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영 통신원 | 2008-02-19
바야흐로 일본은 졸업작품전의 시기이다. 그 동안 작업에 열중했다면 이제는 전시공간에 더 정성을 쏟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어디에 어떻게 걸리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마련인데 졸업작품전도 예외는 아니니 말이다. 일본의 많은 졸업작품전 중에서도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첨단예술학표현 전공의 졸업전이 돋보였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도쿄예술대학은12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최고의 국립예술대학이다. 첨단예술학표현 전공이 생긴 것은 6년 전으로 미술 분야를 넘어 다양한 생각과 감성을 가진 사람들과도 자유롭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인재육성이 목표라고 한다. 지난 1월 19일부터 27일까지 ‘표현 형태에 사로 잡히지 않는 새로운 예술 분야의 구축’ 이라는 테마로 4기생(28명)들의 특색 있는 졸업작품전이 개최되어 살펴보았다.
취재 ㅣ
전시회가 열린 자임(ZAIM)은 겉에서 보기에는 요코하마의 여느 빌딩들과 다르지 않다. 관심이 없다면 그저 개화기에 세워진 낡은 건축물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칠만한 곳이지만 재미있게도 이곳은 갤러리이자,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레지던스이다.
1928년에 세워져 한때는 ‘관동 재무국 요코하마 재무 사무소’ 등으로 쓰이기도 했던 곳을 현재는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젊은 아티스트들의 창조 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재)요코하마시 예술 문화 진흥 재단이 관리 운영하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조용히 자리잡은 낡은 건물이 전람회·콘서트·퍼포먼스·영화상영회·심포지엄 등의 이벤트나 회의장으로 사용되며 창조적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전시회가 있기 두어 달 전에 장소가 결정되고 학생 한명 당 하나씩의 독립적인 전시공간이 주어졌다.
물론 처음부터 갤러리를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스페이스는 모양도 크기도 달랐지만 그것이 오히려 전시회를 더욱 다이나믹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회화, 사진, 설치, 실험, 영상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영역도 표현기법도 제각각이다. 그러고 보면 다양하고 자유로운 예술적 교감이 목표인 이들 속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포토그래퍼인 하루카 히로세씨의 설명에 의하면 자신들은 전시회라는 프레임보다 새로운 것을 향한 자유로운 창작행위 그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한다.
작업 포트폴리오를 보는 것 만으로도 작품 이상의 감동을 주는 이도 많았고 우수한 수상경력이나 해외전시 경력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이노마타 아키씨의 ‘이노센트 미스치프(innocent mischief)’라는 작품이다.
컴퓨터, 솔레노이드벨브, 수조, 할로겐라이트 등을 이용하여 만든 작품으로 천장에 있는 장치에서 중간의 투명판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그려내는 파문이 바닥에 투영된다. 비록 계산된 수치의 속도로 떨어지지만 여러 개의 물방울이 만나 그려내는 동그라미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방안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첨단예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수많은 방들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자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하다. 이곳에는 주로 영상작품이나 빛을 다루는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할렘가 뒷골목 같은 음습함을 간직한 그곳이 묘하게도 작품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80년의 시간을 이야기하듯 금이 간 벽과 낡은 천장은 그대로 전시공간의 액세서리가 되었고 굳이 빛을 차단할 필요도 어둠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 벽을 메운 영상작품과 전시를 위한 최소한의 조명이 전부였지만 그들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으며 지하 스페이스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이 되어 있는 듯 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28명의 개인전과 하나의 졸업작품전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예술적 마인드와 최상의 공간을 찾아내는 재치, 그리고 창조를 향해 새로운 시도를 마지않는 그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때마침 좋은 전시회를 통하여 이곳을 소개할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관련 사이트 http://ima-master2008.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