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2
무더웠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어린 시절 비오는 날이면 입었던 노란 우산과 우비, 그리고 종아리까지 올라오던 장화. 비 내리는 날만 입을 수 있었던, 그래서 비 오는 날을 기다리게 만들던 특별한 의상이었다.
글 ㅣ 윤예진 패션디자이너
에디터 ㅣ 김미주 (mjkim@jungle.co.kr)
올해 막바지 더위를 상징하는 말복이 입추와 겹치더니 추수철인 한가위도 무척 이르다. 때문인지 장마도 태풍도 아닌 가을문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전국을 적시며 단숨에 무더웠던 여름의 열기를 씻어내리고 있다.
비오는 날을 기상정보 편에서 본다면 날이 궂어 야외 나들이는 삼가는 것이 낫고, 습도가 많아 빨래는 다른날로 미루는 것이 좋으며, 행여 강한 비바람이나 강풍을 동반한 상황일때는 외출 자체를 주의하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비 내리는 날'은 촉촉하고 싱그러운 공기와 운치있는 풍경을 만들어내며, 추적추적 잔잔히 내리는 빗소리를 감상할 수도 있고, 연인과 한 우산을 쓰고 다정한 데이트를 할 수 도 있으며, 흔히들 떠올리는 고소한 기름에 노릇노릇 잘 부쳐진 부침개에 막걸리 '한잔'도 꽤 어울리는 날일게다. 게다가 특히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면 헐벗었던 여름 패션에 깃을 여밀수 있는 겉옷이나 멋스러운 머플러를 걸치기 시작하며 말 그대로 분위기 넘치는 낭만의 멋을 내기에 적격인 시기인 것이다.
요즘 '레인코트'라고 불리는 형태의 의복은 사실 전쟁 당시 참호 속의 병사들을 위해 고안된 전투복과도 관련 있다. 그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트렌치 코트(trench coat)라 부르는 것은 제 1차 세계 대전 때 영국 병사가 참호 안에서 입었던 것이 시초이다. 현재 무려 158여 년 동안 영국의 전통적인 스타일로 대표되는 버버리 트렌치 코트(Burberry trench coat)는 레인 코트 또는 더스터 코트(duster coat. 먼지를 피하기 위해 입는 헐렁한 코트) 등으로도 사용되며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레이니 패션(Rainy Fashion) 아이템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가 비올 때 입는 우비, 또는 레인코트라 불리는 의복은 말 그대로 비를 막아 몸이 젖지 않게 하는 것에 기능을 둔 옷이다. 이 옷은 방수가 되는 소재로 만들어지며 쉽게는 일회용 우비라 부르는 얇은 비닐로 만들어진 것에서 부터 고급 방수 원단이나 PVC(polyvinyl chloride 염화 비닐)로 만들어진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레인 코트들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단순히 비에 젖지 않기 위해 착용하는 것이 아닌 비 오는날, 비가 올것 같은 흐린 날 겉옷으로 활용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또한 장화 또는 레인 부츠라고 하면 방수가 되는 둔탁한 고무재질로 만들어진 무겁고 헐렁한 발목 위로 올라오는 신발류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상품화 되고 있는 레인 부츠들은 이전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디자인과 색상 및 질감으로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또한 투명한 고무 소재나 플라스틱을 사용하여 디자인된 가방류는 오히려 가방안에 담긴 물건이 훤히 보인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이용해 패셔너블한 소품의 소비까지 이어주고 있으며(대부분의 자료 이미지의 소품들에 샤넬 마크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 된장녀스럽고 재밌다), 때로는 고가의 명품 가방을 투명한 비닐가방에 넣어 비에 젖는것을 막는 역할도 할 수 있어 유용하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 트렌디한 소재로 떠오른 투명한 PVC 소재 경우 의복 이외의 신발이나 가방, 또는 여러가지 패션 악세사리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얻고 있다. 단순히 물에 젖어도 걱정할 필요없는 기능성 및 실용성 외에 이제는 확연한 하나의 패션 아이템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허세'라는 단어가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패션은 반은 허세다. 원하던 원치 않던 패션은 늘 바뀌고 변화하여야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것을 계속 내놓아야하며, 스스로를 패션 피플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쉬지않고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것 보다 더 새로운 패션을 만들어가고 따라가고 흉내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패션은 끝이 없는 이상(理想)이다. 패션은 돌고도는 영원한 여행일 수도 있고, 빠른 변화만큼 그저 언듯 눈가에 비치고 사라지는 신기루 일 수도 있다. 때문에 옳바른 패션이나 나쁜 패션 또한 정의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여름이면 현관문 한 켠에 놓여있던 작은 노란 우산과 장화, 이제나 저제나 언제 비가올까 기다리며 비오던 아침 등교길을 설레이게 만들어 주었던 추억속의 소품들. 사실 나이가 들고 나서는 통풍이 안되는 PVC 소재 레인 코트나 발에 땀이 차는 고무재질 레인 부츠는 아무리 유행이라 해도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비가 오는 날이면 맨발에 비치용 슬리퍼를 신고 최대한 치렁치렁 질척거리지 않는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이 장땡이다. 현재의 트렌드와 상관없이 때로는 피부와 몸의 건강을 생각하거나, 때론 패션 월드의 충만한 허세를 즐겨보거나, 혹은 패션 테러리스트로 주변의 따거운 주목을받아 보거나, 스스로 만족하고 편안함에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나만의 레이니 스타일을 즐기면서 가을의 초입을 알리는 빗방울에 몸을 맡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