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7
‘장소(place)’는 ‘공간(space)’보다 매력적이다. 그 근거를 대보자면, 우선 장소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또한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 시간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나이에 따라 경험에 따라 같은 장소여도 각기 다른 의미의 장소가 되어버린다. 시시각각 개개인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장소의 속성을 추적하고 파악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이처럼 쉽지 않아서 장소는 매력적이다. 이번 연재 글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이고 무작위로 출몰하여 자꾸 눈에 띄어서 결국에는 마음에 머물게 되는 장소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장소’를 발견하고 발굴할 ‘장소’는 소설이고, 소설에서 발견되는 소설과 장소 사이의 그 비밀스런 공모 관계의 매력을 이번 글에서 소개해볼까 한다.
글, 사진 | 안은희 리코플러스 대표(akkanee@empas.com)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장소+α'를 찾아서
얼마 전 강남구청역 사거리 근방에서 화재가 발생했었다. 마침 강남구청역 지하2층에 있는 열린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어디선가 탄 냄새가 났다. 근처 식당에서 음식을 태웠나하고 중얼거리다가 지상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짜로 불이 났나 싶어서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릴 때 마침 소방차 여러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매캐한 냄새, 도심의 정적을 가르는 흡사 비명소리 같은 싸이렌, 주변 사람들의 웅성임 등 아주 잠깐 사이에 강남구청역 사거리는 흡사 전쟁터와 같은 불안한 공기가 가득했다. 그 순간의 그곳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장소가 아니었다. 일상적인 장소가 한 순간에 동요를 일으키며 비일상적인 장소가 되어버렸다. 도시라는 철옹성 같은 견고한 이미지가 흔들리는 순간을 목격하자, ‘장소’의 속성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와 그것이 결코 물리적인 조건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이렇듯 장소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끝없이 변화하는 어떤 것이다. 장소의 변화무쌍한 의미를 짚어내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곳이 바로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삶을 살아가는 터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용어로 이야기한다면 장소는 우리의 ‘실존(實存)’과 맞닿아 있다. 세계라는 장소에서 자신의 존재의 중심을 견고하게 세워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항시 장소를 주목해야 한다. ‘장소 정체성’이나 ‘장소감(sense of place)’ ‘장소상실’ 등의 개념을 통해 장소의 의미를 추적해온 인문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장소를 인간의 의도가 담기는 산물이자 인간의 활동을 위한 의미 가득한 환경으로 이해하고 있다. 너무나 익숙한 집이나 동네에서부터 낯선 여행지에 이르기까지, 실재하는 장소에서부터 실재하지는 않으나 분명 존재하고 있는 가상의 장소에 이르기까지, 과거ㆍ현재ㆍ미래가 뒤섞여 있는 장소의 다양한 시간적 층위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장소를 표현하고 기억하는 소설ㆍ영화 등의 여러 분야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장소는 쉽게 파악되기 어려운 매우 섬세하고 복잡한 어떤 대상으로 다가온다. 평상시에 장소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익숙한 대상이지만 화재와 같은 일시적인 사건만으로도 어느 순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견고함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익숙한 듯 했으나 사실은 익숙하지 않았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그러나 항상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던 그 장소‘들’을 소설 속 장소이야기에서부터 발견해보려 한다.
개인화되는 소설 속 장소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읽는다고 할 때, 읽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메밀밭의 이미지는 다를 것이다. 한국인과 서양인, 농촌사람과 도시사람, 어린이와 노인 등 각기 어떤 문화권에서 어떤 지역에서 어떤 경험을 가지고 살아왔느냐에 따라 수백만 개의 메밀밭이 탄생하게 된다. 이처럼 고정되어 있는 텍스트가 고정되지 않는 심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바로 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장소의 첫 번째 매력이다.
지구에 한껏 가까워진 태양이 무쇠라도 녹여버릴 것처럼 뜨겁게 세상을 달궈대고 있는 여름 한낮, 푸른 죄수복을 입은 춘희는 벽돌공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있는 펌프는 오래 전에 말라붙어 쇠파이프를 타고 흘러내린 붉은 녹물만이 바닥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가마 주위엔 거친 사내들의 발자국에 의해 다져진 딱딱한 마당을 뚫고 쇠비름과 엉겅퀴, 한 길이 넘는 뺑대쑥 등 온갖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개망초는 성곽을 포위한 병사들처럼 늘 공장 둘레를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다가, 주인이 자리를 비우자 슬그머니 안으로 침입해들어와 어느샌가 공장 전체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 부서져내린 벽돌가마 틈이나 살림집 마루판자, 검은 이끼가 낀 물결무늬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도 개망초는 어김없이 피어 있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었다. - 천명관, 「고래」, 문학동네, 2004, p.10
천명관의 「고래」를 읽고 나서 개인적으로 위의 구절에서 묘사된 장면이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춘희가 돌아오기 전까지 인적이 끊긴 벽돌공장을 지켜온 것은 하얀 개망초 군락이었다. 퇴락과 생명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이미지가 겹쳐져 만들어진 서정적인 풍경에 애잔함까지 느꼈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난 그 해 봄에는 유독 개망초가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공원 한 자락에서 개망초 군락을 발견하기도 했고, 벤치를 점령해버린 개망초의 생명력을 확인하기도 했다. 특히 설치된 지 얼마 안 되는 새 벤치의 찰나적인 빈틈을 파고들어서 인공적인 도시풍경을 미묘하게 흔들어놓는 장면은 그야말로 벽돌공장 개망초의 오마주처럼 느껴졌다. 인공적인 것들보다 더 강력할 수도 있는 자연적인 것들의 폭발적인 생명력에 경외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소설에서 시작된 장소의 풍경이 어느새 나만의 장소적인 톤(tone)과 감(sense)이 더해진 새로운 풍정(風情)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소설의 장소가 쉽게 개인화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소설이라는 언어적 텍스트가 가진 속성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어떤 장면이나 장소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인지되는데, 소설 등의 언어적 텍스트에 기반 한 장르들에서 이러한 시각이미지는 글로 묘사되어진다. ‘마당 한 가운데 있는 펌프’, ‘부서져내린 벽돌가마’, ‘살림집 마루판자’, ‘검은 이끼가 낀 물결무늬의 슬레이트 지붕’이라는 단어들을 읽으며 우리는 각자 예전에 보았거나 경험했던 펌프와 벽돌가마와 마루판자와 슬레이트 지붕을 떠올리며 소설 속 공간을 자신만의 인상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앞의 ‘메밀밭’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텍스트를 놓고 읽는 사람 숫자만큼의 이미지가 생겨난다. 이것이 아마도 즉각적이고 유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온갖 시각이미지(TV, 영화, 광고, 게임 등)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소설 등의 언어텍스트가 여전히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 경험이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한 대중적인 유형에 쉽게 휘둘리거나 왜곡되지 않고, 또 판에 박은 듯 보이는 관습이나 습관을 따르지 않고, 고유하게 자신만의 인상으로 잘 간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속성, 그것이 바로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인화된 장소의 매력일 것이다. 이처럼 독자들이 자신만의 +a(알파)를 더해가는 독해가 가능해지기에 각자의 감정이 이입된 서정적인 풍경을 그릴 수 있다는 것, 즉 추상적인 텍스트 공간이 경험적인 이미지 장소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소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감을 발견하게 된다.
문신처럼 새겨지는 ‘장소기억’
소설에서 쉽게 장소를 개인화할 수 있는 다른 이유로는 독자들의 개인적인 ‘기억의 경험’과의 맞닥뜨림을 들 수 있다.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천 개의 마을 천 개의 기억’이라는 <2012 서울사진축제> 전시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전문작가들의 작품만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전시였다. 우리 집 어느 구석에서 켜켜이 먼지만 쌓이고 있던 앨범 속 사진들이 튀어 나와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 했다. 이 전시를 통해 그동안 다소 추상적으로 느끼고 있던 서울이라는 도시가 내 몸에 새겨져 있었던 장소의 기억과 만나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장소로 되새겨졌다.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느새 어린 시절 살았던 연희동 골목 어디쯤인가를 헤매면서 지금은 남이 살고 있는 집터가 생각났다. 몇 해 전 연희동 그 집을 20여년 만에 찾아갔다가 집터로 추정되는 어느 빌라 뒷마당 근처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곧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당혹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줄리엣의 부모는 그녀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줄리엣은 종조부인 로더릭 애슈턴 박사와 함께 런던에서 살게 되었지요. … 줄리엣은 두 번 가출했습니다. … 저는 어디로 가야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부모와 함께 살던 농장이었지요. 농장 입구 맞은편, 나무로 뒤덮인 작은 언덕에서 줄리엣을 찾았습니다. 쏟아지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흠뻑 젖은 채 않아서 예전에 살던(지금은 남에게 팔린)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더군요. -매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이덴슬리벨, 2010, p.75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줄리엣이 물끄러미 바라다보던 지금은 남이 살고 있는 집은 줄리엣이 잃어버렸고 결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하고 있었다. 집이라는 곳에 밀착되어 있는 정서가 얼마나 깊고 강한지를, 그리고 자신의 지나온 생의 기억과 장소는 한 몸으로 뒤엉켜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소설 속 구절이 상기시키고 있었다. 하나의 텍스트가 수백만 개의 메밀밭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수백만 개의 옛 집에 대한 기억이 하나의 텍스트에 모이기도 한다.
“여기야”
큰오빠는 외사촌과 나를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게 한다. 여기야, 라고 말하던 큰오빠의 목소리가 그때처럼 지금 내 귀로 흘러든다. 거기였다.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는게 보였다. 구멍가게나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육교 위 또한 늘 사람으로 번잡했었건만, 왜 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졌다는 생각, 외로운 곳에, 우리들, 거기서 외따로이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인지. -신경숙, 「외딴방」, 문학동네, 1999, p.47
‘서른일곱 개의 방 중 하나’에만 고스란히 새겨져 있던 외로움의 기억들처럼 서울의 무수히 많은 골목과 집들 사이에서도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그 집)’만이 문신처럼 새겨진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에서 ‘외딴방’이라는 장소는 주인공이 아무리 잊고 싶고 지우고 싶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생의 문신과 같은 흔적이자 기척이다. ‘그’ 외딴방은 나에게 새겨져 있던 외로움의 흔적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의 기척이기도 하다. 이처럼 독자들은 소설 속에 표현된 장소에다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여 그 의미를 내면화시키게 된다. 장소라는 것이 이토록 지극히 사적인 개개인의 기억과 정서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것을 소설만큼 잘 표현하고 있는 장르도 드물 것이다. 개인화되는 장소가 더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내밀해지는 과정을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허구와 여지의 ‘장소이미지’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 속 장소에서도 우리는 허구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장소와 허구의 만남은 장소와 여지의 만남이다.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은 장소의 변화무쌍한 속성을 소설 속 장소의 허구성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소설가들은 소설 속 배경으로 실제 장소를 모델로 삼더라도 가상의 지명을 자주 사용하곤 한다. 정유정의 「7년의 밤」에 등장하는 ‘세령마을’이나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의 주요 배경인 ‘진남’은 가상의 지역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를 소설의 무대로 설정하게 되면 장소에 대한 이미지가 인식적으로나 시각적으로 굳어지게 된다. 그러나 허구의 지명을 사용하게 되면 알 듯 싶고 익숙한 듯도 싶지만 고정되지 않음으로써 더 풍부한 여지가 생겨나게 된다. 소설이 논픽션이 아닌 픽션이어야 하는 당위성도 바로 이러한 ‘여지’와 ‘틈’이 주는 진폭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원래는 통영을 생각하고 썼어요. 그래서 통영에 가서 쓰려고도 했었어요. 그런데 이야기가 다소 추문 같은 것에서 시작되잖아요. 자칫 사람들이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고, 너무 걸리는 게 많더라고요. 예를 들면 통영여고를 취재를 해서 쓰면, 통영여고의 외관에 대해서 쓸 텐데, 그러면 다른 이름을 붙여놓은들 사람들은 통영여고라고 생각할 테고. 그런 식으로 오히려 통영이라고 쓰고 나면 취재를 열심히 할수록 자세하게 쓸 수가 없게 되는 불상사가 생겨요. 그러니까 아예 그냥 통영의 분위기만 가져오고 그냥 진남이라고 한 거죠.” -김연수의 인터뷰 중 일부 발췌
(출처 http://webzine.11st.co.kr/browsing/BookWebzineSubAction, 2012.09.18)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1981)’의 사평역1)은 실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낯익은 시골 간이역으로 느껴진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 … /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 모두들 알고 있었다 / …’ 시인의 말에 따르면 사평역의 모델은 남광주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상의 지명을 사용함에 따라서 남도의 어느 간이역이든 사평역이 되어버린다. 이 시가 발표된 지 2년 후에 소설가 임철우는 이 시를 모티브로 삼아 소설 「사평역(1983)」을 썼다. ‘사평역에서’ 등장했던 익명의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는 구제적인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임철우가 모델로 삼았던 간이역은 남평역이라고 한다. 추상(시)이 구상(소설)이 되었지만 여전히 장소는 허구이다. 이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그’ 장소는 ‘어떤’ 장소든 되어버린다. 또한 ‘어떤’ 장소에 여러 켜의 의미가 덮씌워져서 ‘그’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단단히 붙들어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키기 힘든 장소의 변화하는 이미지로써의 속성을 소설은 자체의 장르적 특성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1)지하철 9호선인 사평역은 인근의 도로명 ‘사평로’에서 유래하였고 2009년에 개통된 지하철역명이다. 그러나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는 1981년에 발표된 작품이고 이때까지는 실존하는 사평역은 없었다.
관찰과 조망의 ‘장소시선’
지금까지 장소기억과 장소이미지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소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의 매력과 특성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장소시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만약 장소라는 대상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선의 변화를 통해서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가 한 눈에 파악되지 않을 때에는 부분을 세밀히 관찰하여 윤곽을 조금씩 그려나가면 된다. 반대로 너무 지엽적인 것들에 매달려 있다고 느껴질 때에는 전체를 조망하는 기분으로 거리를 두고 멀찍이 바라보면 된다. 이러한 줌인ㆍ줌아웃의 시선전환은 주로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아니라 소설에서 이와 같은 자유로운 장소시선을 제시하게 되면 오히려 영화에서보다 더 멀리 밀고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소설 특유의 텍스트성을 통해서 장소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장소 너머의 어떤 의미들이 놀랍도록 섬세하게 제시되어지는 것을 소설을 읽다보면 자주 발견하게 된다.
마치 뒷걸음을 치며 물러나야 보이기 시작하는 거대한 벽화처럼,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그 대답은 예루살렘을 하나의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원을 책으로, 도시 자체만큼 광대하고 성스럽고 섬세한 그런 책으로 바꾸는 것이죠. … 이천 년이 지난 후, 저희 아버님은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유대인의 영혼은 불타 버린 그 큰 집 위에 서 있는 거라고요. 너무나 큰 집이어서 우리 각각은 아주 작은 부분밖에 떠올릴 수가 없죠. 벽지의 무늬나 문의 손잡이, 거실을 가로지르는 빛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유대인들의 기억이 하나로 모이면, 그 집은 다시 세워지는 겁니다. … 우리는, 우리 각자는, 그저 기억의 조각을 지키기 위해 사는 거야. 영원한 후회와 한때 존재했음을 알고 있는 어떤 곳에 대한 갈망에 빠진 채, 그곳의 열쇠 구멍에 대한 기억, 바닥의 타일과, 열린 문 아래 닳아버린 문지방에 대한 기억을 지키기 위해.
- 니콜 크라우스, 「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2011, p.384~385
나는 우리 비행기의 그림자가 저 아래에서 덤불과 울타리, 포플러나무와 운하 위를 급하게 지나치는 모양을 쳐다보았다. … 어느 곳이나 항상 사람은 전혀 없고 오로지 사람이 만들어놓고 그 안에 숨어버린 것들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택과 주택 사이를 연결하는 길들, 주택과 공장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들은 볼 수 있지만, 직접 사람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지구 표면의 어디에나 존재하며, 매시간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높게 치솟은 탑으로 이루어진 벌집 사이를 움직이며, 모든 개인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복잡한 네트워크에 점점 얽혀 들어가고 있다. … 나는 이런 고도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다보면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결말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가 끔찍하리만큼 분명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창비, 2011, p.111~113
「그레이트 하우스」와 「토성의 고리」 두 소설의 제목은 장소를 지칭하고 있다. 각 소설의 주제와 각 소설의 장소는 밀접하게 상징적으로 결속되어 있다. ‘그레이트 하우스’는 유대인들에게 종교 자체로 상징되는 옛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은유이다. ‘토성의 고리’는 토성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맴도는 운석들과 마찬가지로 역사 속에서 되풀이 되는 인류의 파괴적인 파편들에 대한 장소적인 상징이다. 두 책 모두 ‘마치 뒷걸음을 치며 물러나야 보이기 시작하는 거대한 벽화처럼’ 작은 조각들을 맞추어 전체의 주제를 드러낸다. 이처럼 보편적이고 거대한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들이란 아주 작은 부분들 또는 파편들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의 열쇠 구멍’이나 ‘바닥의 타일’ ‘열린 문 아래 닳아버린 문지방’에 대한 기억과 같은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에야 비로소 ‘그레이트’에 가까운 장소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끔은 부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높은 ‘고도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우리의 목적과 결말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를 조망하며 전체를 되짚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장소를 관찰하고 조망하는 이러한 시선의 전환이 소설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 특유의 자유로운 시선 프레임을 통해서, 우리는 장소 자체의 정체성은 물론이거니와 장소 너머로 끝없이 확장해가는 본질적인 어떠한 것과도 아주 가끔씩 마주하곤 한다.
‘장소의 매력’을 발견하고 발굴해보겠다는 이번 기획의 밑그림이 지금까지 살펴본 소설 속 장소이야기들을 통해서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냈기를 바래본다. 장소의 전체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토성의 고리」의 역자후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계획적이고 추상적인 종합이 아니라 그때그때 우연하게 드러나는 개별자들, 파편들 사이의 근친성과 연결고리를 읽어내는’(p.352) 것만이 어쩌면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무계통적이고 비체계적일지라도 열심히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파헤치다보면 언젠가는 장소가 자신의 기척을 스스로 하나씩 보여주고 들려주리라 믿고 있다. 물론 오로지 장소의 기척만을 발견하기 위해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들여다보면 자꾸 장소‘들’이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다.
<인용한 소설 리스트와 장소의 기척>
1. 천명관, 「고래」, 문학동네, 2004 ; 춘희가 벽돌공장으로 돌아와서 바라다본 장면
2. 메리 앤 섀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이덴슬리벨, 2010 ; 줄리엣이 가출 후 옛 집 앞에 서 있던 장면
3. 신경숙, 「외딴방」, 문학동네, 1999 ; 외딴방에 처음 이사 간 날
4. 니콜 크라우스, 「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2011 ; 부분을 통해 유대인이 성전(종교)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
5.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창비, 2011 ; 높은 곳에서의 조망이 가지게 만드는 생각들
인용한>
* 재밌게 읽고 있던 어떤 소설의 한 구절에서, 관람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심히 흘려듣던 노래 한 소절을 음미해보다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차이가 문득 느껴질 때, 그리고 도심에 넘쳐나는 브랜드와 슬로건의 홍수를 목격하면서, 자꾸 장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Searching for Place(+α)는 이렇듯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이고 무작위로 출몰하여 자꾸 눈에 띄고 마음에 머물게 되는 장소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