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 | 2018-04-20
‘그래서 9월 초 에이머리(Amory)는 여름철용 양복 속옷 6벌, 겨울철용 양복 속옷 6벌, 티셔츠로 불리는 스웨터 한 장, 저지 한 벌, 외투 한 벌을 짐에 싸서 명문 대학교의 땅 뉴잉글랜드로의 여행길에 올랐다.’ 1920년 미국의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가 데뷔작으로 출판한 소설에서 ‘티셔츠(T-shirt)’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문헌 속에 등장했다.
티셔츠 - 올해로 꼭 111살 생일을 맞다
오늘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처의 모든 인류가 가장 즐겨 입는 대중적 의류 아이템이 된 티셔츠는 지난 2013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ès)는 2013년 봄/여름 컬렉션 패션쇼에서 가격 9만 1천5백 달러(우리 돈 약 9천7백80십만 원)짜리 세계 패션사상 제일 비싼 티셔츠를 선보이며 티셔츠는 싸고 대중적인 옷가지라는 고정관념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여전히 티셔츠는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을 차별 않고 만인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사 입고 빨아 입을 수 있기도 하지만 한 번 입고 버려도 그다지 아깝지 않은 반일회성과 반영구성, 융통성과 실용성을 골고루 갖춘 만능 패션 의류다.
오늘날 복식사에서는 티셔츠의 탄생연도를 190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907년, 영국에서 새뮤얼 사이먼(Samuel Simon)이라는 스크린 날염 인쇄 공학자가 개발한 실크 스크린 인쇄법이 특허를 받은 해다. 그 후 지난 100년 동안 화학기술의 발전이 더해져 이 직물 인쇄 기술의 기본 원리는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문화사학자들은 티셔츠(T- Shirt)의 원형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등장했다고 얘기한다.
일찍이 기원후 5세기,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에 군인들에게 입힐 실용적인 T-자 재단•재봉된 튜닉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직사각형 형태의 긴 천 조각을 반으로 접어 팔 아래와 옆구리를 재봉하여 몸을 보호하는 T-모양 군인 복장에서 출발했는데, 커다란 천 조각 한 장을 몸에 두르고 핀으로 꽂아서 스타일링하던 당시 일반인들의 키톤, 튜닉, 토가 복장보다 팔 움직임이 자유롭고 착용에 실용적이라는 것이 장점이었다. 그러다가 1913년 제1차 세계대전기, 미국 해군이 ‘군복 밑에 입는 가벼운 흰색 면 속옷’ 티셔츠는 정식 군복 유니폼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티셔츠의 원형이다.
소비자들의 우상은 역시 연예계 스타
그러나 티셔츠가 일반 대중용 의류로 둔갑해 대중화되기 시작한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부터였다. 1933년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는 무지 흰색 티셔츠에 ‘Property of USC’라는 굵은 고딕체를 인쇄, 재학생용 체육복에 디자인해 넣어 사용하기 시작하며 체육복 디자인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본래 도난을 막기 위해 이름표를 붙인다는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이내 학생들 사이에서 학교 이름이 찍힌 티셔츠가 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교내 서점에서 인기리에 팔려나가는 디자인 품목이 되었다. 헌데 갑자기 1934년 흰색 티셔츠 매출이 75%로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는데, 그 해 은막 스타 클라크 게이블이 영화 속 한 침실 장면에서 잠들기 전 옷을 벗을 때 흰색 속 셔츠를 입지 않고 맨 웃통을 보인 것이 이유였다.
이 같은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 속옷 제조업체 헤인즈(Hanes) 사는 제2차 세계대전기를 이용하여 미국 군대와 용감한 군인 이미지를 이용한 마케팅을 시작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대신 ‘당신만의 티셔츠를 갖기 위해 꼭 군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라는 시어스 백화점의 발상 전환 광고가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시어스 백화점이 흰색 군인용 티셔츠를 장당 24센트(오늘날 우리 돈으로 약 4천 원)에 ‘뱃사람’ 또는 ‘해군 선원’ 셔츠로 이름해 판매하기 시작한 이때는 1938년 경이다. 이 여세를 몰아서, 이듬해 개봉된 영화는 ’오즈(OZ)’라고 인쇄된 흰색 티셔츠를 입는 에메럴드 시티 시민들이 등장한 클립을 영화 홍보용 광고로 사용해 성공을 거뒀다.
티셔츠에 적힌 문자 메시지의 위력은 곧 정치가들의 선거운동용 홍보 매체로 사용되었다. 1948년 뉴욕 주지자 토마스 듀이는 대통령 후보자 선거운동에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를 활용했다. 그러나 역시 일반 대중은 군대나 정치 같은 심각한 롤모델보단 화려한 영화 속 멋진 할리우드 배우들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법이던가? 1951년 개봉작에서 ‘노골적으로 잘생긴’ 남성 배우 말론 브란도는 멋진 근육질 몸매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등장하며 당대 섹스 심벌로 떠올랐다. 곧이어 1955년 불멸의 반항아 제임스 딘은 영화 속에서 전형적인 흰색 티셔츠를 입고 등장한 이후로 방황하는 아름다운 청년의 아이콘의 전형이 되었다.
형태는 소재를 따른다?
티셔츠가 대중의 폭넓은 일상 및 거리 의상으로써, 또 소속 표시, 개인의 패션 선언, 정치적 주장의 표현 매개체로서 널리 대중화된 1960년대 이후부터는 티셔츠 가공과 인쇄술의 발전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오죽했으면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1960년대부터 팝 미학이 일상을 파고든 대중 시각문화를 실크 스크린 작품으로 표현했을까? 1960년대 초부터 플라스티솔(Plastisol)이라는 인쇄용 잉크가 발명되었는데 스트레치성 있는 플리에스터 소재 또는 합성 티셔츠에 특히 적합했다. 플라스티솔 잉크는 액체 가소제에 PVC 서스펜션 수지나 폴리머 분자를 녹여 만든 불투명 염료여서 강렬한 색상의 그래픽 인쇄와 진한색 바탕 셔츠에도 선명하게 인쇄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 기술을 이용해 제작된 가장 고전적인 티셔츠 디자인으로는 1960-70년대 히피들이 입고 다니던 ‘평화와 사랑’ 티셔츠가 있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팝 밴드 롤링 스톤즈는 존 패쉬(John Pasche)가 디자인한 그 유명한 혀와 입술 롤링 스톤즈 로고를 발표했는데, 흰색이 아닌 검정 배경 셔츠 위에도 그래픽이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는 것은 당시에 큰 혁신이었다. 티셔츠의 메시지성과 파격적 이미지 효과를 노린 펑크 계열의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렛 잇 록(Let it Rock) 디자인숍(430 킹스 로드 상)을 열고 복고풍 록 메모러빌리아와 슬로건이 찍힌 티셔츠를 판매했다. 뒤따라서 코카콜라, 카멜 담배, 버드와이저 맥주, 이어서 1977년 밀턴 글레이저의 그 유명한 I♥NY 티가 탄생하며 그래픽 디자인의 아이콘이 되었다.
인쇄와 직물 소재 분야 신기술도 티셔츠 디자인에 영향을 끼쳤다. 2010년부터 티셔츠 업계는 총알을 막을 수 있는 직물을 사용한 방탄 티셔츠를 내놓았고, 최근에는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99% 보호해주는 자외선 차단 기능 섬유 티셔츠도 널리 판매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14년에 H&M과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 콜라보로 선보인 라이크 라/나일론 네오프렌 소재 티셔츠가 소개되면서 이전까지 스포츠복용 소재로만 쓰이던 인공 합성 소재가 일상 의류용 직물로 포용됐다. 그 같은 소재적 진보와 패션의 경계 확장 추세를 틈타서 DHL 배송 서비스 업체는 이 업체의 노란색 로고색과 로고가 찍힌 ‘DHL 셔츠’를 쇼셜미디어를 통해 바이럴로 유행시키고 셔츠당 30만 원 가량에 판매할 정도로 일개 티셔츠를 기업 광고 전략 수단으로 격상시키는 마케팅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현대인은 모두가 아마추어 정치가?
21세기 글로벌 시대 이 시점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작년 2017년 봄/여름 컬렉션 패션쇼 캣워크에서 디오르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된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는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를 예견이나 했듯, 곧이어 작년 2017년 10월부터 미국 할리우드를 발원으로 올 초부터 우리나라의 언론과 여론은 온통 #미투 운동의 열병을 앓았다.
인류의 문화사를 되돌리며 보건대, 충격을 가하고 주목을 끌고 기존 질서에 항거할 목적으로 의복과 패션을 이용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새로운 문화 현상은 아니다. 일찍부터 과거 몇몇 여성들은 남장을 하거나 남자의 옷을 입고 남자들이 하던 역할 영역을 침범하곤 했는데, 예컨대 고대 페르시아 토미리스 여왕, 고대 영국 부디카 여왕, 프랑스의 국민 영웅 잔 다르크 등 역사 속 여성들은 집 바깥으로 나가 남자들만이 할 수 있었다고 믿어졌던 복장과 머리를 하고 전투를 지휘하거나 육체적 고행을 자처했다.
일찍이 조지 오웰이 예견했듯, 정치는 사회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썼듯이, 21세기 오늘날 정체성의 정치학(identity politics)이 일상의 일부이자 대중문화의 한 부분이 되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티셔츠는 온갖 정치적 주장과 시위 수단 혹은 개인 정체성이나 태도를 표출하는 게시판 역할을 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소셜네트워크 사이트, 셀카 사진, 인생사와 사교활동의 순간을 담은 인증샷, 정치적 시위자들의 항의 문구판과 나란히, 이제 티셔츠는 오늘날 개인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는 정치적·사회적 신조와 스타일을 한데 버무려 표현하는 메시지 보드 겸 개인 표현의 무대가 되었다.
과거 그 언제보다도 요즘 현대인들은 패션을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패션은 늘 반항과 저항의 표현 수단 이었고, 특히 티셔츠는 청바지와 더불어서 사회 고정관념을 향한 저항의 심벌이었다. 우리 현대인들의 일상은 과거 그 언제보다도 무미하고 지루할 만큼 편해졌다. 그런데도 정치적•사회적 불만에 찬 볼멘 목소리는 더 잦아졌고, 정치적 문구를 담은 티셔츠는 점점 더 많아져 가고 있다. 지난 100년 세월 동안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패션 브랜드와 소비자들이 널리 즐겨 입는 티셔츠의 변천사와 디자인 아이콘 실물을 한자리에서 둘러볼 수 있는 전시회 ‘티셔츠: 컬트-문화-전복(T-Short:Cult - Culture - Subversion)’은 영국 패션 직물 미술관(The Fashion and Textile Museum, www.ftmlondon.org)에서 올 2월 9일부터 5월 6일까지 열린다.
글_ 박진아(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