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3
개발도상국에는 단순히 일시적인 경제적,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고 성장할 수 있는 효율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한원준, 반가희 부부 디자이너가 설립한 반 디자인(Vhan Design)은 아프리카 가나 북부 지역 닝갈리 마을에 전기가 필요 없는 저장고를 건립하는 ‘지르 프로젝트(Zeer Project)’를 진행하고 있다.
닝갈리 마을 주민은 이 저장고를 통해 식품 보존 기간을 10배 가까이 연장할 수 있어, 빈곤 감소와 식량 안보, 생활 환경 개선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 진행하는 ‘지르 프로젝트(Zeer Project)’에 대해 알려달라.
‘지어 프로젝트(Zeer Project)’는 반 디자인(Vhan Design)과 suki&co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반 디자인은 한원준과 반가희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축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 및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Suki&co는 육숙희 대표가 운영하는 시어버터 판매회사로 아프리카 가나의 시어버터 여성 생산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지르 프로젝트(Zeer Project)’는 Zero Energy Effect Refrigeration의 약자로 전기없이 작동하는 저온 저장고다. 아프리카를 포함한 많은 빈곤 국가에서 겪고 있는 식량 부족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마음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다.
아프리카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일 사용하며 당연히 느끼는 것에 대한 기초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 이런 곳에서는 전기 전력을 이용한 혁신 기술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신기술에 대한 경계와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도 갖춰져 있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에서 채집된 수분을 이용하여 저온에서 식량을 저장할 수 있는 친환경 저온 저장고를 제안했다.
단순히 저장고를 만들어주는 것을 넘어 그들이 직접 지을 수 있도록 건축 기술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개발도상국에는 영양 키트, 의료용품, 신발, 우물 등의 구조물품이 많이 지원되고 있다. 일반적인 물품이 아닌 저장고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단순한 구호 물품을 통한 기부가 아닌 능동적인 태도로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으로 더 나은 삶을 전달하고 싶었다.
최근 추세는 지속가능한 방법에 대한 논의다. 일방적인 지원방식은 일시적이고 효율적이지 않다. 또한, 사용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사전조사를 통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5년 전 마을에 시어버터 제조장(Factory)을 만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에 대해 조사를 진행했고, 창고의 필요성에 대한 수요를 확인하였지만, 그 당시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작동하는 저온 저장고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현재는 부분적으로 시어버터 제조장과 근처 학교까지 전기가 들어오지만, 여전히 불안정하고 비싼 가격 때문에 일부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전기 없는 저장고는 어떤 원리로 작동되나?
아프리카에는 zeer pot이라는 전통방식의 냉장고가 있다. 증발냉각 방식을 이용하여 낮은 온도를 유지하는 냉장고다. 처음 저장고를 기획했을 때 이 냉장고의 원리를 이용하고자 했다.
냉장고를 저장고로 바꾸면서 디테일을 건물에 맞게 변형을 하고 현지에서 적용 가능한 재료들에 대한 연구를 거쳐 지금의 형태가 나왔다.
저장고 원리는 곡물이 저장되는 저장고 부분에 두 겹의 벽을 쌓아 벽 사이의 공간이 단열 효과를 하도록 해 저장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냉각 효과를 직사광선으로부터 보호한다.
또 건물 상단부와 건물 내부에 설치된 물탱크에 채집된 수분이 증발하기 시작하면 자연 증발 냉각의 원리로 인해 저장고 내부의 온도는 외부 온도에 비교해 낮아지게 된다. 건물의 상단부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가 공기의 흐름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간단한 자연의 원리와 주변의 제약, 그리고 누군가의 필요성을 건축으로 풀어내어 전기 없이 저온으로 저장할 수 있는 건물이 디자인되었다.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큰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란 여간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과정이 궁금하다.
2017년 국제 건축 공모전 ‘Lafarge Holcim Awards’의 중동 아프리카지역 수상이 시작이었다. 시상식 일정이 결혼식 날짜와 겹쳐 결혼식을 미루고 신혼여행을 먼저 아프리카로 다녀왔다. 그때 다시 마을에 들어가 저장고가 지어질 장소와 시기, 방법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과 의논을 하고 확정을 지었다.
그리고 시상식에서 많은 사람에게 아이디어로 끝나지 않고 꼭 지어지길 바란다는 응원을 받았다. 그때 우리는 더욱 확신이 들었다.
사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는 5년 전 가나 닝갈리 마을에 작업장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시어버터 여성 노동자를 위한 작업장 구축 작업을 한국의 NGO 단체인 Grow(구 MAB)에서 진행하면서 건축가로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을에 머물면서 건기와 비수기에 대비하여 곡물과 시어버터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저장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년 이 시기에 잘못된 보관 방법으로 수확량의 절반에 가까운 곡물이 손실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저장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에 최초의 저장고는 제조부터 보관, 판매에 이르는 하나의 생산 사이클을 완성해 줄 수 있는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던 가나의 작은 마을, 닝갈리에 지어주고 싶었다.
일이 힘들진 않았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의 반응이 궁금하다.
그들은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과거의 경험을 통해 커뮤니티 시설이 들어오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건축과정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참여했다. 여성들은 공사에 필요한 물을 길어오고, 청년들은 벽돌을 만들고 쌓는 과정을 반복했다.
특히, 미래에 이 건물을 사용하게 될 아이들의 참여도 유도했다. 기초공사에 사용될 돌을 주워 오거나 벽돌에 후원자의 이름을 새기는 작업을 하면서 저장고에 대한 애착과 관심을 가지도록 했다.
저장고로 인해 주민은 어떤 이익을 얻게 되나?
아프리카에서는 저장 공간의 부족과 잘못된 보관방법으로 모든 식량의 절반가량이 수확 후 시장에 출시되기 전에 사라진다고 한다.
저장고를 사용하면 주거 공간과 식량 보관을 분리할 수 있어 보존 기간이 10배 가까이 연장된다. 이는 절대 빈곤 감소와 식량 안보, 생활 환경 개선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시장의 형성 원리에 의해 비수기에는 곡물 및 식량의 가격이 급등하게 되며 사람들은 비수기에 비싼 돈을 지급하며 식량을 구매해야 했다. 이는 비수기가 되기 전, 곡물과 식량이 상해 버리기 때문이다.
시어버터가 주 수입원인 닝갈리 마을은 시어버터가 상하기 전에 싼값에 모두 판매해야 했다.
저장고가 완공되면 식량 문제의 해결은 물론, 시어버터의 생산량도 연간 20% 이상 증가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또한, 비수기에도 시어 열매를 보관했다가 버터로 가공할 수 있으며, 일정 온도에서 숙성되어 더 나은 품질의 시어버터가 생산할 수 있다.
더 나은 제품을 제값을 받고 판매할 수 있기에 마을 여성들의 소득도 좋아질 것이다.
앞으로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나?
기술 이전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3~5년 사이에 최초 투입 인력을 점점 현지인으로 교체해 최종적으로 저희가 없어도 스스로 건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할 것이다.
또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접목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준비 중이다. 사용되지 않는 공간이나 건축물의 리모델링을 통한 창고 건축과 쇼핑몰의 냉장 보관 코너 같은 공간에도 접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할 예정이다. 창고뿐만 아니라 주거 공간으로의 활용 가능성도 구상 중이다.
반 디자인의 계획이 궁금하다.
zeer 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이다. 얼마나 성장할지 가늠하기 힘들 만큼 가능성도 크지만 또 해결해야 할 일들도 많다.
아프리카 시멘트 1포의 가격이 우리나라 물가로 30만 원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흙을 이용해 건축비를 더 낮출 방법도 고민 해야 하고, 기술 이전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저장고의 다양한 변형과 해결법을 통해 필요로 하는 모든 지역에 건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최종 목표이자 계획이다.
에디터_ 김영철(yckim@jungle.co.kr)
사진제공_ 반디자인(blog.naver.com/vhan8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