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세계에는 약 3억 명 이상의 색각이상자(색맹, 색약)가 있다. 세상의 모든 색이 다 보이는 사람에게는 단순히 ‘불편함’정도로만 생각되겠지만, 색각이상자의 65%는 이를 ‘장애’라고 느낀다.
퇴근 혹은 하굣길에 마주친 노을, 들판에 활짝 핀 꽃, 여름의 푸르른 나무,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예술 작품 등. 생각해보면 우리는 색을 통해 많은 위로와 즐거움, 감동을 받는다. 이렇게 색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색을 못 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삶의 감흥이 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의술이 아무리 발전한들, 아직 색맹과 색약을 고칠 수 있는 치료법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개선해주는 기술은 있다. 2015년에 등장한 안경
‘엔크로마(EnChroma)’는 색 보정 안경으로, 색각이상자가 보지 못했던 색을 찾아준다.
같은 색맹이라도, 증상에 따라 보이는 색이 다르다. 중앙은 황색과 적색을 구분 못하는 사람이 보는 색이며, 우측 이미지는 녹색과 적색을 구분 못하는 사람이 보는 색이다.
엔크로마 안경의 원리
색각이상자의 범위에는 모든 색을 인지하지 못해 세상이 오로지 흑백으로만 보이는 사람과, 특정한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 중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적록색맹으로, 녹색과 적색의 파장이 겹쳐져 두 색을 구별 못 하는 증상을 뜻한다.
엔크로마는 적색과 녹색이 겹치는 구간의 빛을 차단하는 ‘멀티 노치 필터(Multi-notch Filtering)’를 개발, 안경에 적용했다. 겹쳐지는 부분을 차단하면, 녹색과 적색이 구분되면서 각 색을 세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엔크로마는 특히 적록색맹에게 효과가 높다.
색 보정 안경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생긴 것은 아니다. 엔크로마 안경은 일반 선글라스와 다르지 않다.
모든 발명품이 그렇듯이, 엔크로마도 우연히 발견되었다. 도널드 맥퍼슨(Donald McPherson, 엔크로마 공동 창립자)은 개발 중이던 레이저 보호 안경을 재미로 색맹인 동료에게 씌웠다. 그러자, 동료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다양한 색을 보게 되었다. 이에 영감 받은 맥퍼슨은 색 보정 안경인 엔크로마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7년간의 긴 연구와 자체 특허 기술을 통해 탄생한 엔크로마 안경은 ‘색맹 치료’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덜어주는, ‘개선’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실제로 적록색맹의 5명 중 4명(80%)에게만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엔크로마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올라온 후기 영상을 보면, 이런 수치는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못 봤던 다채로운 세상을 보며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과학 기술의 존재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경쟁하듯이 고도의 발전을 이루는 것보다는, 작더라도 인간의 삶이 개선될 수 있도록 돕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과학이 추구해야 할 목표이지 않을까.
미국의 페인트 기업 ‘발스파(Valspar Paint)’와 엔크로마가 함께 진행한 바이럴 광고. 다양한 색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큰 감동인지를 알 수 있다. (한글자막 보기:
http://youtu.be/2cfb0OAHJlI )
엔크로마 안경은 킥스타터(Kickstarter)에 올라온, 개발 중인 제품이 아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든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쉽게 구매할 수 있다. 현재 엔크로마는 콘택트렌즈도 개발 중이다. 엔크로마를 시작으로, 앞으로 색맹 치료 및 개선에 도움이 될 제품이 더 많이 등장할 것이다. 수많은 우려 속에서도 과학 기술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