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 (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 | 2016-07-01
‘돈을 위해서 사람들이 하는 일(원제: What People Do For Money)’. 매 2년마다 유럽 여러 도시로 번갈아가면서 개최되는 마니페스타 현대미술 비엔날레가 내세운 대제목이다. 올해로 11번째 열리는 마니페스타 비엔날레 행사는 올해에는 스위스 취리히를 전시 배경 도시로 설정했다. 때마침 바로 올 6월 초 스위스 정부는 일을 하든 안 하든 직업이 있든 없든 국민이라면 누구나 월 300만 원 가량의 최저생계비를 지급하는 안을 국민투표로 부쳤다가 국민의 4분의 3 이상이 반대하여 부결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글 | 박진아 (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
일을 하지 않고도 공짜 돈을 받는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5년)에서 썼듯이, 소명을 받들어 열심히 ‘일’해서 부를 축적한 개인을 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라 본 개신교 문화권의 현세적인 스위스 국민 대다수에게 공짜 최저생계비 제도는 의구스러운 개념인 듯하다. 비교적 안정된 고용률과 고 생활비 대비 고임금이 보편화된 스위스를 포함하여 구미의 산업국가에서 단순 노동직 분야의 실업률과 그 결과 국가 사회 보장망에 의존하는 인구도 지속적인 증가 추세에 있다. 특히 저 숙련 노동 분야일수록 자동화 기계와 로봇 팔다리가 인간 노동자의 일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봄 3월 바둑 기사 이세돌 9단이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패배한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이하 AI)에 대한 충격과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그에 대한 호응으로 지난 6월 9일 특허청 주최로 열린 제6회 지식 재산권 및 산업보안 콘퍼런스에서는 조만간 인공지능이 인간의 정신노동도 대체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구글 엔지니어링 디렉터는 2029년이 되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할 것이라 예측한다.
인류 미래의 언제가 AI는 인류가 그동안 축적해 온 지식과 사고하는 방식을 다 깨우치고 그 어떤 천재 인간도 너끈히 능가할 날이 올 것은 분명하다. 미래, 기계나 로봇이 할 수 없는 인간만이 지닌 고유의 속성과 능력을 요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자는 자연 도태될 것이다. 프로그램화된 인공지능이나 기계가 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인간만이 지닌 자질(quality)과 능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만이 지닌 판단력과 사리분별력에서 나오는 창조력(creativity)과 머릿속 생각을 손동작으로 전환할 줄 아는 공작 인간(homo faber) 능력이다.
정치이론가 하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동물은 노동하고, 인간은 제작한다(Animal laborans, Homo faber)’고 근대 인간의 숙명을 표현했다. 여기서 노동이란 특히 공장식 대량생산체제 속에서 틀에 박힌 업무를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고역을 뜻한다. 반대로 진정한 의미의 일은 개인이 능동적으로 구상하고 숙고한 생각을 손과 육체를 이용해 물리적인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제작 활동을 말한다. 무릇 소명을 깨닫고 일에 열심히 임하는 자는 장인정신을 지녀야 한다. 여기서 장인정신(craftsmanship)이란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훌륭한 작업을 마치는 것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 태도이며 철저하게 일에 임하고 완수하는 전념(hard work)과 헌신(dedication)을 뜻한다.
장인정신을 실천한다 함은 누구나가 예술가가 되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말콤 글래드웰이 쓴 책 <아웃라이어(Outliers)>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이른바 ‘만 시간 법칙(The 10,000 Hour Rule)’에 따르면 인간은 일평생 중 한 가지 기능을 연마하는데 일 만 시간을 충실하게 투여하면 달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과거 중세 유럽의 길드 조직에 속한 수련공과 중국 예술가들은 선대의 훌륭한 스승의 작품을 모방(imitation)하고 반복(repetition)하는 수련을 통해서 기술을 연마하고 쌓은 재주가 스승을 능가할 정도가 되면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는 안목과 기량을 축적한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인간의 두뇌를 배워 마스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20세기 산업사회가 도래하고 기계화와 대량 복제 생산체제가 가능해져 값싼 대중 일상용품이 흔해진 이후로 장인정신의 의미는 많이 소실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경제재건과 성장에 주력한 미국과 유럽에서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한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 경제체제를 구축하게 되면서 일상용품을 대량생산하여 가능한 한 다수의 대중이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여 활용할 수 있는 공장 체제로 경제성장을 지속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현대인들은 일상용품의 민주화와 물질문명의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산업디자이너는 포드식 공장 대량생산 방식으로 똑같은 공산품을 다수로 찍어 낼 수 있는 산업 생산방식을 위한 템플릿을 고안하는 일을 담당했다. 덩달아서 대량소비재가 적당히 잘 작동하고 모양도 좋게 디자인하는 산업디자인 분야와 디자이너직은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광고와 더불어서 20세기 후반기 경제성장기 큰 각광을 받았다.
그 사이 장인과 공예가는 생산단가와 생산속도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이 뒤떨어졌고 시장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상실했다. 어디 그뿐인가. 1950년대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기능주의와 예술성 사이를 오가며 나름 독자적 영역을 구가하던 디자인은 1990년대 중엽 이후부터 마케팅이라는 비즈니스 경영 분야로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은 급격히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 자기주도적일 일, 창조적인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며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게 되었다. 자연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디자인은 전에 없이 인기 있는 전공분야가 되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직업세계로 진출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시대에 뒤처진 디자인 교과서와 커리큘럼에서 배운 것과 오늘날 경제 현실이 매우 다름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구미권의 탈산업화와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된 오늘날, 실무 디자이너가 디자인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에 취업하여 만들고 싶은 제품을 디자인하고 제품으로 실현하는 일은 하늘에 별 따기가 되었다. 아이디어 프로토타입 이나마 상업 갤러리에서 소개하고 판매할 수 있는 기회도 소수의 선택된 유명 상업주의 디자이너가 아닌한 어렵고 디자이너들간의 경쟁도 심해졌다.
탈 제조업 위주의 현 경제체제 속에서 아이디어를 제품화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바짝 줄어드면서 요즘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대학에서 배운 획일적(one-size-fits-all) 대량생산식 산업디자인 방식에서 한 발짝 비껴나서 다시금 조심스럽게 공예적 생산방식과 커스터마이제이션(customization) 트렌드를 디자인으로 포용하고 있다. 구미권에서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는 메이커 운동(maker movement)과 발명가 운동(inventor movement) 이같은 추세를 반영한다.
일명 ‘디자이너-메이커(designer-maker)’혹은 ‘장인으로서의 디자이너(designer as craftsman)’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것에서도 미루어 볼 수 있듯,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은 아이디어의 생산 가능성이 자꾸만 좁아지고 있는 현실을 한탄만 하는 것을 접고, 직접 재료를 구하고 작업실에서 갈고닦고 두드리고 용접하는 장인적 기술을 연마하여 직접 소량 생산하고 자체적인 유통망을 구축해 판매한다.
예컨대 penccil(penccil.com/superprojects.php) 같은 예술 프로젝트 소셜네트워크 사이트는 국제적 다국적 제품 제조업체나 화랑에 소속된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착상하고 스케치하고 고안하고 제작 완성한 디자인 제품을 직접 만들어 선보이는 디자이너-메이커도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판매할 수 있는 통로를 제시한다. 그런가 하면, 기존 유통망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라이프스타일 생산 판매업체들도 수공예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예컨대 일본 무인양품(MUJI) 숍은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 동안 뉴욕 색스 피프스 백화점 무인양품 플래그숍에서 일본 수공예 장인들이 한정수량으로 제작한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다타주마이 컬렉션 전시를 열어 최근 부쩍 디자인이 독특하고 품질이 우수한 수공예품을 찾는 소비자 트렌드를 반영한다.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C. Wright Mills)가 지적했듯, “장인정신을 갖고 일하는 자는 일 그 자체와 일에 대한 목표 그 자체에 사로잡혀 작업한다. 일에 임하는 것 자체에서 얻는 만족감이 바로 보상이며, 일을 하는 동안 관여되는 모든 디테일은 일하는 자와 그의 정신 사이에 오간 사고의 연 끝에 부산된 결과물이다.”예컨대 거장 현대 건축가 렌초 피아노(Renzo Piano)도 매번 건축 프로젝트에 임할 때마다 수없이 많은 아이디어 스케치, 콘셉트 드로잉, 건축 모형 만들기를 되 반복한 끝에 스스로 만족할만한 결과물에 이른다고 말했다.
좋은 식재료로 정성과 시간을 들여 조리한 음식을 먹고 난 후 만족감을 느끼듯, 좋은 재료로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잘 만든 물건을 아껴 쓰고 고치고 보관했다가 또 쓰고 심지어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퀄리티 물품을 사용하면서 사용자는 한결 존중받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공예 정신과 장인적 손길을 통해 탄생한 장인 디자인은 공장 생산된 저렴한 대량 생산 소비재에 비해서 현격하게 가격이 비싸고 따라서 일반 대중 소비자들이 손쉽게 구하고 취하는데 심리적, 경제적 장애와 부담을 주는 하이엔드(high end) 고가품이다.
그러할진대 공예 정신과 장인정신이 깃든 품질 위주의 제품을 추구하고 갈구하는 소비자는 소수에 머물 것이다. 수억 명 인구 절대다수는 대량생산된 저렴한 대중적 상품 생산에 종사하며 생계를 꾸리고 또 그렇게 생산된 저렴한 대중적 상품을 동경하고 구입해 즉시 취하고 싶어 한다. 20세기 경제체제가 굳건히 구축해 놓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식 글로벌 경제체제는 하루아침에 양보다는 질을 우선하는 공예 기반 경제로 변할 리도 없을 것이다. 대량 공장 생산된 저렴한 대중 상품은 분명 가격 면에서나 손쉽고 즉각적인 소비자 욕구와 심리 충족이라는 측면에서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을 잘 수행해 낼 수 있는 자유와 그 경험을 연결시켜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소속된 공동체의 이익이나 윤리적 이유를 들어 일을 강요하거나 과도한 경쟁을 동기유발로 삼는 것은 장인정신에 해롭다고 <장인(The Craftsman)>(2008년간)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리쳐드 세넷(Richard Sennett)은 경고한다. 살바도르 달리의 <50 Secrests of Magic Craftsmanship(마술적인 공예정신으로 이르는 50가지 비밀)>은 자기중심적이고 기이한 미술가의 캐릭터적 특성에 담긴 특이함과 동시에 예술적 기질이 실현되기 위해 필요한 날카로운 통찰력, 유머 감각, 자유로운 영혼, 패션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에 대한 자기만의 철저한 직업정신을 담고 있다.
장인적 디자인 접근법을 취하기로 결정하는 디자이너는 뼈를 깎는 연마와 지루한 반복 연습을 거칠 것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귀찮아하고 게으름이 당연한 라이프스타일 태도가 된 현대문화 속에서 이 같은 말은 너무도 이상적이고 시대착오적 미사여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일 자체에 대한 철저함과 자부심은 노동에서 얻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자 보상이지만 또한 1) 그에 대한 경제적·재정적 댓가를 협상하고 지불받아야 한다는 인간 기본적인 원칙을 잊지 말 것, 2)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분명하다면 그에 적당한 댓가를 협상하고 보상받을 수 있는 능숙한 세일즈맨적 기술도 연마할 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장인의 몸값은 장인 스스로가 노력하여 얻어내는 전략과 노력의 과실이다.
하지만 기계문명과 손쉬움의 문화가 낳은 단순 반복과 싸구려화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살고 싶은 개인이라면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전설적인 대장공 헤파이스토스(Hephaestus, 로마신화 명은 불칸(Vulcan))의 철학을 재고해 볼 때가 되었다. 어차피 십수 년 내 후 미래엔 웬만한 일자리는 로봇들이 차지해 갈 것이고 인공지능이라는 판도라 박스의 재앙을 이겨낼 수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