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디자이너 뤼징런은 자국인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디자인을 말할 때도 빠지지 않고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다. 디자이너 본인은 손사래 칠 수도 있지만, 곧 70세를 맞이하는 뤼징런에게 이제 대가라는 말은 아깝지 않다.
현재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 이 위대한 디자이너가 38년 동안 작업한 책들을 모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전에도 뤼징런의 작품은 한국을 많이 찾았지만, 단독 전시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뤼징런이 디자인한 책들로 가득 차 있는 전시장은 생각보다 넓다. 중국 전통문화를 다룬 책부터 전집, 단행본, 포스터까지 분야를 넘나드는 총 1,000여 점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그가 얼마나 근면 성실한 디자이너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은 경험을 만드는 것이라는 뤼징런의 말처럼, 이번 전시는 그의 디자인 세계를 여행하는 것 같다. 이는 책과 책 사이 작은 간격마저 지휘한 뤼징런의 세심한 씀씀이 덕분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흔히 볼 수 없었던 단행본과 포스터들은 뤼징런의 현대적인 감각까지 엿보여 뤼징런의 또 다른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전승과 창조〉 전은 책과 포스터, 삽화까지 뤼징런의 모든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다. (사진제공: 출판도시문화재단)
그러나 〈전승과 창조〉 전에서 가장 크게 와 닿는 점은 디자이너로서 뤼징런의 생각과 인품이다. 전시장 벽 곳곳에 쓰여있는 그의 말과 전시된 작품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디자이너의 따뜻한 마음과 북 디자인에 대한 진지함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또한 함께 전시된 열 명의 제자들의 작품은 후학 양성에 힘쓰는 뤼징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많은 수는 아니지만, 각자의 개성이 느껴지는 제자들의 작품들은 단지 뤼징런이 자신의 디자인 방법론을 고스란히 후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전승과 창조-뤼징런의 북 디자인과 10명의 제자〉전의 주제인 ‘법고창신’(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에서 지칭하는 ‘옛 것’이란, 단순히 전통문화 혹은 역사만은 아닐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대가들이 과거에서 배우고 영감을 얻듯이, 이제 막 시작한 우리들도 현재를 함께 하는 대가들의 작품과 정신을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사부, 셰셰!
디자인에 대한 뤼징런의 말과 그 의미가 잘 나타난 작품들. 역시 거장의 말 한 마디에는 오랜 시간 동안 다듬고 쌓아온 그만의 정신이 담겨 있다.
#01.
“생명력이 있는 디자인을 위해서는 전통의 답습이 아닌 이를 바탕으로 한 혁신과 전승, 개척 정신이 필요하다.” - 〈전승과 창조-뤼징런의 북 디자인과 10명의 제자〉 전 ‘작가의 글’, 2016
〈주희방서 천자문〉, 1999
서예의 대가 주희가 쓴 천자문을 복원한 책. 초기 협판장정의 방법을 구현한 케이스는 조각한 목판의 좌우 끝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연결한 것이다. 책 표지는 세 가지 단색 종이를 사용, 한자의 점과 왼쪽 삐침, 오른쪽 삐침을 확대하여 인쇄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디자인은 현대적인 감각과 예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책을 탄생시켰다.
〈회도 오백 나한 해석〉, 2010
과거 책의 형태인 두루마기 방식으로 만들었다. 두루마기 책에 적힌 내용을 일반적인 형태의 책으로도 제작하여 수집과 독서가 모두 가능하도록 디자인했다. 뤼징런은 책의 첫 번째 목적은 ‘읽는 것’으로, 북 디자이너는 책 속의 정보를 아름답고 정확하게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02.
“책 한 권은 디자이너가 저자와 소통한 뒤 편집, 일러스트레이션, 글자체, 출판, 인쇄 등 여러 분야를 고려하고, 끊임없이 검토하고 수정해 완성하는 것이다.” - 〈서적설계〉 제 10호, 2013
〈회수아물: 쑤저우합죽선〉 (양장본), 2010
중국 쑤저우 지역의 전통 부채를 다룬 책이다. 부채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책을 만들기 위해의뢰인을 설득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등 제작 기간에만 5년이 걸렸다. 이렇게 뤼징런은 좋은 디자인을 위해 책의 콘텐츠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북디자이너가 되기 전, 뤼징런은 문학 작품의 표지와 삽화를 그렸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많은 것을 ‘경험’으로 배울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뤼징런은 여전히 배움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워나간다. 뤼징런이 최고로 인정받는 이유는 실력뿐만 아니라 작은 것에서도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자세 때문이지 않을까.
#03.
“북디자이너는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함은 물론 전달 수단인 책의 형태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문자, 도상, 색채, 재료, 시간)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해야 한다.” - 〈북+디자인〉, 2008
〈경제학 번역총서〉, 1999
뤼징런의 디자인 특징 중 하나는 책의 내용을 추상적 아이콘으로 재해석하고 표현한다는 점이다. 〈경제학 번역총서〉에서는 경제의 벡터 개념을 재해석한 화살표와 직선, 곡선 등의 부호를 시각 요소로 사용했다. 각 권을 대표하는 추상 부호는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Ingenuity Follows Nature, 2011
스기우라 고헤이에게 정보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배운 뤼징런은 북 디자인만큼 인포그래픽 디자인도 수준급의 실력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뤼징런이 작업한 인포그래픽 포스터도 볼 수 있는데, 전통적인 북 디자인과 달리 현대적이고 트렌디한 감각이 느껴진다.
#04.
“북 디자인은 정보 전달만 하는 평면적인 단계가 아니므로 디자이너는 텍스트 정보를 읽는 디자인 구축 의식을 가져야 하며, 감독처럼 수많은 페이지 속에서 시간, 공간, 리듬으로 언어와 어법을 구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전승과 창조-뤼징런의 북 디자인과 10명의 제자〉 전 ‘작가의 글’, 2016
〈메이란팡 전집〉, 2001
북 디자인은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책장을 닫을 때까지의 경험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책의 모든 요소를 동원하여 일관된 경험을 전달해야 한다. 뤼징런은 책을 3차원으로 인식하여 다양한 디자인을 시도하는데, 특히 〈메이랑팡 전집〉은 책배까지 특별한 기능을 넣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좌우의 접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이미지는 경극 배우 메이랑팡의 두 가지 삶을 다룬 책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05.
“이번 자리가 서로의 미흡한 부분을 좋은 부분으로 메우는 자리 같다. 우리가 서로 교류하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해나가 큰 둘레가 생기면 이것이 동양이 될 것이다.” - 〈2011 타이포잔치〉 디자인정글 인터뷰, 2011
뤼징런은 스기우라 고헤이, 안상수 등 여러 디자이너들과 교류하며 동아시아만의 공통된 무엇을 찾고자 노력한다. 각 문화의 개성을 지키면서 동양적 스타일로 통합하려는 뤼징런의 모습은 여전히 서양의 영향력이 강한 디자인 세계에서 아시아 디자인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에 큰 기초가 될 것이다.
자료제공_ 출판도시문화재단
참고자료_ 〈북+디자인〉(2008), 〈세계의 북 디자이너 10〉(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