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27
최근 300만 관객을 돌파한 ‘건축학 개론’, 그리고 올해 개봉한 독립영화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2만 관객을 돌파한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 흥미롭게도 이 두 영화는 모두 건축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를지 몰라도, 삶을 건축에 비유한 두 영화는 지금 우리에게 건축과 건축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말하는 건축가’는 한국 영화 최초의 극장용 건축 다큐멘터리로도 그 의미가 있다.
에디터 | 정은주(ejjung@jungle.co.kr)
자료제공 | 두타연
정기용은 한국 현대 건축의 2세대에 속하는 건축가로, 한국 건축 문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울대 미술대학 응용 미술과와 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한 뒤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프랑스에서 건축 공부를 했다. 한국에 돌아와 기용건축을 만든 후에 무주 공공 프로젝트,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 노무현 대통령 봉하 마을 사저, 계원 조형 예술대학, 코리아나 아트스페이스 센터 등을 지었다.
‘말하는 건축가’는 정기용이 죽기 전 일 년여 동안의 시간을 기록한 영화이다. 건축 설계를 맡았던 병원에서 대장암 판단을 받고 11시간의 대수술을 거쳤지만 그는 여전히 학생들을 만나고, 건축일을 해 나간다. 그리고 일민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그의 몸은 점점 수척해져 간다. 영화는 그의 일상을 쫓으면서,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건축을 나누고자 한다.
과거 건축은 정부 주도의 무분별한 개발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현재에도 ‘4대강 살리기 사업’, ‘청계천 복원’, ‘동대문 운동장 철거’ 등은 경제 성장 논리와 결합 되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건축은 처음부터 보기에만 좋은 것도, 소수의 사람들이 갖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고, 정기용 은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정기용의 건축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공공 건축물이 많았다. 그의 건축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했다. 무주 공공 프로젝트는 12년 동안 진행된 공공 건축 프로젝트로, 면사무소, 공설운동장, 버스 정류장 등 30여개에 이르는 공간들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것은 한 건축가가 하나의 지역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공 프로젝트 중에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인 활동이었다. 그의 건축 철학은 안성면 주민센터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무주 안성면 주민센터에는 목욕탕이 있다. 주민센터와 목욕탕,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은 정기용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반영한 결과이다. 주민들이 목욕탕이 없어 일 년에 몇 번, 버스를 대절해 다른 곳의 목욕탕에 간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는 주민센터 안에 목욕탕을 만들게 된다.
“건축을 구태여 학문적으로 분류하자면 예술이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건축과 도시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을 조직하고 사회를 다루는 분야로 인문,사회과학과 그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는 건축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건축이 갖고 있는 한계를 인정했던 것이다. 그것은 완벽한 기술로 인해 건축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과 자연환경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건물 한 켠에 있는 나무를 베지 않기 위해 나무를 감싸 안은 기적의 도서관 지붕과 햇살마저 집의 일부로 만든 ‘자두나무 집’은 자연과 공간을 구분 지어 바라보지 않고, 같은 선상에서 지켜본 그의 따뜻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새로운 건축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꿀 수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건축가의 의무와 권리를 스스로 찾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일민 미술관에서 진행된 그의 전시’감응: 정기용 건축’ 정기용은 대장암 때문에 생긴 성대결절로 인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를 이용해 건축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한다. 그의 모습은 건축가란 무엇인지를 돌이켜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정기용의 죽음 이후 찾은 무주 안성리 주민센터 앞에 모여 앉은 주민들에게 이 건물을 지은 사람에 대해 물어본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 주민센터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이 장면은 역사와 문화가 배제된 동대문 운동장 프로젝트가 자하 하디드만의 건축물이라고 말하는 정기용의 모습을 떠올려진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너무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이 영화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일년 여의 시간 동안 그와 사람들이 나눈 말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남아 ‘감응(感應)’하게 될 것이다.
*감응(感應): 정기용은 평생에 걸친 자신의 건축 철학을 ‘감응(感應)’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그에 따르면 건축에 있어서 ‘감응’이란 하나의 지형과 땅이 가진 잠재력과 그 땅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루어내는 작용과 반작용이 감성적으로 일어나는 데서 건축의 이미지나 형상이 싹트게 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