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5
얼마 전 서울시립대 정석 교수가 쓴 <꽃보다 ‘로컬 할배’>라는 칼럼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눈길이 멈췄다.
“서울에선 은퇴자로 분류되던 나의 해묵은 경험이 로컬에선 대체 불가한 보물이 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우리 디자인계의 시니어 디자이너들을 떠올렸다.
<서울에서는 은퇴자, 로컬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
우리 디자인계에도 이제 60대, 70대에 접어든 1세대, 2세대 디자이너들이 적지 않다. 대한민국에 ‘디자인’이라는 말조차 낯설었던 시절부터 기업의 로고를 만들고 제품과 포장, 광고를 디자인하고, 도시와 공간의 이미지를 만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30년, 40년 동안 현장에서 경험한 것은 단순히 디자인 기술만이 아니다. 좋은 디자인과 실패한 디자인을 수없이 보았고, 기업과 소비자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클라이언트와 협업했다. 프로젝트가 왜 성공하고 왜 실패하는지도 몸으로 배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한발 물러난다. 참 아까운 일이다.
젊은 세대가 AI와 디지털 기술, 새로운 트렌드와 감각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면 시니어 디자이너에게는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판단력이 있다. 문제는 그 경험을 어디에서, 어떻게 다시 활용할 것인가이다. 필자는 그 답 가운데 하나가 ‘로컬’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니어 디자이너 역시 도움을 주러 지역에 내려가는 사람만은 아니다. 지역이라는 새로운 현장에서 다시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경험을 다시 사용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또 다른 전성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 (사진: AI생성)
<지역에는 아직 디자인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전국의 작은 도시와 농촌을 다니다 보면 디자인이 필요한 곳이 너무나 많다.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면서도 제대로 된 브랜드가 없고, 훌륭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관광객에게 보여줄 이야기가 없다. 수십 년 된 가게에는 역사가 있지만 그것을 브랜드 자산으로 만들지 못하고, 빈집과 폐창고는 늘어나는데 새로운 용도를 찾지 못한다. 지역축제는 해마다 비슷한 프로그램과 홍보물을 반복한다.
이것은 간판 하나, 포장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자원을 발견하고, 그것에 이야기를 입히고, 사람과 공간과 상품을 연결하는 디자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디자이너의 활동 무대를 지나치게 서울과 수도권, 대기업과 디자인회사 안에서만 생각해온 것은 아닐까.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넓힌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꼭 완전한 귀촌이나 귀향일 필요도 없다. 서울과 지역을 오가는 이중거점도 가능하고, 한 달에 며칠씩 특정 지역에 머물며 활동할 수도 있다. 빈집이나 작은 공간을 스튜디오와 라키비움으로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디자이너의 인생 2막은 ‘은퇴’가 아니라 활동 무대의 확장일 수 있다.
<‘무료 디자인 봉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다. 시니어 디자이너가 지역에 내려가 주민들의 명함을 만들어주고, 가게 간판을 디자인하고, 농산물 포장을 무료로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좋은 뜻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방식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역에는 이미 청년 디자이너와 디자인회사, 인쇄·사인·제작업체 등 디자인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시니어 디자이너가 무료 또는 저가로 직접 작업하기 시작한다면 의도와 달리 지역 디자인업체의 일거리를 빼앗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
또한 시니어 디자이너가 가진 가장 중요한 자산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도 아니다. 이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자산은 직접 작업할 수 있는 ‘손’이라기보다 수십 년간 축적된 경험과 안목, 그리고 판단력이다.
따라서 역할을 달리해야 한다. 필자는 이들을 ‘마을 디자인 주치의’라고 부르고 싶다.
<시니어 디자이너는 ‘디자인 주치의’가 되어야 한다>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상태를 살펴본 뒤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한다. 그러나 의사가 모든 약을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 지역 디자인도 이와 비슷한 구조로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농민이 “우리 농산물은 정말 좋은데 왜 제값을 못 받을까요?”라고 물었다고 하자. 곧바로 포장 디자인을 바꾸자고 할 일이 아니다. 상품의 품질이 문제인지, 이름이 문제인지, 브랜드가 없는 것인지, 유통 방식이 문제인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마을에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관광안내판부터 새로 만들 필요도 없다. 어쩌면 그 마을에는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올 만한 콘텐츠가 없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축제가 재미없다고 포스터부터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20년째 똑같은 프로그램을 반복하고 있다면 문제는 그래픽디자인이 아니라 축제 자체의 콘텐츠일 가능성이 크다.
좋은 디자인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문제를 제대로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바로 이 일을 시니어 디자이너가 할 수 있다. 현장을 보고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문제를 발견한 뒤, 무엇부터 바꾸어야 하는지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디자인 처방전’이다.
<‘디자인 처방전’은 ‘디자인 주치의‘가 작성해야>
디자인 처방전에는 단순히 “간판을 바꾸세요”, “패키지를 새로 만드세요”라고 쓰는 것이 아니다. 현재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자원을 살려야 하는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어떤 전문가가 필요한지, 어느 정도의 시간과 예산이 필요한지, 어떤 순서로 진행할 것인지를 담아야 한다.
그리고 처방이 끝나면 실제 디자인과 제작은 다른 주체가 맡는다.
1단계는 시니어 디자이너(디자인 주치의)가 진단하고 처방한다. 2단계는 청년 디자이너가 새로운 감각과 기술로 디자인한다. 3단계는 지역 디자인 제작업체가 제작하고 실행한다.
필요하다면 건축가, 사진가, 영상 제작자, 콘텐츠 기획자, 조경가, 마케터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도 참여할 수 있다. 이때 시니어 디자이너는 이들을 연결하고 전체 방향을 조율하는 ‘마을 디자인 코디네이터’의 역할까지 담당한다.
일종의 디자인 분야 ‘의약분업’인 셈이다. 이렇게 역할을 나누면 시니어와 청년이 경쟁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시니어의 경험과 안목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발굴하면서 청년 디자이너와 지역 디자인 제작업체의 일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제 ‘마을 디자인 클리닉’을 만들자>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개인 몇 사람의 열정에 의존하면 오래가기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마을 디자인 클리닉’이다.
거창한 건물이나 새로운 기관부터 만들 필요는 없다. 주민센터나 마을회관, 지역문화센터 한쪽에 작은 상담공간을 마련하고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로컬 시니어 디자이너가 ‘마을 디자인 주치의’로 활동하면 된다.
주민과 상인, 농민과 마을공동체가 찾아와 “우리 마을만의 브랜드를 만들 수 없을까요?”, “오래된 가게를 동네 명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빈집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요?”, “우리 축제는 무엇부터 바꾸어야 할까요?”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디자인 주치의‘는 상담실에서만 답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현장을 찾아가 주민을 만나고 지역의 역사와 자원을 조사한다. 그리고 문제를 진단해 ’디자인 처방전‘을 작성한다. 그 처방전을 토대로 청년 디자이너와 지역 디자인 제작업체가 실제 사업에 참여한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마을 디자인 클리닉’의 기본 구조다.
전국의 작은 도시와 농촌에 ‘마을 디자인 클리닉’이 하나둘 생기고, 그곳에서 시니어 디자이너와 청년 디자이너, 지역 디자인업체가 함께 일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시니어는 문제를 발견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청년은 새로운 감각과 기술을 더하며, 지역업체는 그것을 현실로 만든다. 그리고 주민은 자신의 마을과 상품, 가게와 공간을 조금씩 바꾸어간다. (사진: AI생성)
<‘무엇을 만들까’보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먼저 묻자>
마을 디자인 클리닉이 필요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많은 지역 디자인 사업은 예산이 생기면 먼저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간판을 바꾸고, 벽화를 그리고, 캐릭터를 만들고, 포장지를 개발한다. 물론 이런 사업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곳도 많다. 문제는 지역이 가진 문제를 충분히 진단하기 전에 결과물부터 정하는 경우다.
이는 병원에 찾아온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약부터 처방하는 것과 비슷하다. 마을마다 역사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고 산업도 다른데 해결책은 비슷해지고, 결국 전국 어디를 가도 비슷한 벽화와 간판, 캐릭터가 반복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순서를 바꿀 필요가 있다.
사업을 먼저 정하고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먼저 진단하고 그에 맞는 사업을 만들어야 한다.
’마을 디자인 클리닉‘은 바로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예산도 ‘진단-디자인-실행’으로 나누자>
이를 실제 정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예산의 흐름도 달라져야 한다. 시니어 디자이너에게는 상담과 현장조사, 진단과 처방에 대한 정당한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 무료 봉사에 의존해서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디자인 개발비는 청년 디자이너에게 지급하고, 제작과 시공비는 지역 디자인 제작업체에 돌아가게 하면 된다. 기존처럼 하나의 사업비로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발주하기보다 ‘진단 및 처방 → 디자인 개발 → 제작 및 실행’으로 역할과 예산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면 같은 디자인 예산으로 서로 다른 주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시니어에게는 평생 쌓은 경험을 활용할 새로운 역할이 생기고, 청년에게는 실제 프로젝트 경험과 일거리가 생긴다. 지역 디자인업체에는 제작과 실행을 담당할 사업이 생기며, 주민에게는 자신의 문제에 맞는 제대로 된 디자인 서비스를 받을 기회가 생긴다.
<이것은 ‘시니어 일자리 사업’이 아니다>
여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 제도를 단순한 ‘노인 일자리 사업’이나 ‘은퇴 디자이너 봉사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사업의 목표가 은퇴한 디자이너 몇 명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핵심은 시니어가 평생 축적한 전문성과 경험을 지역의 지식자산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산을 청년의 감각과 기술, 지역업체의 실행력과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마을 디자인 클리닉’은 복지사업이 아니라 지역의 디자인 역량을 높이는 투자가 된다.
시니어 디자이너 역시 도움을 주러 지역에 내려가는 사람만은 아니다. 지역이라는 새로운 현장에서 다시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경험을 다시 사용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또 다른 전성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
서울에서는 은퇴한 디자이너였던 사람이 지역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디자인 주치의’가 될 수도 있다.
<시니어의 경험을 지역의 자산으로>
우리 사회는 지금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한쪽에는 수십 년의 경험과 전문성을 가지고도 은퇴 이후 새로운 역할을 찾지 못하는 시니어들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인구가 줄고 청년이 떠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전문인력이 부족해지는 지역이 있다.
어쩌면 이 두 문제를 따로 해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시니어의 경험을 지역으로 연결하면 된다.
전국의 작은 도시와 농촌에 ‘마을 디자인 클리닉’이 하나둘 생기고, 그곳에서 시니어 디자이너와 청년 디자이너, 지역 디자인업체가 함께 일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시니어는 문제를 발견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청년은 새로운 감각과 기술을 더하며, 지역업체는 그것을 현실로 만든다. 그리고 주민은 자신의 마을과 상품, 가게와 공간을 조금씩 바꾸어간다.
“시니어의 경험을 지역의 자산으로, 청년의 기회를 지역의 일자리로.”
이 작은 연결이 지역의 디자인을 바꾸고, 결국 마을의 미래를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이제 우리 지역에도 ‘디자인 주치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글_ 정석원 편집인(jsw0224@gmail.com)
#디자인정글 #로컬시니어디자이너 #디자인주치의 #마을디자인클리닉 #디자인처방전 #로컬디자인 #지역디자인 #청년디자이너 #지역디자인생태계 #지역활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