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26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속도가 생명이요, 믿음이 되었다. 시작하자마자 결과를 봐야 직성이 풀리도록 길들여져,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을 쉽사리 기다려 주지 않는다. 서체라는 것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때 혼자 서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체를 놓지 못하고 있는 산돌커뮤니케이션의 석금호 대표는 서두르지 않는 ‘느림의 미학’을 통해 한 길을 꾸준히 걸어오면서 심상치 않은 결과를 창조해냈다.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 사진 스튜디오 salt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 주어진 시간은 물론 자신까지 통째로 쏟아 부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지루하고 어려운 것이며, 최선을 다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서체 디자이너가 된 것, 산돌커뮤니케이션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꾸려온 것 모두 후회하지 않는다는 석금호 대표.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한마디를 내 놓는다.
‘글꼴 모임’ 이후 20년이 지났다. 그 20년 동안 서체라는 한 우물만 파 왔는데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오면서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나.
98년인가 99년 즈음 경영자로서 맞닥뜨리게 된 고비가 한 번 있었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디자이너로 살았으니 경영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훈련된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사람 경영이 힘에 부쳤다. 한계를 느꼈던 그 때 적극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 나섰다. 개인적으로는 카이스트에서 최고지도자 과정을 밟으면서 경영을 배웠고 회사 차원에서는 3년 정도 비용을 들여 컨설팅을 받았다. 그러면서 경영에 대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면 디자이너, CEO면 CEO 하나만 하면 쉬웠을 텐데 나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두 가지 역할을 포기하지 않고 겸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CEO로서 경영 마인드를 갖고 실제로 경영을 해야 하는데 재무에 대한 이해는 물론 기업의 인재도 경영할 수 있어야 한다. 서체 디자이너로서는 서체 디자인의 품질을 유지하고 높여 나가기 위한 노력과 교육을 모두 겸해야 한다는 게 어렵다.
서체 디자이너로서 가장 기뻤을 때는 언제였는지 궁금하다.
마이크로소프트 미국 본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윈도우비스타의 기본 서체를 개발하게 됐을 때다. 지난해 윈도우비스타가 출시되면서 기본 서체인 ‘맑은 고딕체’도 빛을 봤다. 계약 체결 당시 직접 마이크로소프트 본사를 방문에 3일간 머물면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우리의 타이포그래피나 서체 개발에 대한 지식과 실력에 믿음이 갔기에 서체 개발 파트너로 선정된 것이 아닐까 한다.
다양한 시도와 프로젝트를 거치며 산돌은 명실공히 서체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는데,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산돌만의 노하우는 무엇인가?
산돌이 가진 노하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전문지식이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꽤 오랜 시간 서체를 디자인하고 또 연구해왔다. 서체 디자인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회사 대표라는 것도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고객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요령을 피우거나 속임수를 써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끌고 가려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정직하게 클라이언트를 대하면 믿음은 당연히 따라온다. 고객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힘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돌에서 디자인 한 서체 중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서체는 무엇이며, 그 이유는?
이상적이라는 건 완벽하다는 뜻인데 완벽한 서체는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 디자인한 서체 가운데 제일로 꼽는 것은 ‘제비체’다. 기존 붓글씨 스타일의 명조체는 모든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서체인데, 그 명조체의 곡선을 현대화시켰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디자인 완성도도 높고. 그렇다고 무조건 현대화시킨 것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곡선을 재해석해 접목시켰다. 기와집의 처마나 버선 등에서 볼 수 있는 곡선은 아름다우면서도 과격하거나 날카롭지 않고 은은하고 오묘한 미감을 풍긴다. 일본이나 중국의 곡선과 많이 다른 이 곡선을 서체 디자인에 접목시켰다는 데에 가치가 있다.
서체 디자인은 제약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이러한 제약을 충족시키되 크리에이티브한 폰트를 디자인하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간단하다. 우선 서체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서체의 기본적인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한 뒤에 이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자유분방한 표현을 접목시킬 때 크리에이티브한 서체를 디자인할 수 있게 된다. 원칙적인 이야기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서체 디자이너가 되려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서체는 한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국가의 문화에 기여해야 하는 차원에서 서체 디자이너는 매우 가치 있는 직업이라는 직업의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서체를 개발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타의 디자인은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그 시기에 만족을 주고 나면 소멸되기도 하지만 서체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남아 있는 것이 서체이기 때문에 문화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 있고, 이것에 대한 사명감이 중요하다.
아직도 타이포그래피의 활용을 어려워하는 디자이너들이 있다. 한글 서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건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관심이 없는데 그걸 활용하고 이용할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디자이너들이 한글에 대해 좀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대학에서도 한글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 한글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관심이 한글 서체의 활용을 어렵게 만드는 핵심 요인이다. 우리 것에 대한 가치를 우리 스스로 등한시하고 그 가치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회적인 문제가 더 크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산돌투어링’이라는 행사를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이 많은 디자인 학과나 동아리, 기타 단체들에게 서체 개발 과정을 소개하고 한글의 위상을 느끼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디에서도 해 주는 곳이 없으니 우리가 하자, 나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2003년 11월에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왔다. 이런 계기를 통해 한글이라는 문자의 위대함과 뛰어난 가치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의식이 바뀌면 관심도가 높아지니까.
디자인은 취향의 영역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좋고 싫음이 분명하게 나뉘기 때문에 대중적인 디자인을 어렵게 만든다. 무심하게 사용하는 것 같아도, 미니홈피나 블로그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취향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서체를 사용하고, 이것은 서체 디자인 또한 대중적인 디자인에 포함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산돌60’으로 시작된 산돌의 ‘대중적인 디자인’은 꾸준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책에서 광고에서 사인에서 알게 모르게 대중과 함께한 산돌 서체에는 석금호 대표를 위시한 산돌의 한글에 대한 집념이 녹아 있다. 당연하게도 석금호 대표가 디자인한 모든 서체의 중심에는 한글이 있고, 그에게 서체는 곧 한글이었다. 그렇게 20년이 흐르고, 어느덧 그의 발자국은 이정표가 되었다. 대중의 가슴에 한글을 아로새기는 길로 가는 이정표.
한글 하나만으로도 상품화와 세계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도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한글을 세계화 시키는데 디자이너가 기여한다면 일단은 한글에 대한 가치를 알아야 한다. 한글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데 어떻게 시도하겠나. 디자이너 스스로 한글의 가치를 깨닫기 전에는 어떤 시도를 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을 투자하거나 시도할 사람은 없지 않나.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한 노하우가 있다면.
가장 중요한 건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기 어려워진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디자이너는 을이 된다. 갑은 클라이언트가 될 수도 있고 사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비전문가인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에 유리한 입장에 있다. 비전문가보다 월등히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니 비전문가가 충분히 설득 당할 수 있는 논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런 논리 없이 접근하다 보니 디자이너가 아무리 좋은 디자인을 가져와도 비전문가의 시각에서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것을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하는 거다. 비전문가를 설득하고 그 사람들이 전문가를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논리를 준비한 다음 접근하면 관계의 어려움을 대부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산돌은 산돌투어링 같은 사회환원 사업은 물론 직원 챙기기에도 열심인 것 같다. 이렇게 활발한 사회환원 활동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나?
기업이 가지는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윤을 남기면 일부를 환원하는 건 기업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기업의 기본적인 윤리를 지키는 거라는 생각에 종교적 신념이 더해져 가진 것을 어려운 사람과 나눠야 한다는 것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이제 석금호라는 이름은 하나의 이정표가 된 것 같다.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조언을 한 마디 한다면.
내가 평생 디자이너로서 살아간다면 가장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디자인 영역 중에서 자신이 가장 흥미로운 분야를 찾는 거지.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사회와 국가와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영역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자부심이 생길 거다. 자부심을 갖고 할 수 있는 일 역시 재미있는 일만큼 오래 집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지 돈이 목적이 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