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 (디자인평론가·미술사가, jina@jinapark.net) | 2016-03-29
“아름다움은 어리석은 자를 슬프게 하고 현명한 자를 유쾌하게 만든다(Beauty makes idiots sad and wisemen merry.)”라고 미국의 무대예술 평론가이자 문필가 조지 네이턴(George Jean Nathan)은 말했다. ‘용자가 미인을 쟁취한다’는 서양속담처럼 아름다움은 분명 보는 이를 사로잡고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대담한 도전도 감내하게 하는 영감의 묘약이다. 반대로 지독하게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파멸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고대 트로이 왕국의 파리스 왕자는 적군 스파르타 왕의 아내이자 절세의 미인 헬레나 여왕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납치하여 트로이 전쟁의 불씨를 만들고 끝내 트로이 왕국을 멸망시키기에 이르지 않았던가.
글 | 박진아 (디자인평론가·미술사가, jina@jinapark.net)
쿠퍼-휴잇 디자인 트리엔날레(Cooper-Hewitt Design Triennial)는 2000년도에 처음 설립되어 런칭한 이래, 올해로 5회째를 맞으며 국제 디자인계의 방향을 제시하는 주요행사 중 하나가 되었다. 올해는 전 세계 곳곳에서 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63명을 초대해 그들이 선보이는 작품 250여 점이 이 박물관의 1, 2층 전시공간을 장식하며 지난 2월 11월부터 대중 관객을 상대로 개막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기존에 이미 건축 및 디자인 시장에 소개돼 성공사례가 된 디자인 제품을 취합해 보여주는 형식을 피하고, 그 대신 행사 조직 위원회가 선별한 전 세계에서 골고루 선별한 디자이너들에게 아직 소비자 시장에 소개된 적 없는 신 콘셉트나 아이디어를 별도로 의뢰해 이를 프로토타입으로 제작하여 보여주는 ‘프로젝트’ 형식으로 기획되었다는 게 특징이다.
이번 디자인 트리엔날레 행사가 내세운 대주제는 ‘아름다움(Beauty)’이다. 한데 지금 뜬금없이 다시 왜 아름다움인가? 오늘날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뜻하나? 모더니스트들 사이에서 없어도 될 군더더기 장식성 혹은 기능에 장애가 된다고 믿겨온 아름다움도 용도나 쓸모가 있단 말인가? “디자인이란 문젯거리를 해결해주는 실용적인 분야이지만 또 한편 인간의 정신을 자극하고 감각을 민감하게 건드리는 미적 요소를 지니기도 한다”고 이 전시를 기획한 엘렌 럽튼(Ellen Lupton) 큐레이터는 제안한다. 어쩔 수 없이 디자인이란 기능성과 아름다운 외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만 하는 전문분야이기 때문이다.
인류 초기부터 19세기 낭만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려 애썼다.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 따르면 태곳적부터 인간에게 아름다움 즉, 눈으로 봐서 기쁨을 느끼는 감각이며 또 취하고 싶게 행동하게 하는 적자생존적 우등 조건이었다. 심리학자 낸시 에트코프(Nancy Etcoff)가 쓴 책 〈미인생존(The Survival of the Prettiest)〉에도 설명되어 있듯 인종적·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선호하는 보편적인 미인형은 존재한다는 연구결과는 그 가능성을 입증한다.
인문주의적 사고를 시작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아름다움(beauty)이란 진리(truth)와 선함(goodness)과 더불어 최고의 삼대 미덕(진선미, 眞善美)중 하나였고 모든 예술가가 추구하던 보편적 가치이자 최고의 이상(理想, ideal)이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심포지움〉 책에서 아름다움을 사랑과 연관 지어 설명했는데, 특히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은 단순히 바라보는 자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달리 평가되는 주관적 인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황금비율’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부합하는 보편적인 진실이며 고귀한 미덕이라고 보았다. 그로부터 약 100년 이후 유럽에서 특히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정점으로 예술가들은 그리스 시대의 고전주의 개념을 부활시켜서 아름다운 그림, 조각, 음악적 선율, 무용 동작을 갈구하며 만물의 창조주 신의 완벽한 아름다움의 경지에 버금가겠다는 정신으로 미를 추구했다.
아름다움이 더 이상 우수한 미술과 디자인 작품을 판가름하는 핵심 요건에서 밀려나게 시작한 때는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초엽이다. 근대미술은 아름다움의 추구는 전통적인 미적 취향이나 미의 기준은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이며 심지어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염치없는 구시대적 산물로 배척했다.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시각예술계에서는 기능성과 참신성이 보기 좋은 겉모양이나 장식적 요소보다 더 중요한 미덕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그 결과 미술가들은 보다 독특하고 파격적인 개념을, 디자이너들은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 혹은 사용자에게 새 기능을 제시하고 소비행동 변화를 유도할 ‘혁신’을 ‘미’보다 더 우위의 가치로 여겨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미술과 디자인을 창조하는 크리에이티브 집단 내에서 아름다움을 디자인의 핵심 요소로써 추구하려는 자들과 아름다움의 추구를 멸시하는 두 입장 사이의 간극은 좁히기 어려운 정치적 견해차로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사이에 놓인 소비자 및 사용자들은 그 양극 스펙트럼 사이에서 저마다의 미적 감수성과 미의 개념을 구현시킨 제품과 서비스를 시장에서 만나고 또 지갑을 열어 구입하게 될 것이며 소비자·사용자들이 한푼 한푼 쓴 돈으로 표현될 시장 내 선택의 결과는 더욱 광범위한 디자인 트렌드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현재와 가까운 미래, 현대인의 머리와 오감을 자극할 21세기식 아름다움의 종류를 7가지로 구분해 이번 트리엔날레 전시를 구성한다.
1. 호화미(Extravagant): 호화미는 호화로움, 사치스러움, 낭비적이고 과도한 외양은 글래머를 발산하고 유혹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남의 눈길을 끌기에 가장 효과적인 아름다움이다. 과시적 럭셔리 디자인은 오늘날까지도 패션 디자인 분야가 주도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인간의 얼굴을 바꿔주는 메이크업 예술과 헤어디자인, 보기에 화려할 뿐만 아니라 만지고 냄새 맡고 맛까지 나는 범 감각적 패션이 주요 사례로 전시된다.
2. 섬세미(Intricate): 감탄을 자아낼 만치 능수능란한 수공기술과 결과물의 외형은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도 숙련된 공예가나 장인의 손에서 단일 혹은 소량으로 빚어진다. 특히 초호화 고급 직물디자인과 패션디자인분야, 고급 단편 주방용품 등은 이런 방식으로 소량생산되고 있다.
3. 영묘미 (Ethereal): 어떤 디자이너들은 영구적 디자인을 창조하기 보다는 덧없는 일순간 또는 순간적인 효과를 디자인한다. 예컨대 냄새 디자인은 최근 실험적인 현대미술 분야에서는 물론 제품 마케팅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분야이며,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한 디지털 디자인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순간적 요소를 취해 형태를 가미해주는 디자인 분야다.
4. 초월미(Transgressive): 이 전시는 기성 사회의 미의식, 남녀 성 구분, 장르, 행동에 도전하며 관객의 상식에 도전하는 것에서 초월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선언한다.
5. 인공미(Emergent): 여기서 인공미가 담긴 디자인이란 자연에 담긴 코드와 수학적 알고리즘을 디자인으로 포섭하여 인간 세상에 반응할 수 있는 새로운 하이브리드 인공 생명체를 창조해내는 미래주의적 시야를 뜻한다.
6. 원초미(Elemental): 원초미에 호소하는 디자인은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초 재료를 선택하는데 우선 주안점을 두어 매우 기하학적이고 정제된 스타일로 디자인된 제품을 뜻한다.
7. 변형미(Transformative):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과거 친숙하던 소재, 조형언어, 형태에 혁신적인 소재나 테크닉을 가미해 전혀 다른 새로운 사물로 재탄생할 수 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가진 디자인은 그 자체로 흥미 있는 스토리텔링 요소도 담고 있다.
“아름다움”이라 이름한 이번 트리엔날레는 그런 보편 건전한 감수성을 지닌 일반 대중 관객들에게 짜릿한 전율을 느낄 만한 진짜 ‘아름다운 디자인’을 보여주고 미래의 아름다움은 이런 것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을까? 꼭 위대하다고 알려진 명작 미술작품을 앞에 두고 몰입해 작품 감상을 해야만 고고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요하고 평온한 자연 경치, 균형과 조화가 잘 맞게 만들어진 일상적 사물이나 환경, 예쁘고 매력적인 사람 얼굴을 마주치면 아름답다는 감흥과 쾌감을 느낄 능력을 본유적으로 타고났다.
미국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가 저서 〈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The Blank Slate)〉에서도 썼듯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창조적 가능성을 확장하고 이론 생산에는 성공했지만 관객들에게 아름다움과 시각적 쾌락을 선사하는 데엔 사실상 실패했던 문화 엔지니어링 프로젝트였다.
어쩌면 18~19세기부터 불거진 유럽 계몽주의가 이후 모더니즘 사상의 기초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철학자 칸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근원적으로 존재가 지니는 기능(function)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것이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인지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엉치뼈가 높이 솟아있고 허리가 아래로 아치형으로 굽은 말의 체형은 인간에게는 곱지 못할 체형적 조건이지만 사람을 태우고 달려야 하는 말이라는 동물이 가지면 바람직한 조건이며 따라서 그런 체격 조건을 한 말이 아름다운 말이 된다는 논리다. 그런가 하면, 철학자 니체는 〈우상의 황혼(Twilight of the Idols)〉이라는 책에서 미에 관한 한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완벽한 미의 표준이라 여기며 … 마음 깊이 스스로를 우상시하려 든다’고 지적하며 인간의 자아도취적 성향(narcissistic)을 지적하며 인간이 세상과 예술을 보는 척도가 되었던 그리스 철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의구심을 품었다.
결국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있다(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는 서양 속담과 ‘제 눈에 안경’이라는 우리 속담처럼, 자유의사와 개인 취향이 보장된 오늘날 미의 기준은 상대적이고 미를 구분하는 취향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미추를 가르는 보편적 규율이나 일률화된 법칙도 없다. 수천 년 여러 인류 문명권에서 탄생시킨 미술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듯, 아름다움의 근거는 사회적·문화적·역사적 배경과 근거하고 있으며 따라서 미적 표준과 기준은 하나가 아니며 시대적으로 변화하는 것임을 뜻하는 것일게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자칫 비슷비슷한 대중매체나 광고 이미지에 접하면서 유형화된 이미지를 아름답다고 여기도록 이끌리고 있지는 않은가? 현대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장소, 문화권이 제시하고 권유하는 강요하는 미의 기준으로부터 영향받기 마련이며, 특히 대중매체로 만사와 시시각각 둘러싸여 지내는 현대인들의 시각환경은 몇몇 유행선도자(taste maker)들의 주도로 인위적으로 구성되고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 일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미래 시대, 아름다움의 개념과 기준은 지금보다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그리고 나도 그러한 미래의 미의 기준에 동의하는가? 미국 국립 스미소니언 박물관 산하 쿠퍼-휴잇 디자인 박물관에서 열리는 쿠퍼-휴잇 디자인 트리엔날레는 오는 8월 21일까지 전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