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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정글 에세이] '길' 이후의 '길' - '서명숙'과 '올레'가 남긴 것

2026-04-12

부음을 접했고, 영결식 뉴스도 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하나의 풍경이 떠올랐다.

 

서명숙.

 

개인적인 인연은 없다. 직접 뵌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은 하나의 장소와 방식, 그리고 하나의 흐름으로 기억된다.

 

고 서명숙 이사장 (사진: 네이버)

 

 

한 사람의 이름이 '방식'으로 남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제주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오랫동안 '어디를 갈 것인가'를 먼저 떠올렸다. 유명한 관광지, 정해진 코스, 익숙한 식당. 여행은 빠르게 이동하며 많이 보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졌다.

 

그 흐름을 바꾼 것이 바로 '제주올레'였다.

 

올레길은 새로운 관광지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던 길을 다시 엮고, 보이지 않던 흐름을 드러낸 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사람들은 걷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제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속도가 느려지자 풍경이 달라졌다.
지나가던 공간이 머무는 장소가 되었고, 익숙했던 장면이 새로운 경험으로 전환되었다.

 

길은 그대로였지만, 사람의 태도가 바뀌면서 여행의 본질이 달라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브랜딩이라는 일을 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길'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여러 차례 수행했다. 북한산 둘레길, 남파랑길, 서해랑길, 그리고 폐광지역 재생을 위한 '감탄로드'까지.'

 

이름을 만들고, 스토리를 입히고, 사람들이 그 길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모든 작업의 출발점 어딘가에는 ‘올레’라는 개념이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길을 하나의 콘텐츠로 보고, 경험의 흐름으로 설계하는 방식.

 

그것은 단순한 네이밍이나 동선 설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장소‘의 관계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올레길의 의미는 ‘제주에 길을 냈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여행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었다'는 점에 있다.

 

이 변화는 조용하게, 그러나 깊게 퍼져나갔다.

 

이제 우리는 길을 걷는다.
목적지보다 '과정'에 의미를 두고, 소비보다 '체험'을 중시한다.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이 변화가, 사실은 누군가의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의 부재를 통해 비로소 그 존재의 크기를 실감하게 된다.

 

나는 고인을 기리는 수많은 글들을 보며,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분은 '길을 만든 사람'이라기보다, '길을 남긴 사람'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물리적인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앞으로도 계속 걸어갈 하나의 방향을 남긴 것이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곳곳에는 수많은 길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길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사람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길'이 단순한 인프라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시작점 어딘가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사람의 이름이 조용히 놓여 있을 것이다.

 

디자인정글 지면을 빌려, 사단법인 제주올레 설립자 서명숙 이사장의 명복을 깊이 빌어드린다.

 

글_ 정석원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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