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30
사람들은 종종 아트와 디자인의 구분을 어려워한다.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뉴욕을 기반으로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매니페스토 아키텍처(Manifesto Architecture)의 안지용 공동 대표는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가 생각하는 디자이너란 현재를 둘러싼 것들에 불만이 많아 ‘문제점을 찾아내고 해결하는 사람’이다. 현재에 만족하는 디자이너는 발전할 수 없다. 디자이너는 인생이 꼬여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그는 허허 웃었다.
강연, 자료제공 | 매니페스토 아키텍처 공동 대표 안지용(mfarch.com)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매니페스토는 올해 2012년 런던 올림픽 인포메이션 센터를 설계하는 국제 공모전에 참가했다. 주제는 쉽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로 붐비며 ‘런던의 심장’이라 불리는 트라팔가 광장에 독특한 디자인의, 그리고 사람들이 잘 이용할 수 있는 센터를 지어야 했다. 버스 터미널에 기차 터미널, 유동 인구도 많은 이 바쁜 공간에서 이를 구현하는 일은 까다로웠다고 안지용 대표는 말했다. 매니페스토는 파사드에 접히는 판넬로 구조적인 모양을 만들어 보행자들의 눈에 띄도록 이 주제를 해석했다. 또한 밤에는 판넬을 내려 치안상태가 불안정하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했다.
최종 후보에까지 선정되었던 이 공모전은 매니페스토에게 또 다른 기회를 안겨 주었다. 공모전에서 최종 후보에 든 다섯 팀 중 이들만 런던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건축 그룹인데 알고 보니 이들이 노란 얼굴의 한국인이었다는 점이 매년 애틀란타에서 개최되는 디자인 박람회인 ‘모던 애틀란타’ 관계자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매니페스토는 2011 모던 애틀란타에 참가해 한국관을 설계하게 되었다.
매니페스토는 한국관을 꾸미는데 한글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만, 한글을 이용한 소품, 인테리어 등 한글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데서 벗어나,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 했다. 그 결과로 찾아낸 것이 바로 한글의 모음 시스템. 점 하나의 위치를 바꿔 ‘아’를 ‘어’로 만들 수 있는 언어, 동글동글과 둥글둥글에 큰 의미 차이가 존재하는 언어는 한글밖에 없다. 안지용 대표는 사실 대부분의 언어에서 자음은 대동소이하지만, 모음은 많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한글의 모음 시스템을 공간에 적용해보고자 매니페스토는 앞뒤가 기둥을 여러 개 배치한 부스를 만들었다. 사람이 기둥 사이를 지나갈 때, 좌측에서는 ‘동글동글’ 같은 양성모음 소리가 나오고, 우측에서는 ‘둥글둥글’ 같은 음성모음 소리가 나온다. 많은 관람객들이 이런 공감각적인 매니페스토의 해석에 즐거워했다.
카이스트(KAIST)의 김병호 IT융합센터 설계안은 매니페스토에 처음으로 미국 건축사협회 디자인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오픈 패러덕스, 즉 모순이라는 말은 ‘융합’의 모순이라는 매니페스토의 해석을 나타낸다. 화학, 물리 등 여러 공학 분야와 IT를 융합하고자 하는 카이스트의 의도에 매니페스토는 오히려 적절한 공간을 사이에 두어야 융합이 더 잘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건물 가운데에 공간을 두고 양편에 각 학과의 연구실을 두어 계단을 통해 서로 다른 학과로 자연스럽게 건너갈 수 있게 구현했다. 공모전에서 최종으로 선발되지는 못했지만 이 건물로 2011년 미국 건축사협회에서 디자인상(AIA NY Design Award)을 받았다.
미국의 MTV Networks의 스튜디오 디자인 역시 재미있는 프로젝트였다. 매니페스토는 아티스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여주는 프로그램 주제에 맞춰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듯한 디자인을 제안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미지가 아닌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이픽셀 시대의 영상과 이미지를 이용한 것이다. 문제점은 예산이 너무 적었다는 것, 그리고 촬영을 할 때마다 스튜디오를 바꿔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트 이미지는 우리가 카페에서 흔히 접하는 저렴한 플라스틱 컵을 이용하여 만들고, 배경 판넬을 접어 이동할 수 있게 해 사용성을 높였다. 이 후 클라이언트도 이 디자인에 만족해 프로그램의 아이덴티티 모두를 매니페스토의 디자인 형식으로 통일시켰다고 한다.
매니페스토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프로젝트는 자전거 주차 시스템인 바이크 행어(Bike Hanger)다. 세계의 인구는 점점 도시로 몰리고 있다.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전세계 인구의 5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2050년에는 그 비율이 70%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도시 거주 인구가 많아진다는 것은 환경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것이다. 매니페스토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자전거를 주목했다. 최근 자전거는 전세계 대도시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사용량이 늘고 있는데, 그 부작용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매니페스토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이용할수록, 자전거 주차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이미 우리도 인도를 점령한 자전거들을 쉽게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겠다고 세운 자전거 주차 타워 등의 시설이 오히려 그 건축 과정 자체에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아이러니임을 주목했다.
매니페스토의 안지용 대표는 도시의 빈공간을 찾아 바이크 행어를 세우는 아이디어를 냈다. 건물외벽에 수직으로 설치하는 바이크 행어는 자동차 주차에 드는 공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마치 관람열차 같은 모양의 바이크행어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 자전거를 주차하는 시스템이다. 이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최근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프로토타입이 제작되어 설치되었다. 무거워 보이는 외관과 달리 페달은 가뿐하게 돌아가 많은 분들이 즐거워했다고. 해외에서의 반응도 뜨거워 유럽과 중국에도 진출을 준비 중이다.
* 디자인으로 사는 세상(기획: 정소익 도시매개프로젝트 소장)은 구 서울역사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에서 진행하는 ‘카운트다운’ 프로젝트의 강연 프로그램이다. 디자인, 건축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디자인과 건축의 역할은 무엇인가. 또 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단순히 ‘디자인 만들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학적인(interdisciplinary) 방법, 다각적인 대상과 연동하는 디자이너와 건축가들과 함께 이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사이의 사회, 디자인, 도시의 변화를 읽고 있는지 들어 본다. 또한 공유, 소통, 참여, 자발적 움직임 등과 같은 오늘날의 주제에 대해 이들이 디자인을 접목시키는 방식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강연은 지난2011년 12월 6일 종료되었고, 매거진정글에서는 주요 강연에 대한 리뷰를 몇 차례 연재를 통해 선보인다.
http://www.countdown2011.org/kr/LecturePro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