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영 통신원 | 2006-08-22
관광으로 도쿄를 찾는 사람들에게 일본이라는 나라가 주는 첫 인상은 대부분 질서를 잘 지키는 깨끗한 나라이거나 여러 가지 시설과 기계가 발달한 첨단도시 정도일 것이다. 더욱이 한국인이라면 금방 보기에 서울과 너무도 닮은 도쿄의 모습에서 낯선 외국의 향기를 느끼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보면 여기가 외국은 외국임을, 그것도 도쿄임을 실감하게 된다. 분명 이곳은 어린 시절 만화 속에서나 보던 공중도시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고, 애완견로봇과 함께 산책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첨단 도시인 것이다. 길을 나서면 고가의 브랜드 샵들을 쉽게 만날 수 있고, 세계적인 아티스트나 디자이너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부유한 나라임에도 틀림없다.
취재 ㅣ 문주영 통신원
그래서 도쿄라는 도시가 주는 표면적인 인상은 따뜻하기 보다는 차갑다. 개인주의적인 국민성과 수도라는 이성적인 만남이 도쿄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차갑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일본이라는 나라는 양면성이 짙은 나라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나 패션리더들이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활 속에서 전통의상을 즐겨 입고, e-메일 보다는 우편을 통한 업무방식이나, 컴퓨터보다는 손으로 쓴 이력서와 원고지를 좋아하는 아이러니한 나라이다.
길에서 만나게 되는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첨단장비를 동원한 미래지향적인 디스플레이가 있는가 하면 해외 브랜드임에도 일본특유의 색으로 탈바꿈되어 전통적인 느낌을 강조한 것도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전문 디자이너에 의해 다듬어진 디자인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소재나 유머조차 세련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숙련된 디자이너들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길만 나서면 언제나 훌륭한 디자인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어서인지 아니면 너무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인들이 많아서 시각적 충격에 대한 역치가 커져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때로는 너무 잘 된 디자인들에 대해 갑갑함을 느끼기도 한다.
조금 미숙하고 조금 덜 다듬어졌지만 절대 심심하지만은 않은 소박한 디자인들, 어쩌면 다듬어진 그것들보다 더 자주 접하고 있는지도 모를 바로 그런 일상의 디자인들을 보며 호흡이 편해진 경험은 없는지. 너무 함축적인 표현으로 어렵게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디자인들에 대해서 통쾌해 본 적은 없는지 말이다. 오늘은 바로 그런 소박하고 유쾌한 디자인들에 대해서 살펴볼 생각이다.
다행히도 이곳 일본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촌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낡은 것이나 사람의 손끝에서 나오는 결과물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첨단의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다. 도쿄에서도 관동 대지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시모기타자와는 아직 활발하게 재개발이 시작되지 않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가게들이 자주 눈에 띄고 아사쿠사를 중심으로 한 주변 길은 여전히 전통공예나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이들로 그 역사성을 잃지 않고 있다.
사실 아사쿠사 주변의 상점들은 예로부터 시에서 관리를 했었는데, 길의 성격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같은 느낌으로 통일을 하되 각 상점들의 특징만은 최대한 살려 주자는 것이었다. 나무를 사용하거나 전통 등 등을 달기도 하여 만든 간판들은 어느 것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고 잘 조화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획일적이지도 않다.
빗을 판매하는 샵은 간판대신 그냥 빗을 하나 올려놓았다. 빗이 곧 간판인 셈이다. 샵이나 브랜드를 설명하는 요란한 타이포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빗만 걸어놓았을 뿐이지만 우리는 이곳이 빗을 만드는, 그것도 전통빗을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전통의상이나 부채, 활등을 만드는 가게들도 모두 문자보다는 간판의 형태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고 심지어는 술을 판매하는 곳도 바를 연상시킬만한 의자를 하나 파 넣어 샵의 성격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아주 쉽지 않은가? 특히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임을 감안했을 때 이만큼 쉬운 메시지가 어디 있겠는가.
이번에는 관광지인 가마쿠라대불 입구에 위치한 기념품가게를 살펴보자. 계획적으로 정리된 아사쿠사에 비해 조금은 더 자유로운 이곳의 사인에는 후지산과 벚꽃, 신사를 의미하는 붉은색의 도오리와 탑까지 일본을 상징할 만한 그것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이곳은 후지산 관광지가 아니지만 어쨌든 일본이라는 것이다. 일본어에 영문까지 빽빽한 사인이지만 평범한 사회상을 반영한 하급예술이라고 치부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키치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그런 사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한번쯤 저 가게에 들어가 보곤 한다.
다음은 일본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볼 수 있는 해산물 요리 전문 레스토랑의 사인들이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지만 입구보다 더 큰 생선이나 게를 떡하니 벽에 걸어놓은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저렇게 까지 크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라고 생각했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해결되었다.
대부분 이런 레스토랑들은 삼삼오오 모여있기 일쑤다. 특히 도쿄의 번화가나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오피스타운은 수없이 늘어선 가게들 중에서 눈길을 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조금씩 더 자신의 가게를 강조하다 보니 갈수록 크기도 커지고 표현도 사실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10m뒤에서도 잘 보일 것 같은 저런 간판들도 한꺼번에 모여 있으면 전부가 묻혀 버리게 된다. 결국 가장 심플한 것이 가장 시선에 잘 들어오는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작은 것들 사이에 있다면 큰 것이 시선에 잘 들어오는 것만은 사실이다. 게다가 형태까지 그럴듯하지 않은가. 세련되고 말쑥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역할은 충분히 다 해내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모습들이 상업도시 일본의 가장 평범한 모습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위에서 보았던 던힐의 디스플레이처럼 고가브랜드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유머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가브랜드나 고급브랜드에서는 아직도 유머에 인색하다. 여전히 곡선보다는 직선을 선호하고 군더더기 없는 고딕체의 로고를 좋아한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그것만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통쾌하게 웃을 수 있는 부드러운 표현에 갈증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아래의 사인들을 보자. 만약 저 순간에 카메라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무척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왼쪽의 간판에는 커피잔과 스피커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는 친절하게 커피와 음악이라고도 쓰여있다. 컴퓨터나 아크릴물감은 고사하고 매직이나 마카로 그린 듯 했다. 저대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그 앞에서 한참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친분이 있다면 깨끗하게 다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저 간판에서 느껴지는 포스를 과연 어떤 디자인으로 대신할 수가 있을지.
이번에는 오른쪽의 사진을 보자. 금방이라도 벽을 뚫고 나올 듯한 멋진 자세로 포즈를 취한 장난감이 보인다. 다시 보니 날아보려다가 벽에 끼인 모습 같기도 하다.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 게다가 붉은색의 장난감까지 저토록 부담스러운 원색을 겁도 없이 잘도 사용했다. 하지만 유쾌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좋은 디자인에 대한 트레이닝을 받아왔던 우리들이라면 절대 함부로 해낼 수 없는 결과물이 아닌가. 한때 저급예술을 지칭했던 키치라는 용어가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대중적인 문화 코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저런 식의 유머를 지칭할만한 특정한 장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다음은 다이칸야마의 길가에 놓여진 입간판을 살펴보자. 아래에 쓰여진 친절한 문구를 읽어보지 않더라도 간판 위에 떡하니 자리잡은 강아지 인형을 보면 이곳이 애견샵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수작업으로 만든 강아지 목줄과 간판에 쓰여진 귀여운 일러스트를 보니 주인의 센스가 보통은 아닐 듯 하다. 지나가는 행인도 덩달아 눈이 즐거워진다.
문자가 생기기 이전, 사람들은 그림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기록을 했다. 그런 그림의 역사가 문자의 역사보다 긴 이유는 이미지가 문자보다 쉽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문명이 발달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문자를 받아들이는 것 보다 쉽고 빠르다. 여기에서 주의 할 것은 이미지라는 것이 특정한 형태를 띈 사물 하나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를 함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미지를 잘 활용하면 문자보다 훨씬 쉽게 메시지를 전달 할 수가 있다.
다음의 사인들을 살펴보자. 아예 간판에는 글자가 없다. 세로로 된 돌출형 간판에도 글자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 가방을 파는 곳이다. 그것만 알 수 있다면 된 것 아닌가. 오히려 상호나 브랜드가 없기 때문에 일부러 그것을 찾아 보게 되는 묘한 효과도 있다. 어차피 사인에서의 문자는 상호를 알려주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필요한 문자는 작고 적게 적는 것 보다 없애는 편이 더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아예 사이을 가방모양으로 제작했다. 아마도 가방이라는 물건이 가지는 물리적인 특성 때문에 그 형태를 활용한 샵들이 많은 것 같다. 사진은 긴자와 다이칸야마에 있는 샵들인데 이런 곳들은 오랫동안 자신들만의 제품을 만들어온 곳으로 어쩐지 고풍스러운 간판의 느낌만큼이나 가방도 좋을 것만 같다.
다음은 제품의 소재를 바로 보여주어 업종에 대한 이해를 높인 형태이다. 가죽 공예품을 판매하는 샵으로 가죽공방에 대한 일러스트를 보기 전에 입간판에 얹어놓은 가죽을 보니 이해가 빠르다. 역시 입구에 세워진 마네킹도 가죽으로 되어있어서 샵의 성격이 충분히 나타난다. 이런 경우 텍스트는 그냥 센스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인포메이션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상품의 형태를 반영하거나 소재를 보여주는 대신 상징적인 사물을 이용한 사례들 살펴보자. 사진은 시모기타자와의 어느 골목길에서 만난 샵으로 이곳에는 깡통주전자가 덩그러니 달려있다. 훌륭하지도 않은 디자인의 낡은 주전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술을 파는 곳일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진짜 주전자를 파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이곳은 앤택샵이다. 유리병에서부터 진짜 주전자와 인형, 액세서리 등 앤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을 판매하는 그런 성격의 샵이다. 비록 가까이서 보고 나서야 주전자의 의미를 깨달았지만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낡아 빠진 주전자가 앤틱샵의 간판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길을 걷다가 인테리어나 익스테리어가 멋진 샵을 발견했다면 아마 그것은 미용실일 확률이 50%이상이다. 이유를 살펴보면 이들은 헤어와 스타일을 디자인하는 전문디자이너라는 프로의식이 강하다. 그래서 자신만의 디자인에 해당하는 적절한 보상을 받길 원하고 그만큼 값도 비싸지게 된다. 또한 자신을 가꾸기에 인색하지 않은 멋쟁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미용실들이 고급카페나 부틱 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꼭 그렇게 고급스럽지 않더라도 꽤나 감각적인 인테리어의 미용실들도 많다. 다음의 사진을 보자. 입간판에 투박한 가위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미용실이라는 뜻이다. 물론 머리를 자를 때 저런 모양의 투박한 가위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저 상징적일 뿐이다. 그럴듯한 미인들의 얼굴이 담긴 미용실 사인에 비해 많이 간단하지만 그 속엔 상호도, 전화번호와 웹사이트 주소도, 그리고 샵의 성격도 친절하게 표시되어있다.
이번에는 같은 업종의 조금 다른 사인을 살펴보자. 어두운 밤길에서 가로등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대형 세제통은 다름아닌 미용실의 사인이다. 높은 위치에 달려 있어서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기도 하지만 길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대형 세제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섬유의 결을 살려준다는 의미로 쓰여진 문장 속의 HAIR를 머리카락의 그것에 빗대어 함축적으로 표현한 듯 하다. 앞서 소박하게 가위로 표현했던 샵과는 대조적으로 금방 업종의 성격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지만 그것을 연상시킬 만한 작은 요소를 담고 있는 재미있는 사인이다.
인터넷으로 쇼핑을 할 때 아무리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더라도 실물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인데 그러한 특징을 사인에 반영한 경우가 있다. 다음의 사진을 살펴보면 샵의 성격도 그렇고 사인도 그렇고 앞서 보았던 가방샵과 가죽샵을 합쳐놓은 것만 같다. 입간판을 대신한 이젤에는 자연스럽게 컷팅된 가죽이 자리잡고 있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겠으나 가죽을 캔버스삼아 작품을 만든다는 취지도 보여지는 듯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돌출형 간판이다.
단지 가방을 걸 수 있는 고리만이 달려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간판대신 진짜 가방이 하나 걸려있다. 매일 같은 가방을 걸어두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간판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은가. 시즌별로, 트랜드에 따라 몇번이고 바꿀 수 있는 간판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 간단하지만 통쾌한 디자인. 가끔 이런 것들을 볼 때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우스와 씨름하거나 쉬지 않고 아이디어스케치만 해대던 모습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답은 이렇게도 간단한데 말이다.
이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로드샵의 옷가게이다. 이곳 역시 가게 이름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 단지 액자 속에 걸려있는 옷이 시선에 먼저 들어 온다. 특별한 디자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언제나 원하는 시기에 상품을 바꾸어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처럼 언제든지 자유롭게 입간판을 바꿀 수 있다면 상점을 어힐하는데 참 효과적일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그것은 브랜드 이미지를 어필하기보다는 제품어필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소규모 상점들이 가지는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앞서 이미지만으로 표현했던 사인들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문자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사인들을 살펴보자. 브랜드이미지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유명한 브랜드들은 로고에 어떤 기교를 부리기가 힘들다. 반면에 소규모의 개인샵들은 얼마든지 로고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자신들의 성격에 맞게 금속이나 나무와 같은 재료들을 적절히 이용하기도 하고 붓으로 쓱쓱 정감 있게 써넣기도 한다.
가든이라고 쓰여진 사인을 보면 인조잔디를 이용하여 진짜 가든과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자칫 문자만의 조합으로는 단조로울뻔한 그것에 꽃과 새를 이용하여 적절하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음은 일본에서 가장 큰 빈티지샵인 한지로의 사인이다. 빈티지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전국적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크리에이티브한 인테리어로 디자이너들에게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사진은 도쿄 다이칸야마점의 사인인데 지하매장의 넓고 화려한 인테리어에 비해 사인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입간판에는 이들의 고유심볼인 손에 꽃을 든 모습만 보일 뿐이고 간판이라고 해 봤자 콘크리트 블록이 하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깨진 콘크리트 조각과 손으로 쓴 타이포는 그 어떤 크고 화려한 사인보다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오래된 느낌의 사인들이다. 무지개가 그려진 촌스러운 간판은 진짜 오래된 사진관의 간판이고 오른쪽은 오래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미용실의 간판이다. 사진관의 그것을 보면 당시에는 그다지 튀는 간판이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너무 정직한 컬러와 손으로 그린듯한 정겨운 모습에 시선이 간다. 진짜 앤틱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감각이랄까. 물론 진짜이든 가짜이든 정갈하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그것들에 비해서 훨씬 대하기 편하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인사동과 청담동이 다르듯이 도쿄도 지역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어느 도시이건 화려하고 세련된 빌딩의 뒤쪽에는 소박하고 정겨운 가게들이 들어서 있기 마련이다. 단지 화려한 그것에 묻혀 드러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더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소박한 샵들이다. 그리고 여전히 시장에는 유명한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진 디자인보다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소박한 디자인이 더 많다.
그 중에서는 유명 디자이너 못지않은 넘치는 감각으로 시선을 끄는 디자인들이 있는가 하면 디자인이라 부르기 힘들만큼 소박하여 그것이 오히려 더 시선을 끄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그다지 복잡하게 오래 고민했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실제 오래 고민해서 만든 결과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그것은 의도 외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디자이너는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청바지만 고집하는 것도, 명품브랜드의 슈트만 고집하는 것도 디자이너에게는 좋은 습관이 아니다. 언제나 잘 다듬어진 디자인을 찾아 헤매지만 한번쯤 주변의 소박한 디자인에도 눈을 돌려보자. 좋은 디자인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당신이라면 비록 잘 다듬어 지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그 속에서 진솔한 유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디자인을 하며 부딪혔던 어려운 문제들을 의외로 쉽게 해결한 그들의 지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