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24
공병각의 글씨가 리듬과 억양을 가지고 있는 건 그 자체가 이상적인 레이아웃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서다. 공병각의 작업실이 유난히 길다란 직사각형인 이유는 긴 두 벽 사이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다. 대신 짧은 벽면에는 일체의 장식도 하지 않은 건 쉬어감의 미덕을 체감하고 있어서다.
작업실을 감싸는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가 더욱 귀에 감기는 것은 소리를 품었다가 다시 울려낼 만큼의 높이를, 공간이 알고 있어서다. 캡슐커피의 풍부한 맛에 놀라던 찰나, “멍!멍!” 그의 애견 ‘잭’이 끼어든 이유는 자기 이름이 까만 아이섀도가 무척이나 섹시했던 캐리비안의 멋진 해적 이름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다.
에디터 | 김유진(egkim@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철문을 열고 들어선 공간은 어딘가를 향하는 길처럼 높고 길게 뻗어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그의 아이덴티티 ‘MNID’. “My Name Is Designer”라는 디자이너 공병각의 명쾌한 선언.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고, 모션그래픽의 아트디렉팅을 해왔던 그의 작업들은 이제 이효리, SS501, 혹은 곧 공개될 손담비의 앨범 작업이나 ‘공병각 스타일’의 글씨체로 이어져오고 있다.
건조하면서도 적당한 온기가 느껴지는, ‘웜’하면서도 ‘쿨’한 이 작업실이 고무 바닥에 철제 슬레이트 지붕이 얹혀진 공간이었다니, 고무 바닥을 일일이 뜯고 에폭시를 발라가며 마감한 ‘노가다’ 보다 그의 본능적 감각이 표현하는 ‘디자인 공간’에 작업실 구경의 초점이 맞춰진다. 영사시스템 구현이 가능한 구조일 것, 높은 천장을 가질 것. 이 두 가지 조건에 부합하면서도 “괜찮은” 장소를 찾아 다녔던 1년간의 시간은 압구정동과 신사동만을 주로 오갔던 그의 “게으른” 동선마저 이태원으로 옮겨 주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다시 1년. 한때는 동료들과 함께 썼던 작업실이기도 했고, 지금은 그의 복서(Boxer)종의 개 ‘잭’의 거주지이지만, 공병각 역시 슬금슬금 집처럼 생활하고 있다. 공간을 만들 때부터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를 의도했으니, 입구 앞쪽, 술과 간단한 안주, 커피가 가능한 홈바는 기본이다. 양쪽이 뚫려있는 책장으로 나눠진 세 공간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흘러간다.
막혀있지 않으면서 공간을 나누는 역할, 책장의 실용적 기능이 유용함을 더한다. 간단한 모임이나 미팅이 가능한 길다란 테이블 공간, 개인적인 사무공간, 그리고 침대, 옷장 대용 캐비닛, 그 옆에 가방과 신발이 자연스럽게 널브러져있는 편안한 사적 공간. 공간의 흐름을 보니 어느새 집의 역할도 충실히 하고 있는 작업실의 진화과정이 한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 길다란 공간 중에서 가장 아끼는 아이템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한쪽 벽면을 가리킨다. 크기가 조금씩 다른 와인박스와 레트로한 아이템들이 담긴 나무 액자들의 배치가 공간의 ‘레이아웃’을 구성하는 재미를 주었다며 뿌듯함을 전한다.
이렇게 저렇게 쌓은 듯 보이는 박스와 액자들이 원래 그 자리인 것처럼 ‘있는’ 것은 그 레이아웃이 최적의 답안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해외 마켓에서 수집한 빈티지 옷걸이와, 향초를 넣으면 로맨틱한 분위기가 물씬 나는 유리병이 그 옆 탁자 위의 선반에서 한껏 분위기를 낸다. 선반을 받치는, 오래된 나무빛깔이 그윽한 타원형 탁자를 들여다 보니 테이블 양쪽이 접히는 모양이다. 한쪽 면만 접어 벽에 붙여놓은 모양새가 홈바의 냉장고 옆에서도 포근하고 세련된 멋을 발산한다.
“시간의 흔적이 쌓여가는 것이 좋아서” 선택한 빈티지 목재 아이템들이 공간에서 하나의 이미지로 존재하며, 각자의 그래픽을 완성하고 있다. 긴 회의용 테이블 위 각각의 필통 안에 가득 담긴 연필, 펜, 색연필의 컬러감. “격하게 아낀다. 널-내가” “살인의 ‘추억’ 내가 그랬다” “당신이 나의 전부라고 믿었던 가장 행복했지만, 가장 미련했던 시절” 공간 곳곳에 붙어있는 그의 손이 써 내려간 메모 같은 글자들. ‘MNID’라는 영문 아이덴티티만큼이나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공간을 울리는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가 한결 경쾌해졌다. 그러자 자신의 존재감을 잊지 말라며, ‘잭’이 또 한번 쩌렁쩌렁한 소리를 낸다. 높다랗고, 길쭉한 공간이 건조하게 느껴져 들여놓았다는 두 개의 화초에 꽂아놓은 ‘Fuck’과 ‘Damn’의 이름표가 의외의 웃음을 준다.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를 또 하나의 포인트로 만드는 센스. 건조하고 길쭉한 공간 안, 짙은 나무빛깔의 빈티지 가구들에 생기가 돌았던 것은 이 익살맞은 이름표를 단 두 그루의 화초 때문이었던 거다.
공병각의 작업실은 마치 공간 레이아웃을 잡아가는 도큐먼트 파일 같은 것. 아, 디자이너의 감각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