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피서울 | 2016-06-07
유난히 바람이 차갑게 부는 날이었다. 아주 약간의 햇빛조차 반갑게 느껴지던 저녁 무렵, 이태원 이슬람 사원에서 골목을 따라가다가 만난 햇빛은 그래서 더욱 정겨웠다. 따뜻한 햇빛 같은 두 남자, 햇빛서점의 운영자 박철희와 햇빛스튜디오의 대표 박지성을 만났다.
기사제공 | 타이포그래피서울
햇빛서점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박철희(이하 철희): 게이로 정체성을 확립했지만, 막상 애인과 만나려니 내가 게이임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술집, 클럽 등 업소가 대부분이고 낮에 즐길 수 있는 마땅한 게이 플레이스가 없는 게 아쉬웠어요. 친구들에게 게이라고 커밍아웃하니까 되게 신났었어요. 사람들 앞에서 제 모습 자체로 있을 수 있으니까요. 홀가분하기도 하고요. 원래 우울한 성격이었는데, 뭔가 매듭이 풀리는 것처럼 좋았어요.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웃음). 그래서 낮에 열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퀴어서점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서점을 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철희: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면서,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는 곳이 서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서점의 기능만 생각한 건 아니에요. 워크숍도 하고, 출판 기념회도 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커뮤니티 같은 걸 꿈꿨지만, 월세나 현실적인 사정 때문에 장소가 좁아졌어요. 현재 햇빛스튜디오도 같이 쓰고 있는데 처음 생각했던 건 훗날의 목표로 남겨 두고, 일단은 서점만 운영 중이에요.
생각으로만 멈추지 않고 시작해서 좋은 점이 있을 것 같은데 시작하니까 어떠세요?
철희: 이 근처는 이슬람 사원도 있고 교회도 있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곳인데, 종교적인 이유로 린치 같은 게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됐어요.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축하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게 좋아요.
서점 운영이 만만치 않을 것도 같은데요.
철희: 사실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어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었지 공간 운영이라는 것도 해본 적 없었고요. 아직 서점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게 많죠. 진짜 서점처럼 매일매일 재고 체크하고 판매를 관리하는 본격적인 일은 못 하고 있고요. 지금으로선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에 관련된 책이나 물건을 갖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던 분들한테 도움이 되기를 바라죠. 현재는 학교에서 행정 조교로 일하고 있어서 주말에만 열고 있어요.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돈, 명예, 성공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묵묵히 본업을 수행함으로써 미로와 같은 인생을 헤쳐 나간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그래서 평생 지속하는 과업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누구보다 그것을 예민하게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햇빛스튜디오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박지성(이하 지성): 스튜디오는 둘이 의기투합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제가 먼저 철희에게 하자고 했어요. 저는 혼자 하는 것보다 누가 옆에 있어야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스튜디오를 한다면 맞는 사람이랑 하고 싶고, 하고 싶은 일 하고 싶고, 서포트도 하고, 서포트도 받고 싶었죠. 생각을 주고받고 대화로 풀면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인데 철희랑은 대학 때부터 기숙사도 같이 쓰고 동아리 활동도 같이 하고 오래전부터 잘 맞았어요. 결정적 이유는 주변에 아는 친구 중에 철희가 디자인을 잘했다는 점이죠(웃음).
두 분은 어떤 점이 잘 맞으세요?
지성: 철희도 서점 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혼자 월세 내기는 부담스러우니 햇빛서점에서 같은 이름을 쓰는 스튜디오를 만들어 공간을 같이 쓰는 느낌으로 시작해보자 한 거죠. 여기는 여름에 공사를 했는데, 공사할 때 합이 잘 맞았어요. 아직은 철희가 학교에 있으니 풀타임으로 일하는 건 4월부터일 것 같아요. 지금은 평일에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웃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스튜디오를 꾸리고 싶으세요?
지성: 지금도 스튜디오로 일이 들어오면 같이 하긴 하는데 모든 과정을 같이 하는 편은 아니에요. 의뢰받으면 아이디어랑 시안은 같이 만들고, 누군가의 것이 선택되면 그쪽에서 진행하는 형태로 했어요. 아직은 홈페이지도 없는데 홈페이지부터 만들고 스튜디오 형태가 갖춰지면 홍보를 할까 해요. 크리스마스나 새해 같은 기념일에 엽서를 만들어 보내거나, 혹은 특별히 기념 카드를 보내지 않는 날들, 예를 들어 식목일, 어린이날, 노동자의 날 등에 맞는 카드를 만들어 스튜디오 홍보 겸 재미 겸으로 작업해 여기저기 보내보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어요.
특별히 하고 싶은 작업이 있으신가요?
지성: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해요. 흥미로운 일이 들어온다고 해도 기술 쪽은 아니니 저희 포지션에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건 전시 디자인이나 아이덴티티 작업 등 정통적인 그래픽 디자인이죠. 그래도 조금씩 확장하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클라이언트 일을 하면서도,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만든 굿즈나 아이디어 상품들을 만들어 판매하는 등의 자체 기획을 병행하고 싶어요.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바람은 쌀쌀했지만, 마음은 훈훈했다. 햇빛이 세상의 모든 장소를 편견 없이 골고루 비추듯 자신의 정체성이 LGBT든 아니든, 이슬람교도이든 기독교도이든 불교도이든 힌두교도이든 혹은 종교를 갖지 않았든, 생명을 지닌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어떤 차별도 없기를.
스튜디오와 서점을 시작한 이후 두 분에게 생긴 변화가 있다면요?
철희: 둘이 아이디어 회의를 같이하는 거. 그리고 작업실 생긴 것 자체가 좋아요. 예전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했었거든요.
지성: 작업실이 생긴 게 제일 좋죠.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자기 공간이 있다는 건 확실히 안정감을 줘요. LGBT 관련 서점 안 작업실에서 남자 둘이 같이 쓰니 제가 철희와 사귀는 줄 오해하는 분도 계시지만요. 철희가 게이라고 당당히 밝히듯 저는 게이가 아니라고 당당히 밝힙니다(웃음).
철희: 서점에 오시는 다양한 분들을 만나는 게 좋아요. 햇빛서점이 있다는 걸 알고 오시는 분도 있고, 지나가다 그냥 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간판과 인테리어 예쁘다고 들어오시기도 하고. 신기해하시는 분도 있고, 어? 하며 나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꼭 만취해서 온 손님이 동화책을 사가세요(웃음). 그런 경험 하나하나가 다 재미있어요.
지성: 원래 기획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은 더 생각하게 돼요. 디자이너도 회사를 운영하면 기획력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클라이언트 일 외에 자체 프로젝트도 팀의 발전과 일하는 재미를 위해 필요한 것 같고요.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철희: 맞아요. 아직은 해온 작업이 적으니 하고 싶은 게 더 많지요. 그런데 예전에는 지향점도 많았는데 요즘엔 길을 잃은 것 같아요. 한글 타이포를 잘 사용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형태를 잘 사용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지성: 저희가 했던 작업 <서울 바벨>이 희망 사항이에요. 아직은 미래형의 것들이 더 많아요. 지금까지 해온 게 성공만 한 것도 아니고요.
지금 현재의 두 분 모습은 고민도 있어 보이네요. 그래서 더 진솔하게 보이고요.
철희: 예전보다 디자인을 덜 좋아하게 된 것 아닌가 싶어요. 학생 때는 너무 재미있고 신났었거든요. 요즘엔 공부를 안 해서 그런가?(웃음) 어떻게 보면 서점도 딴짓이라고 볼 수 있죠. 디자인 말고는 하고 싶은 게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다른 것도 하고 싶고, 그렇게 됐어요.
지성: 예전에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은 그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여전히 하지만 어떤 점에 대해선 덜 고민하게 된 점도 있고요. 꼭 쥐고 있던 걸 내려놓은 듯도 하고, 아직 이거다! 라는 걸 찾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
서로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한데 이번 기회에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본다면요?
철희: 지성 형은 머리 회전이 빨라요. 협업을 많이 해서 그런지 기획하고 분배하고 행동하는 걸 잘해요. 저는 말을 별로 하지 않고 끄적이며 손을 움직이는 편이거든요.
지성: 철희는 장인정신이 있어요. 자기만의 고집이랄까. 저는 원하는 게 있으면 빨리 말을 하고, 진행을 하는데 철희는 비주얼만 봐도 자기 스타일이 있지요(웃음).
철희: 지성 형은 인간적인 매력이 있어요. 지나치게 남성적인(?) 마초적인 면이 없어서 일하는 게 편해요. 앞으로 서로 맞추며 부족한 부분 채워주며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참! 서점 안에서 나 몰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데, 안 피웠으면 좋겠어(웃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형은 살 빠지면 지금보다 몇 배는 멋있을 거예요.
지성: 담배는…(웃음). 철희는 목소리가 좋아요. 분위기 있는 거 좋아하고. 디자인할 때 현학적이거나 배배 꼬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하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 ‘사랑을 표현하는데 핑크 하트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라고 어떤 인터뷰에서 말했었잖아(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