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1
최근 정부가 광화문 현판을 한문 단독 표기에서 벗어나 한글 현판과 병행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표기 방식의 조정이 아니다. 국가 상징 공간이 어떤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꺼내 든 결정이다. 문화적·디자인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변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공간은 언어로 말하고, 언어는 정체성을 만든다. 광화문은 그 정체성이 가장 응축된 장소다.
광화문은 건축이 아니라 ‘메시지’다
광화문은 단지 조선 왕궁의 정문이 아니다. 이곳은 국가의 얼굴이며, 시민의 기억이 축적된 장소다. 수백 년의 역사 위에 일제강점기, 해방, 군사정권, 민주화, 촛불의 시간까지 겹겹이 쌓였다. 이곳은 언제나 정치적이었고, 동시에 문화적이며, 상징적인 장소였다.
그렇다면 이 공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공간은 말을 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재료, 형태, 배치, 색채, 그리고 문자까지 모두가 메시지다. 현판은 그 메시지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체계가 아니다
훈민정음은 단순히 편리한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도록 설계된 문자였고, 언어를 통해 사회의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문자에 이처럼 분명한 철학이 담긴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한글은 음소 문자이자 과학적 구조를 가진 시스템이며, 동시에 문화적 상징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상징을 국가의 가장 중심적인 공간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광화문에 한글 현판이 병기된다는 것은, 한글이 ‘기념의 대상’을 넘어 ‘현재의 언어’로 공간을 말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광화문에 한글 현판이 병기된다는 것은, 한글이 ‘기념의 대상’을 넘어 ‘현재의 언어’로 공간을 말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사진은 한글 현판을 부착한 예시 장면)
이 논의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여러 차례 광화문을 단순한 역사 복원 공간이 아니라, 세종의 정신과 한글의 철학을 현재형으로 구현하는 공공문화 플랫폼으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광화문광장을 세종·한글 광장으로 만들자”는 제안은, 단지 상징물 하나를 더하자는 제스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공간의 정체성을 구조적으로 재설계하자는 요청이었다.
지금의 광화문은 지나치게 중립적이고, 지나치게 관광지적이다. 그러나 광화문은 본래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늘 시대의 질문을 응축해 온 장소였다. 왕권의 상징이었고, 식민지 권력의 무대였으며, 민주주의의 광장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 공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이번 ‘한글 현판 병기’ 검토는, 그 질문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신호다. 그것은 필자가 오랫동안 던져온 문제의식- 광화문이 과거의 기념물이 아니라, 현재의 가치와 미래의 방향을 보여주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한글 병행 표기는 ‘시작’이다
이번 검토안이 ‘병행 사용’이라는 점에서 일부는 절충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 디자인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공간의 언어를 재설계하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방향을 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한글 병기는 과도기적 장치일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면서, 현재의 언어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광화문이라는 공간의 정체성을 다시 디자인하는 논의로 이어지는가다.
올해 2026년이 갖는 상징성
2026년은 한글 반포 580돌이자, 한글날 제정 100돌이 되는 해다. 또한 한글을 공공의 언어로 끌어올리려 했던 움직임이 시작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 광화문이라는 국가 상징 공간에 한글 현판이 걸린다는 것은 단순한 일정의 우연이 아니다. 문화적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 결정이 많은 이들에게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광화문은 ‘국가의 인터페이스’다
디자인의 관점에서 광화문은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의 인터페이스다. 시민과 국가, 역사와 현재, 국내와 세계가 교차하는 접점이다. 인터페이스는 단순히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장치다.
이 인터페이스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이 나라가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문자 시스템 중 하나이며, 동시에 가장 민주적인 문자다. 접근 가능하고, 구조적으로 합리적이며, 학습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특성은 디자인적 가치로도 충분하다.
디자인의 관점에서 광화문은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의 인터페이스다. 시민과 국가, 역사와 현재, 국내와 세계가 교차하는 접점이다. 인터페이스는 단순히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장치다.
세종의 이름이 아닌, 세종의 정신으로
광화문 일대는 ‘세종’과 깊게 연결된 장소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세종을 주로 동상과 기념물로만 기억해 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세종이 남긴 사상과 태도다. 그는 언어를 통해 권력을 재배치했고, 지식의 접근권을 넓히려 했다.
만약 광화문이 ‘세종의 공간’이라면, 그것은 단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현재의 디자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공간은 철학을 보여줘야 한다
도시는 건축의 집합이 아니라, ‘가치’의 집합이다. 광화문은 그 가치가 가장 밀집된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어떤 언어를 쓰는가. 누구를 중심에 두는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미래로 가져갈 것인가.
‘한글 현판 병기’는 그 질문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장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이제, 광화문은 말해야 한다
광화문은 오랫동안 침묵의 상징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늘 말해 왔다. 다만 우리는 그 언어를 재해석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글이 걸린다는 것은, 이 공간이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말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향해야 한다.
이 변화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광화문이 ‘세종과 한글의 광장’으로 재정의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 구조다. 언어는 장식이 아니라 철학이다.
이제, 그 철학을 공간에 새길 시간이다.
글_ 정석원 편집주간 (jsw0224@jungle.co.kr)
사진출처_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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