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30
처음 그녀를 알게 된 건 그녀의 작업을 소개한 어떤 글을 통해서이다. 평이한 단어와 단어 속,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단어였다. 넘쳐나는 자의식의 급류 속에서 ‘부끄러움’을 이야기하는 작가라니. ‘부끄러움’을 인식하든 혹은 그렇지 아니하든 우리는 매 순간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가슴을 두드리는 마음의 소리를 외면한 채로. 그녀, 김정옥의 작품에는 미처 방어하지 못한 감정들이 가득하다. 그녀의 다소곳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한, 그런.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작가 김정옥이 천착하고 있는 작업은 사물과 인체의 연관성을 찾는 일이다. 대학원을 다니는 3년 동안에는 사과나 양파 같은 식물을 썩힌 후, 그 쪼글쪼글해진 모습을 그리는 작업을 반복했다고. 인간이 늙어가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젊음 보다는 노화와 죽음에 매혹되었던 것, 그녀는 그 원인을 자신의 병력에서 찾는다.
“어릴 때부터 아토피를 앓았어요. 지금은 괜찮아졌는데 어릴 때는 정말 심했었죠. 제 나름대로 되짚어 보니까 그게 나를 형성한 큰 원인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이유로 자꾸 인체를 소재로 하게 되는 것 같고. 길을 가는데 담쟁이가 벽을 타고서 올라가 있는 모습을 봤어요. 그게 힘줄과 비슷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시기에는 이상하게도 잎맥을 보고 있으면 인체의 핏줄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죠.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해부학 책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해야 될 작업은 이런 것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자연과 몸이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내부도 그렇지만 실제 가시적인 모습 또한 그렇죠. 자라나는 것이나 성질도 비슷하고, 욕망도 끝이 없어 보이고… 그게 어찌 보면 생명의 속성인 것 같아요. 식물 역시도 생장욕구가 있잖아요. 이번 전시 때 이런 걸 풀었죠. 측백나무는 원래 좋아했어요. 형태가 단순해서 그리기도 쉽고, 이상하게 좋더라고요. 속에 뭔가를 삼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왜, 어두울 때 보면 동물 같기도 하고 내장 기관 같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그걸 이어서 자연에서 솟아나온 측백나무를 그렸었는데 나중에 측백나무에 대해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측백나무와 얽힌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고 있더라고요. 또 아토피에도 좋다고 하고(웃음). 그래서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이제는 그런 그림을 이제 다 그린 것 같기도 하고… 무튼 그렇네요.”
김정옥은 금천예술공장의 입주작가이다. 금천예술공장은 공장지대가 많은 입지의 특성상,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예술프로그램에 주력하고 있는 곳. 이번 2기 오픈스튜디오 전시를 맞아 그녀가 진행한 ‘한 공장 한 그림 증정식’은 이곳, 금천예술공장의 특성을 잘 반영한 프로젝트이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미술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그림이잖아요. 그래서 주민들에게 직접 그림을 그려주자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것인 것 같고. 예술공장 주변에 정말 많은 공장이 있거든요. 이왕 그릴 거면은 그 분들의 일터를 그려드리자는 생각을 했지요. 기계나 혹은 기계를 만드는 손, 그리고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을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자료수집을 위해 사진을 찍다 보니까 사진을 찍는 것을 싫어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기계를 그려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주로 내면에 집중하는 작업을 하던 김정옥 작가에게 있어 이번 작업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관찰하고 심사숙고하고 화폭에 옮기는 일을 되풀이하던 그녀가 직접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게 된 것. 그녀가 진행해 온 그간의 작업에 비하면 엄청난 공격성(?)을 표출해야만 했던 시간들이었단다. 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얻은 것도 많다.
“그림을 받는 사람이 좋아서 걸 수 있게끔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전에 했던 작업과는 달리 색도 많이 쓰고 예쁘게 그렸지요. 사람들 만나서 촬영 부탁하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그거 고민하는 데만 두 달이 걸렸으니까(웃음). 사진 찍고 막상 작업할 때는 쉽고 재미있었어요. 예쁘게 하자고 다짐하다 보니까 제가 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되어갔고요. 그러면서 ‘나도 이런 작업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결과적으로는 제 작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이곳에서 ‘한 공장 한 그림’ 프로젝트 이외에도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체험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정규 프로그램이 아닌, 예술공장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는 다양한 예술체험 프로그램들에는 뜻 있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끊임없는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고. 김정옥 작가 역시 시흥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지금까지 2회 차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나머지 남은 한 회 차는 7월 5일에 있을 예정이다.
“중학생 대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 반응이 바로 바로 와요. 아무래도 학교 미술 수업이 아닌지라 완성해야 하고, 평가 받아야 하고, 이런 건 아니잖아요. 단지 저는 그 아이들이 저라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다른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림이 얼마나 쉽고 즐거운 건지에 대해서 느끼게 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죠. 첫 시간에 자기의 감정을 점, 선, 면으로 표현하도록 했어요. 처음에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난감해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더라고요. 이 선은 화가 난 선이고 이 점은 스스로 미약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 또 굉장히 굵은 선은 엄마의 억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이런 식으로 그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것 아니겠어요?”
작가 김정옥의 작업은 이제 작은 변화의 시기를 맞이한 듯 하다. 숨겨진 내면을 표현하는 것에서 사람들과의 소통을 희구하는 단계까지. ‘한 공장 한 그림 증정식’에 초대한 공장의 노동자들에게서 ‘우리가 그곳에 가도 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던 순간을 ‘부끄럽다’고 회상하는 그녀는, 이제 사람들에게 계속 보여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길 소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그림이 새로운 힘으로 자라나는 순간, 작가는 부끄러움에 대해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