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연 | 2015-06-10
디자인의 공식적 역사는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개교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우하우스는 인간을 둘러싼 환경 모두를 디자인 대상으로 보았다. 원로 디자인 이론가 기 본지페가 “디자인은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포괄한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디자인 이론가 릭 포이너는 “디자인 분야는 인간의 활동이 이뤄지는 영역 안에서 사회적 책임을 직시해야 하며, 두서없이 흘러가는 분야는 미래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또 그는 “디자인 분야가 앞으로 어른으로 성장할지, 아니면 요람으로 돌아갈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디자이너는 사회의 인정뿐만 아니라 책임까지 동시에 부여받았다. 디자인교육은 이를 감당할 디자이너 양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나아가 다분야 지식과 디자인을 융합해 보편적이고도 독창적인 디자인 방법론을 만들어야 한다. 그 역할은 꼭 대학이 아니어도 된다. 오히려 정해진 틀이 없는 교육 기관이 더 많은 실험적 도전이 가능할지 모른다. 디자인학교는 “현재 있는 방법론들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방법론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파편화되었다”면서 “디자인학교에서 디자인 외 다양한 과목을 개설한 이유는 방법론 때문이다. 다양한 학문의 방법론을 꺼내놓고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다 보면 본질을 이루는 방법론이 제기될 거로 기대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디자인학교는 디자인 콘텐츠 활성화와 디자인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 탄생했다. 디자인교육의 대안이 아닌 디자인 대학의 보조교육으로서다. 디자인학교는 대학 교육의 효율을 높이고 디자인 교육의 문턱을 낮춰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디자인학교의 이우녕, 이지원, 윤여경 선생(이하, 선생 생략)을 만나 현 디자인 교육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에디터 ㅣ 박수연 (sypark@jungle.co.kr)
Jungle : '디자인학교' 자체가 담론을 품고 있는 듯 보입니다. 현재 디자인이 처한 상황과 디자인학교의 시작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이지원 디자인은 디자인을 둘러싼 행위와 산업에 기반한 개념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디자인은 무엇일까요? 대한민국 디자인은 수출산업 육성을 위한 활동으로 시작했습니다. 교육도 거기에 초점을 맞춰 전개됐죠. 이후 수출 중심은 국내 산업에 적용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부작용인지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디자인은 스튜디오 아트라는 인식이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상황으로 내부에서 성찰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인은 비즈니스에 종속된 산업 활동일 뿐인가.’ 이런 의문이 미국을 중심으로 서양의 1980년대에 퍼졌습니다. 한국은 90년대 중반쯤 시작됐죠. 디자인정글 윤형기 선생이 에미그레를 본떠 만든 것이 성찰에 대한 부분이고, 정글에서는 〈Looking closer: 왜 디자이너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1, 2〉를 번역해 출간했습니다. 그때쯤 국내 디자인계에서도 성찰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있었을 뿐 사회의 디자인 인식과 시스템을 바꾸지는 못했죠. 다시 말해 비즈니스/산업에 종속된 디자인 개념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성찰을 한 사람들이 ‘이건 아니다’라고 반발하기 시작했지만, 일반적인 인식과 교육의 괴리로 나타났습니다.
산업 중심 디자인과 본연의 디자인 활동의 괴리는 제대로 교육받은 인력이 아직 사회에 퍼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일부 교수들이 학생들을 본연의 가치를 가르치기 시작했죠. 앞으로 디자인은 산업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문화 현상으로써 사회 과학의 한 연구 분야가 될 겁니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란 것도 거기서 나온 거죠. 나아가 예술과 비즈니스를 넘어설 거고요. 서양에서는 이미 그렇게 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근원적인 고민 없이 방관한다면, 해외 여러 활동에 영향을 받아 다시 끌려갈 겁니다. 반면 종류는 다르지만 서양의 움직임과 대등한 움직임을 취한다면, 활발한 교류 혹은 같이 가는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 중 하나가 바로 온라인 교육이고요.
사실 보수적인 대학 중심의 교육은 변화하기 힘듭니다. 대학 교육이 급진적으로 흘러간다면, 한국 체제는 망할 수밖에 없어요. 사회에 대한 인식 변화나 성찰이 전반적으로 일어나려면, 대학 중심이 아닌 일반 디자이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현직 디자이너, 학생, 교수 등 저변이 탄탄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누구나 접할 수 있도록 교육 문턱이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한 단계 올라서서 담론을 넓고 강하게 형성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찰은 굉장히 파편적으로 이뤄졌죠. 몇몇 저명한 분들 위주로 형성됐고요. 어쨌든 대학에서는 대학 교육을 하되, 일정 부분은 온라인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디자인학교를 시작한 연유입니다.
이우녕 현대 미디어 추세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전되면서, 온라인이 오프라인의 보조 수단에서 메인 프레임으로 격상됐습니다. 오히려 오프라인이 보조적 수단으로 바뀌는 상황이죠. 현 사회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모든 문화를 동시에 누립니다. 가령 옷을 사러 ZARA 매장에 갑니다. 스페인 ZARA와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한국 사람이 입죠. 이런 행위는 사고나 관념, 보는 의식과 문화 자체를 바꿉니다. 미래에는 인터랙션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질 겁니다. 모든 것이 네트워킹될 테니까요. 이때 저변을 확대할 수 있는 효율적인 매체가 온라인이 될 겁니다. 몇몇 사람들의 담론이 온라인으로 퍼지면 일반인들의 관심도 모을 수 있는데, 그 방법이 온라인 교육입니다.
윤여경 조금 다른 측면으로 얘기하면, 디자인은 단어 자체에 양의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문분야로서의 디자인, 하나는 일반적인 예술로 칭하는 디자인이죠. 예술처럼 사용하는 예술이나 디자인은 2000년대 중반 이전까지 잘 안 쓰다가 이후 사람들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즉, 디자인이란 단어가 전문적인 고유명사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명확해야 하는데, 현재는 과도기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저변 확대가 돼서 좋긴 한데, 동시에 디자이너라는 전문적인 지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육 시스템이 전문적인 디자이너를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사용자는 디자이너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야 할까요? 이런 문제들이 계속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예전에는 디자인이라는 전문 분야가 명확히 있었고, 그 부서에서 디자인하면 마치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듯 진행됐습니다. 지금은 디자이너도 여기저기 개입하고 마찬가지로 디자인 하나에 누구나 개입할 수 있죠. 그 장이 한정된 오프라인 장에서 온라인이란 광폭장으로 옮겨간 겁니다. 온라인 또한 독자가 없으면 안 만들어지는 거고요. 이제는 디자이너가 사용자에게 탑다운식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피드백 받으면서 디자인이 형성되는 방향으로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Jungle : 맥북 등 디지털 기기 대중화로 디자이너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위기의식을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우녕 그 부분이 위기로 다가오긴 한데, ‘디자인 자체를 하나의 장인적인 기술로 볼 것인가, 연구가치가 있는 학문으로 볼 것인가’의 고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도제식으로 기술을 전수받는 특수한 직업이었다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가 로봇으로 대체됐듯이, 이제는 인지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알고리즘이나 프로그램으로 대치되면서, 자연스레 디자인 역할도 바뀌었습니다. 일반인이 인스타그램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어내듯이, 기존의 특별한 기술이 보편적인 기술이 된 거죠. 뭔가 새로운 카드를 꺼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요즘 학교나 사회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디자인이 중요한 것과 디자이너가 중요한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디자인은 중요한데 디자이너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죠. 디자인 분야는 좁은 의미로 무언가를 아름답게 만드는 거지만, 깊은 의미로는 어원처럼 구조 자체를 만드는 거잖아요. 실제 학교 교육행위는 그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 흐름에 맞는 교육을 위해서는 구조를 파악하고, 커뮤니케이션 담론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다른 분야를 통합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어야 하죠. 예전에는 디자이너가 기술적인 것만 공부했다면, 현재는 다른 분야까지 습득해서 사회 전반적인 것을 디렉션할 수 있는 지위에 섭니다. 어떻게 하면 그 지위를 잘 수행할지를 고민하는 게 학교가 해야 할 일입니다.
Jungle : 지금 우리가 원하는 디자이너, 즉 앞으로 비즈니스를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예술까지 포섭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길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지원 디자이너 또는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이 다루는 대상의 폭이 지금보다 훨씬 넓어져야 합니다. 디자이너는 내키는 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사회 일반적인 관념을 이해한 상태에서 특정 그룹에 적용해야 하니까요. 그때 취해야 할 관점은 디자인의 대상 등을 파악한 후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것을 파악하려면, 많은 사회적 관습과 상황 파악이 밑바탕 돼야 하고요. 그 방법에 대한 공부가 디자인 교육이어야 합니다. 사회과학, 역사, 인문학도 같이 알아야 하는 거죠. 다 섭렵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리서치하고 공부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이우녕 아예 자각을 안 한 사람은 해당이 안 되지만,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다른 학문에 접근하려는 사람은 양분화되는 것 같습니다. 깊이 담갔다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와 포털사이트처럼 굉장히 얇고 가볍게 보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굳이 거슬러 올라가자면 디자인은 음악이나 미술에 비해 짧은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 그동안 디자인은 무엇을 해 왔을까요? 독자적인 연구 체계 구축은 그 분야에 대한 연구 방법론이 있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디자인 연구 방법론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요? 문학에서 수사학, 철학에서 기호학을 가져왔죠. 짜 맞추기는 했지만, 디자인 접근방식에 있어서는 특정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와 과거를 보고 미래의 전체적인 것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담론이 없으니 미래로 갈 수 없죠.
과거로 돌아가려는 사람은 순수미술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순수미술과 디자인 사이에 서면 정체성이 모호해지기도 하죠. 디자인이 사회 논리적 생각이나 시스템 분석이 아닌 자기표현 분야라는 왜곡된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인데요. 그러면서 탄생한 스타 디자이너는 자신의 활동을 예술로 봅니다. 마찬가지로 예술 분야도 예술가가 상업적인 일을 수주하는 게 왜곡돼서 디자이너화되고요. 여기서 중요한 건 경계의 여부가 아니라 제대로 된 디자이너의 역량을 갖출 방법론과 연구 시스템을 갖추고 있느냐의 문제의식입니다.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은 더 큰 문제고요.
윤여경 오해할 수 있는 게 방법론이 없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죠. 그중에 제대로 된 방법론이 있느냐 하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방법론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패턴랭귀지’나 울름조형대학의 공학적 방법론, 일리노이 등에서 말하는 방법론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디자인 전체가 공유하는 일종의 E=mc^2과 같은 공식적 방법론이 아닙니다. 그곳 고유의 방법론일 뿐이죠.
저는 15년간 예술적 기질이나 스타성을 지닌 사람들이 여러 방법론을 꺼내놓고 금세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뭔가를 확 꺼내 넣기보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이 디자인학교의 의도 중 하나고요. 강의를 쌓는 것이 곧 방법론을 쌓아가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디자인읽기와 말하기도 그 일련의 작업 중 하나입니다.
이지원 사람들이 공개적인 발언을 꺼리는 이유는 내가 나중에 나를 부정할까봐 그렇죠. 하지만 발전을 위해서는 부정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이우녕 프로이트는 일생에 걸쳐 자기 이론을 자기가 반박했죠. 자존심 때문에 붙들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문제는 없습니다. 많은 사회과학자가 칭송하는 바람직한 연구자의 자세입니다. 디자인학교를 만들면서 디자인 외에 다양한 과목을 개설한 이유는 방법론의 부재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만든 방법론이 있지만, 한 장소에서 꺼내놓고 비교할 수 있는 공유의 장이 생기지 않았죠. 다양하게 꺼내놓고 다른 학문처럼 각각의 방법론들을 제기하고 섞이면서 공통분모를 찾고,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 하나의 본질을 이루는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학교는 각 선생님의 흥미 분야를 한곳에 모아놓고, 그 안에서 다 같이 보려는 시도입니다. 각기 다른 관점이 섞이면서 부딪힐 수도 있고 응용하는 과정에서 시너지효과를 창출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디자인 방법론 형성의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게 됐을 때 디자인은 산업에 종속되거나 작가주의로 빠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고유의 지표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Jungle : 디자인학교 커리큘럼을 보면 다른 디자인 교육기관과 차이가 있습니다. 교실구성도 강의, 소풍수업, 도서관, 상담소로 이뤄져 있는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함께 가져가려는 의도인가요?
이지원 온라인 매체로서의 장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입니다. 디자인학교는 궁극적으로 굳이 대학에서 할 필요가 없는 또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싶습니다. 대학은 교수와 학생이 직접 만나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이뤄지는 교육, 그것만 남으면 됩니다. 그러나 대학은 그러고 싶지 않죠. 어떻게든 끝까지 다 갖고 있으려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대학에서 온라인 강의만 빼서 대중에게 오픈하는 겁니다. 일부 외국에서 실제로 행하고 있기도 하죠. 온라인에서는 대학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겁니다. 디자인학교는 그런 의미에서 대안 교육이 아닌 보조교육을 행합니다. 소풍 수업은, 커뮤니티 형성을 위한 수단이고요.
윤여경 대학은 커리큘럼이 짜여있죠. 수업을 하려면 행정절차가 필요하고, 시간과 장소에 제약이 따릅니다. 학생 입장에선 등록금도 필요하죠. 이와 대조적으로 온라인은 시공간 제약 없이 언제든 수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디자인 역사 읽기의 경우도 디자인 방법론을 얘기하는 건데, 디자인 대학 강의라기보다 교양강의에 가깝습니다. 굳이 디자인 대학에 있을 필요는 없지만, 있으면 나쁘지 않은 강의죠. 온라인에서 이론 교육을 받으면, 학생들은 대학에서 토론하면 됩니다. 굳이 이론 설명을 다시 할 필요가 없죠. 디자인학교라는 보조수단이 학교 교육에 유용한 진짜 보조수단이 되는 겁니다.
이지원 얼마 전 디자인학교와 무관하게 동료 교수랑 이야기하기를 ‘이제 강의, 이론, 툴 같은 강의 과목은 다 온라인 교육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학생들의 시간을 절약하고 다른 주요 코어 과목에 집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죠.
이우녕 강의 과목은 시각디자인을 기본으로 가능하면 다양한 모든 종류의 디자인으로 범위를 확대하고자 합니다. 시각디자인은 디자인 분야 중에서 가장 디자인 개론을 얘기하기 좋죠. 모든 것이 시각적인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제품 디자인에서도 기능을 제외한 많은 부분이 시각 조형 디자인이니까요. 디자인학교는 디자이너건 아니건 디자인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눌 수 있는 장이 될 겁니다. 아직 쌓여가는 과정이고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요. 디자인은 계속 변합니다. 담론도 계속 변하고요. 요즘에는 드라마도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계속 바꿔나가잖아요. 사회가 바뀌고 이슈가 바뀌기 때문에 디자인학교도 미리 준비하고 오픈하는 건 의미 없다고 봅니다. 기록이 남으면 10년 후에는 10년 전에 어떤 교육이 이뤄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디자인역사 교육이 되는 셈입니다. 지금 세대들은 기술이 왜 생겼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면 결국 디자인 역사 교육을 따로 해야 하죠. 기록으로 남기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 수 있고, 과거와 현재를 접목해서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무의미하게 흘려버리는 콘텐츠가 아니라 유의미하게 반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Jungle : 1년간 디자인학교를 지속하면서 깨달은 점이나 디자인분야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한 부분이 있습니까?
이우녕 교육 수업 안에서도 디자인 전공자와 일반 사람들이 듣는 수업이 갈립니다. 지금은 콘텐츠를 고민하는 단계죠. 우리가 아무리 사업적으로 시행하고 계획할지라도 본질과 취지에 어긋나는 것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보조교육 본질 자체가 흐트러지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도, 디자인학교도서의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이런 점이 타 온라인 교육 사업, 오프라인 대안 또는 보조 교육과 차별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원칙에 의거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필요한 것과 보조 교육으로써 필요한 것이 뭔지 잘 알고 있죠. 또한 여기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차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디자인학교를 운영하면서 과거에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던 관점이 바뀌는 것을 느낍니다. 요즘 사회에는 아름다운 디자인, 기능적 디자인, 상호 소통적 디자인 등 좋은 디자인에 관한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그 뒤에서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지원 예전부터 비즈니스 사회의 인하우스, 에이전시에서 실무로 유명해진 사람들이 우리나라 디자인의 간판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학으로 유입돼서 교수로서 학계에서 간판이 된 상황이죠. 따라서 제대로 공부한 롤모델이 없습니다. 그래픽 디자인 역사를 보면 유럽이나 미국에서 디자인으로 인정받고 돌아가신 분들은 말년에 다 글을 썼습니다. 디자인은 이래야 하고 이래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산업디자인의 총아인 폴 랜드도 글을 썼습니다. 바우하우스 출신들 모두 글을 썼죠.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런 롤모델이 있냐고 물으면, 몇 없습니다. 지속적으로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윤여경 디자인 졸업자는 한 해에 2만5천 명에 달합니다. 20만 명의 디자이너가 있다고 보는데 이런 거대한 분야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의외로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디자이너들의 커뮤니티도 없습니다. 노동조합도 없죠. 그 말인즉슨 할 일이 매우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디자인 분야는 공부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나라 스타 디자이너들은 너무 젊어요. 50대 초중반으로 늦어져야 합니다. 15년 정도의 시행착오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랜 고민을 토대로 좋은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축적된 시간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냥 쉽게 쓰고 버리는 방법을 택하죠.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가 디자인의 주체가 못 되는 겁니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의 요소로밖에 작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예술의 주체가 돼야 합니다.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공감했다면, 그걸 공부하고 연습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거죠. 이를 책임감 있게 꺼내놨을 때 오래갈 수 있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 되도록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디자이너가 대접을 못 받는 근원적인 고민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으니까요. 디자인 분야는 공부가 필요하고, 공부하려면 교과서와 콘텐츠가 있어야 하죠. 콘텐츠로 교과서를 만들려면 노력이 듭니다. 이런 총체적 난제는 시간을 두고 하나씩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디자인학교는 그런 노력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콘텐츠를 쌓고 보조교육으로써 디자인 방법론을 만들어갈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