다’라는 뜻이 있다. 메인 카피에 ‘귀엽고 달콤한 것에는 이제 신맛이 난다’라고 써있다. 귀여운 녀석들의 반란! 동화 속의 귀여운 주인공 ‘빨간 모자’는 늑대를 신나게 응징하며 ‘신맛’을 보여준다.
일러스트레이션이 돋보이는 포스터가 있는가 하면, 타이포그래피가 주도적인 포스터들도 빠질 수 없다. 81년생인 파울라 트록슬러의 포스터는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에게 특별히 좋은 호응을 얻었다. 일러스트레이션 포스터에는 빈 레이디페스티벌(Ladyfest Wien)의 예처럼 작가의 손글씨가 적극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올해 타이포그래피 포스터 가운데는 유독 미술대학 학생 작품이 많이 보였다. 이번에 선발된 학생 작품은 전체 100선 가운데 1/4에 해당하는 25선에 이르렀다. 독일어권 여러 미술대학의 졸업전시나 프로젝트, 강연, 행사 내용을 담은 포스터들에서는 다양한 학교들의 최근 성향을 엿볼 수 있다.
뉴페이스들의 약진에 더불어, 매년 보이는 유명한 이름들이 또 하나의 무게중심을 형성한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디자인 그룹 Cyan은 변함없이 튀는 감각을 보여준다. 역시 베를린에 자리잡은 중국 디자이너 헤쟝핑의 작품으로는 도쿄와 교토에서 개최된 AGI(Alliance Graphique Internationale) 행사 포스터가 뽑혔다. 그는 도쿄라는 도시에서 파생된 형태들을 중첩하여 이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귄터 칼 보제의 작품 중에는 뮌헨의 음악행사인 무지카 비바(Musica Viva)를 위한 포스터가 채택되었다. 이 무지카 비바 포스터 시리즈는 요제프 뮐러 브로크만이 전임자로 유명했다. 귄터 칼 보제는 많은 텍스트 정보를 담아내야만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해결했고, 순수조형요소만으로 경쾌함과 무게감을 획득했다.
이 밖에 우베 뢰쉬(Uwe Loesch)와 니클라우스 트록슬러(Niklaus Troxler)의 포스터도 언제나처럼 눈에 띄었다. 이 공모전은 이들 작가들이 지난 한해 동안 어떤 동향의 작업을 했는지 감지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올해에는 아쉽게도 학생이건, 신인이건, 기성작가건 놀랄만큼 참신한 작품이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것이 심사위원단과 관객들의 중론이다.
본 공모전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가장 아름다운(schönste) 포스터’가 아니라, ‘가장 좋은(beste) 포스터’를 표방한다. 그런데 디자인이 출중한 심미적인 포스터들에 두드러지게 치중되다보니, 그러한 선발기준에 대한 회의와 불평이 제기되어왔다. 포스터는 엄밀히 말해 순수예술분야가 아니다. 실용적 목적에 충실한 포스터 역시 ‘좋은 포스터’로 꼽힌다. 로레알(L'ORÉAL)사의 샴푸 및 목욕제품 광고는 명화에 빗대어 제품의 성능을 명쾌하게 알렸다. 자고로 역사는, 루벤스 작품 속 풍만한 여성들의 ‘울퉁불퉁 오렌지피부’에 메두사의 뱀머리같은 ‘빳빳한 머릿결’과 함께 해왔다는 내용이다. 메르체데스 벤츠사의 스노우타이어 광고는 동심원의 기하학적 형태감이 시선을 끈다. 초소형차 스마트(smart)는 육중한 버스와 택시 사이에 조그맣게 끼어드는 민첩성을 보여준다.
공모전에서 선발된 100선의 포스터들은 해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전시된다. 시리즈 포스터들을 합산하면 100점을 훌쩍 넘어서는 거대한 종이들이 대등하게 보이도록 해결하는 것이 전시 구상의 관건이다. 올해의 전시 기획은 카셀 미술대학(Kunsthochschule Kasse)의 제품디자인학과 프로젝트 팀에게 의뢰되었다. 그들은 5가지 구상안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포스터를 걸거나 벽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3차원 양면 오브젝트인 조립식 벽으로 만든다는 아이디어가 채택되었다. 여러 도시들을 옮겨 다니며 전시할 때, 어느 전시공간에나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는 효율성에서 높은 평가를 얻었다.
전시장에서 실제 크기의 원본 포스터를 감상할 수 있다면, 도록은 소장 가치에 더불어 전시 공간의 한계를 최종적으로 보완하는 역할도 한다. 예컨대 루에디 바우어 강연 포스터의 경우, 4점으로 조각난 포스터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프로세스를 보여준다. 이런 아이디어 진행과정은 전시장 아닌 책을 통해서 보다 명확히 전달될 수 있었다. 독일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선도적 위치에 있는 마인츠의 헤르만 슈미트 출판사(Verlag Hermann Schmidt)에서 도록을 발간하며, 매년 특집이 기획된다. 올해는 이웃나라인 ‘프랑스의 포스터 경향’이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좋은 포스터는 항구적인 가치가 퇴색되지 않으면서도, 동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주도한다. 종이에 인쇄된 포스터들은 TV와 인터넷 광고의 홍수 속에서도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 함께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터는 시대의 증인이다. 어떤 해에는 보다 뛰어난 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어떤 해에는 전반적으로 저조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기복마저도 역사가 된다. 그 해의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 최고의 포스터 100’ 행사는 독일어권 포스터 디자인의 역사를 매년 새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