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04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한글 디자이너’라 말한다. 하지만 그는 한글을 디자인의 소재로 삼기 훨씬 이전부터 디자인을 해온 ‘패션 디자이너’이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새롭고, 신선했으며 다른 사람과는 다른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를 만난 날, 그가 무엇보다 궁금해 한 것은 그날 있을 김연아 선수의 경기 결과였다. 자신이 만들어 준 의상을 입고 링크에 설 그녀가 무엇보다 걱정된다고 했다. 자신의 의상이 그녀의 연기를 바래게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과 그녀가 연기할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들도 함께. 크리에이터다운 섬세함과 독특함을 지닌 디자이너 이상봉을 만났다.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사진제공 | Lie sang bong
디자이너 이상봉에게 있어 토요일은 특별한 날이다. 끊임없이 스탭들과 소통하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그에게 있어서 토요일은 공인된 휴식의 시간이기 때문. 그는 이 날을 굵직한 행사장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찾아보는 시간으로 활용한다. 그런 그를 처음 만나게 된 장소 역시 DAF 행사가 열리고 있던 예술의 전당이었다.
“이번으로 두 번째 DAF가 열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행사장에서 우연히 전시에 참여한 지인을 만나기도 했지요. 우리나라에는 디자인 페어가 그리 많지 않잖아요? 디자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은 오가고 있는데 말이죠. 더군다나 그 행사는 디자인과 아트의 접목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생겼고 젊은 친구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시회였기 때문에 색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규모가 작은 게 조금 아쉬웠어요. 이런 행사들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기성 작가들의 관과 신진 작가들의 관, 해외관 등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봐요. 행사장에서 느낀 열기를 봐서는 충분히 발전될 것이라고 보고 있고요. 저도 거기서 필기구도 잔뜩 사고 디자인 작품도 사고 왔어요. 젊은 사람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패션 디자이너로서 30년을 쉼 없이 달려온 이상봉. 그가 디자인적인 영감을 얻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듣는 것. 음악과 뮤지컬을 비롯한 공연과 미술 등의 모든 문화적인 요소들이 바로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다. 여기서 단 하나 염두에 둘 것은 이 모든 ‘흡수’의 과정에 목적을 정해두지 않는 것이라고. 목적을 가지고 경험을 되풀이하게 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의 작업하는 방식 역시 그의 자유로움과 조금은 닮아있는 듯 했다.
“우리는 일년에 두 번씩 시즌에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 압박감이 좀 크죠. 가끔은 달력이 무서울 정도지요. 저는 작업을 주로 밤에 합니다. 낮에는 다른 직원들과 의사소통도 해야 하고 처리해야 할 다양한 일들이 있는데 밤에는 혼자 있을 수 있잖아요. 스스로 밤 도깨비라고 불러요. 저는 한번 어디에든지 집중만 하면 시간의 개념을 잊어버립니다. 가끔은 시간이라는 게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에요. 시간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이상봉은 대중들에게 있어 한글 디자인을 의상에 접목한 디자이너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금까지 패션 디자이너로서 쌓아온 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그는 우리나라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잘 나가는’ 디자이너이다. 그의 의상은 동양적인 선과 양감을 잘 살린 작품으로 뉴욕과 파리를 비롯한 세계적인 패션 무대에 그 이름을 알리고 있다. 문득, 그가 지금의 위치에 있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남다른 편이에요. 내 스스로 내 스타일을 만드는 것. 나를 어떤 형태에 매이지 않게 하려다 보니 늘 새로운 것을 가지고 도전할 수밖에 없었죠. 똑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다면 이 일을 못했을 겁니다. 제가 한글을 패션에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난 이후 한글 디자이너로 많이 알려졌지요. 그래서인지 그 작업을 계속 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가 계속 있었어요.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한글도 수 많은 디자인의 요소 중 하나잖아요. 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한 티셔츠를 많이 입습니다. 그 간단한 아이템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정말 많은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그런데 한글로 디자인을 하면서 그게 반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글이 모든 디자인의 모티브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것을 통해 어떻게 세계인과 공감하는 요소를 찾아내고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가 제가 요즘 하고 있는 고민입니다.”
그는 얼마 전 산수화를 사용한 디자인을 시도하기도 했다. 소재를 한정 짓지 않는 그에게 있어 한글과 산수화는 같은 의미로 소중한 디자인적 모티브이다. 그 모티브를 발현할 수 있는 매개체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요즘 그는 패션 이외에도 침구, 그릇, 담배 등 다양한 디자인적 매개체와의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93년도에 이상봉 아트컬렉션을 시작했었어요.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면서 생활의 패턴 또한 바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어 운동을 하다가도 자켓을 하나 걸치면 출근할 수 있는 그런 디자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아웃도어 브랜드를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스포츠웨어가 시티웨어로 전환될 것이라고 봤거든요. 처음 시작해서 2년 동안 많은 돈을 까먹기는 했지만(웃음) 그런 것들이 지금 하고 있는 콜라보레이션 작업에 도움이 되고 있어요.”
바야흐로 디자인의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을 이야기하고 삶의 영역에 디자인을 개입시킨다. 이제 디자인은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진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닌 사회와 정치, 경제를 움직이는 거대담론이 된 느낌일 정도로. 이런 사회적 상황에 대한 그의 견해가 궁금해졌다.
“저는 모든 것이 디자인의 영역 안에 있다고 봅니다. 창조적인 삶이나 일, 패턴이 되었든 그게 자기의 디자인이 되는 것이죠. 디자인은 일상입니다. 저는 디자인을 쉽게 설명할 때 ‘백화점’이라고 표현하는데요, 내가 먹고 자고 마시고 입고 하는 모든 일이 디자인의 영역 속에 있기 때문이죠. 제가 볼 때는 탄생과 죽음까지도 디자인인 것 같습니다. 진작에 이렇게 바뀌었어야 해요. 이제 모든 것들을 디자이너들이 할 수가 있습니다. 전혀 다른 영역이 혼합되어서 새로운 디자인이 되고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일이 바로 디자이너의 몫인 것이죠.”
인터뷰를 하던 날, 그가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바로코. 로코코 시대의 궁정문화’ 전을 위한 패션쇼였다. 서양의 전통 문화와 어우러지는, 그만의 동양적인 디자인이 기대되는. 매일 새로운 것을 꿈꾸는 크리에이터 이상봉. 그의 다음 행보는 어떠할까.
“전시 오픈 후에는 남미로 촬영을 가려고 합니다. 일이긴 하지만 여행한다는 기분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려고 해요. 새롭고 원시적인 세계,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이뤄지고 있는 현실들이 궁금하거든요. 저로써는 가장 오랜 시간 여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고 싶고, 내 디자인에 반영하고 싶어요. 인간과 자연과의 결합을 만들어보는 거죠. 그리고는 다음 컬렉션에 대한 준비와 작업들을 해야겠습니다. 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는 김연아씨가 꼭 우승했으면 좋겠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