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22
스테파노 마르자노는 1950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밀라노 폴리테크닉 대학(Milan Polytechnic Institute)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필립스에는 1973년에 입사해 이탈리아의 소비자 가전 부문에서 일하다가 1978년에 네덜란드로 옮겨 와서 데이터 시스템과 통신기기 부문의 디자인을 지휘하게 되었다.
1982년에는 소비자 가전 부문을 개발하는 필립스 이레 디자인 센터(Philips-Ire Design Centre)를 이끌었고 1989년에는 월풀(Whirlpool)과 필립스의 합작 회사인 월풀 인터내셔널의 산업 디자인 부문 부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1991년에는 현재의 지위인 필립스 디자인 CEO이자 수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그가 이끄는 필립스 디자인의 탁월함은 이미 여러 차례의 수상 경력으로 증명되었다. 1998년에는 독일의 디자인 젠트룸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Design Zentrum Nordrhein Westfalen)에서 올해의 디자인 팀으로 선정되었고, 2001년에는 세계 기술 네트워크(World Technology Network)에서 수상했으며, 2005년에 미국판
<비즈니스위크(business week)>
에서 ‘2005년 최고의 리더’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iF 디자인 어워드에서는 매년 다수의 수상작을 내고 있다. 현재 필립스 디자인은 필립스에서 생산하는 제품뿐 아니라 외부 업체의 제품까지 디자인하고 있다.
필립스의 디자인 책임자는 10년 정도마다 바뀌어왔다. 기술을 선도하고 인간에게 유익한 제품을 내놓는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개성에 따라 필립스 디자인의 지향점도 조금씩은 바뀌었다. 1970년대에는 너트 이안(Knut Ian)이 합리적인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해 강조했고, 1980년대 로버트 블레이크(Rovert Blaich)는 ‘필립스다운 디자인’을 강조해 필립스의 디자인에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했다. 그리고 지금의 스테파노 마르자노는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미리 보여주는 일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단순히 시장의 요구에 의한 디자인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디자인으로 새로운 개념과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가 세운 필립스의 디자인 철학은 ‘하이 디자인(High Design)’이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하이 디자인은 최첨단의 제품이면서도 쓰기 편하며, 무엇보다 인간의 일상적인 필요에 부합하도록 설계한 제품과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즈니스위크(business>
‘하이 디자인’ 철학은 가격 대비 효용성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산업 사회의 사고방식이 문화적 전통과 일상적이고 소중한 가치들을 희생시켰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스테파노 마르자노는 사물과 사용자 간의 관계가 하나의 믿음과 애정이었던 시대로의 복귀를 주장한다. 그는 전자 제품이 그러한 가능성을 놓친 것은 인간적인 형태 대신 검은색이나 흰색의 박스처럼 비인간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술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함에 따라 기술이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기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책임이 있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물건을 만들어 파는 기업들이다.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책임감이다.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에 그다지 필요가 없지만 단지 눈길을 끌기 위해 어떤 것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고, 오래지 않아 사라져버릴 것들이다. 제품은 사용된 후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고마워할 정도의 물건들로 남아야 한다. 이러한 생각에서
‘자연과 인간이 만든 환경에서 인간과 제품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필립스 디자인의 미션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양한 물건에 대한 욕구는 단순히 통계 조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필립스는 사회학자, 인류학자, 심리학자, 마케터 등으로 구성된 팀이 함께 디자인 작업에 참여한다. 하이 디자인은 모든 필립스 제품을 디자인할 때의 철학일 뿐 아니라 필립스 그룹 전체의 비즈니스에 대한 철학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립스가 생산하는 제품이 토스터기에서 의료 기기까지 실로 다양한 제품군에 걸쳐 있지만 모두 ‘하이 디자인’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의료 기기와 토스터를 쓰는 환경은 다르지만, 어느 것이든 모두 이 시대의 인간이 사용한다는 공통점에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인 ‘하이 디자인’철학이 유효할 수 있는 것이다.
글/정영호 기자
아르텍(Artek)은 현대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lto)가 1935년에 만든 가구 회사이다. 알바 알토는 아르텍을 통해 자신의 건축적 성향을 가구를 비롯한 소품, 텍스타일 등에 적용, 확대 재생산한다. 지금까지도 아르텍은 초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알바 알토의 스타일을 유지해오고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아르텍의 이런 경향은 신선했고 시대를 맨 앞에서 이끌었다. 하지만 수풀 향기 물씬 풍기는 기하학적 스타일의 가구들은 어느덧 21세기를 버거워하는 노쇠한 고전이 되었고, 새로운 유전적 변신이 필요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2005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국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톰 딕슨(Tom Dixon)을 영입한다. 디자인 공부가 아니라 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하다가 디자이너가 된 톰 딕슨의 불가사의한 경력이나, 신소재를 잘 다루며 기하학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그를 보면 아르텍의 선택은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톰 딕슨은 처음부터 아르텍을 혁명적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첫 행보는 알바 알토와 아르텍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표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혁신성을 우회적으로 표하는 것들이었다. 수십 년 전에 생산된 제품들을 수집하여 다시 내놓은 ‘2nd Cycle’이나 1960년대 알바 알토의 작품을 흑백으로 재출시한 ‘아르텍 클래식’과 같은 기획을 보면 예상과는 다른 톰 딕슨의 조심스러운, 그러나 역시 세계적인 거장다운 행보를 읽을 수 있다.
여느 디자이너였다면 멋진 자기 작품으로 새로움만 잔뜩 불어넣으려 했겠지만 톰 딕슨은 아르텍의 고전을 재인용함으로써 전통도 강조하고 새로움도 부각시켰다.
글/최경원(디자인실험실 실장)
로얄코펜하겐은 1775년에 줄리안 마리(Juliane Marie) 여왕에 의해 국립도자기공장으로 세워졌다. 지금 로얄코펜하겐은 다양한 제품군을 내놓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푸른색 레이스와 비슷한 형태의 패턴(Blue Fluted pattern)으로 디자인한 그릇은 회사 창립과 그 역사를 같이한다. 이 패턴은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살아남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로얄코펜하겐이란 이름을 들으면 파란 레이스 문양의 그림으로 장식된 고전적인 분위기의 순백색 도자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놀드 크로그(Arnold Krog)가 형태를 조금 간소화한 디자인을 내놓으며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것은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88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그리고 또 1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검은색이 등장했다. 2007년에 기존의 푸른색 대신 검은색을 사용한 ‘블랙 플루티드 레이스(Black Fluted Lace)’ 시리즈를 내놓은 것이다. 물론 로얄 코펜하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닐스 바스트룹(Niels Bastrup)이 보수적이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새로운 제품에는 새로운 기법을 장려하지만 브랜드의 얼굴이 된 제품에는 최대한의 경의와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이것이 로얄코펜하겐을 전통 있는 브랜드로 남아있게 한다.
엘리자베스 올슨이 프록터 앤드 갬블(Procter & Gamble, 이하 P&G)에 처음 입사한 25년 전에는 패키지 디자인이 지금처럼 개념적으로 발달해 있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매장 진열대에 놓인 세탁비누와 빨래비누는 구분이 되지 않았고, 10대 피부에 맞게끔 만든 화장품을 60대의 노인이 쓰는 일도 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기업들이 자사 제품군을 세분화하고 소비자의 취향 또한 세분화됨에 따라 패키지 디자인 전략도 그에 맞추어 발전해야 했다.
P&G의 글로벌 디자인 디렉터로서 엘리자베스 올슨은 다양한 소비자들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갔다. P&G의 패키지를 실제로 디자인한 곳은 랜도 어소시에이츠(Landor Associates)나 LPK 같은 외부 업체였다. 하지만 소비자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만든다는 그녀의 일은, 단순히 하나의 패키지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 전체를 만들어가는 일을 의미한다. 소비자로 하여금 ‘이 브랜드는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한다. 그리고 브랜드가 소비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올슨은 하나의 패키지가 그 제품의 가치 자체를 드러내는 은유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녀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외부 디자인 업체가 실제 패키지를 디자인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이제 패키지는 비로소 스스로가 왜 자신이 특정한 소비자에게 걸맞은 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엘리자베스 올슨에 의해 P&G의 패키지 디자인에 대한 개념은 25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건축가였던 마시모 모로치(Massimo Morozzi)는 1941년 플로렌스에서 태어났고, 현재는 밀라노에서 살고 있다. 1972년까지 그는 아키줌 그룹(Archizoom Group)의 일원이었고, 1972년에서 1977년까지는 몬테피브르 디자인 센터(Montefibre Design Centre)에서 가구 패브릭을 디자인했다. 1982년에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고 소비자 용품과 생활 용품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밀라노의 도무스 아카데미와 유럽 디자인 연구소(European Institute of Design) 외에 암스테르담, 상파울루 등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파리 장식미술박물관(Muse des Arts Decoratives)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1987년부터 마시모 모로치는 에드라의 아트디렉터로 일하면서 여러 가구를 디자인했다. 기능적인 혁신성과 미적인 접근의 조화가 에드라뿐 아니라 알레시, 카시나 등과 협력할 때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특징이다. ‘이탈리아의 풍경’이란 의미가 담긴 ‘파에사기 이탈리아니(Paesaggi Italiani)’ 시리즈는 1995년에 처음 발표한 이후 매년 새로운 모듈과 변형을 더해가면서 확장하고 있다. 모듈식으로 이루어진 이 가구는 어떤 고정된 문제를 해결한다는 기존의 디자인 개념에서 벗어나 소비자가 자신의 생활 공간과 목적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할 수 있다.
물론 조형 요소의 기본이 되는 정사각형이란 형태를 조합해 다양한 가구를 꾸민다는 개념 자체는 이미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모듈형 가구가 많은 경우 단순하고 장식적인 요소가 철저히 배제된, 그래서 조금은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느낌마저 주곤 한다. 마시모 모로치의 파에사기 이탈리아니 시리즈는 래커를 칠한 멜라민이나 아크릴처럼 밝은 색채와 경쾌한 미적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의 특성을 살렸다. 파에사기 이탈리아니는 그 이름 그대로 밝은 햇빛 아래 모든 것이 선명한 색채를 띠는 이탈리아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글/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