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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디자인정글 전시리뷰] “삶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표면에 남는다” - 제20회 김창식 개인전 <삶의 풍경, 이야기가 엮어낸 표정> 

2026-01-08

전시장 입구에서 마주한 김창식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1990년대부터 꾸준히 개인전을 이어오며, 어느덧 20회라는 숫자에 도달한 작가다. 이 숫자는 단순한 이력의 누적이 아니라, 한 작가가 자기 언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여 온 시간의 증거다. 김창식은 유행에 민감한 작가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기 세계에 안주하는 작가도 아니었다. 그는 늘 같은 질문을 반복해 왔다. 삶은 어떤 표정을 남기는가.

 

김창식 작가

 

전시회 테마그래픽 (삶+사람)

 

 

이번 전시 <삶의 풍경, 이야기가 엮어낸 표정>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최근의 응답이자, 지금의 김창식이 도달한 회화적 태도의 집약이다.

 

캐럿글로벌 센터원, 갤러리 사:유

 

 

 

 

 

 

갤러리 내부 전경

 

 

풍경을 그리지 않는 풍경화가

 

김창식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흔히 '추상'이라는 말로 이 작업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회화는 형식적으로는 추상에 가까울지 몰라도, 태도만 놓고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 그림들에는 자연의 묘사도, 도시의 전경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벗겨진 종이, 찢긴 인쇄물, 갈라진 표면, 흘러내린 물감과 얼룩들이 화면을 채운다.

 

이것은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풍경이 생성되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김창식에게 풍경이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간 자리이며 삶이 스며든 표면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언제나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고, 안정 대신 균열을 품고 있다.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1 (아크릴 페인팅)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2 (아크릴 페인팅)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5 (아크릴 페인팅)

 

 

찢고 붙이는 행위는 회화의 제스처다

 

김창식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어떻게 남겼는가'다. 종이를 찢고, 겹치고, 다시 덧칠하는 반복된 행위는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하나의 제스처다. 이는 삶이 흘러가는 방식과 닮아 있다. 정돈되지 않고, 예고 없이 깨지고, 다시 이어 붙여지며 계속되는 과정.

 

특히 화면 곳곳에 남아 있는 텍스트의 파편들은 읽히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문자, 반쯤 지워진 단어들은 개인의 기억처럼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관람자의 경험을 호출한다. 이때 작품은 설명을 멈추고, 해석의 책임을 관람자에게 넘긴다.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11 (아크릴 페인팅)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6 (아크릴 페인팅)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4 (아크릴 페인팅)

 

 

색채는 감정을 지시하지 않는다

 

김창식의 색은 강렬하지만 감정적이지 않다. 옐로우와 오렌지, 퍼플과 블루, 그린과 그레이가 충돌하듯 공존하지만, 특정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는 감정을 서사로 풀어내기보다 상태로 남겨두려는 작가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 회화들에서 색은 메시지가 아니라 온도에 가깝다. 차갑고 뜨겁고, 무겁고 가벼운 감각들이 화면 안에서 교차한다. 관람자는 그 온도에 반응할 뿐, 정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10 (아크릴 페인팅)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9 (아크릴 페인팅)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8 (아크릴 페인팅)

 

 

20회 개인전이라는 무게

 

20회 개인전은 '축하'의 숫자이기 이전에 '질문'의 숫자다. 김창식은 이번 전시에서 그간 축적해 온 형식적 실험을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은 이전보다 더 절제되어 있고, 여백은 더 넓어졌다. 이는 작가가 기법의 성취보다 삶의 리듬과 호흡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더 이상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남겨두고, 침묵하고, 기다린다. 이는 경력의 결과라기보다 태도의 선택에 가깝다.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10 (아크릴 페인팅)

 

삶의 풍경·우리들의 흔적 3 (아크릴 페인팅)

 

 

디자인의 시대에 회화가 던지는 질문

 

즉각적인 메시지와 명확한 기능이 요구되는 디자인의 시대에, 김창식의 회화는 정반대의 속도를 택한다. 이 그림들은 빠르게 소비되지 않고,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다. 대신 관람자를 붙잡고, 머무르게 하며, 스스로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단순한 개인전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얼마나 빠르게 표면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조용한 비판처럼 읽힌다. 설명되지 않는 표정, 정리되지 않은 풍경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기 삶의 균열을 인식하게 된다.

 

흩뿌리는 삶 (아크릴 페인팅, 염색실)

 

흩뿌리는 삶 (아크릴 페인팅, 염색실)

 

 

삶의 풍경은 결국 우리 각자의 몫이다

 

<삶의 풍경, 이야기가 엮어낸 표정>은 작가의 삶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관람자의 삶을 비춘다. 김창식의 화면은 하나의 거울처럼 작동하며, 각자가 지나온 시간과 감정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사한다. 찢어진 종이와 겹쳐진 색면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기억을 발견하고, 각자의 균열과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번 제20회 개인전은 김창식이라는 작가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회화가 여전히 사유의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삶은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표면에 남는다. 김창식은 그 남겨진 표면을 오랫동안, 그리고 성실하게 응시해 온 작가다.

 

'표면'을 넘어, '세계'로 향하는 질문

 

이제 이 응시는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 찢기고 겹쳐진 그의 화면은 특정 지역이나 문화에 갇히지 않고, 동시대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감정과 시간의 흔적을 담아낸다. 그렇기에 김창식의 회화는 국지적인 서사를 넘어, 세계의 여러 도시와 낯선 관객들 앞에서도 충분히 작동할 언어를 이미 갖추고 있다.

 

20회 개인전은 하나의 마침표가 아니라, 또 다른 출발선이다. 김창식이 앞으로 더 넓은 무대에서, 더 많은 세계의 표면 위에 자신의 회화적 질문을 남기기를 기대해 본다. 삶의 풍경은 어디에서나 생성된다. 이제 그 풍경들이 세계 곳곳에서 김창식의 이름으로 다시 엮이기를 바란다.

 

<작가소개>


김창식(Kim, Chang Sik)은 산호세 주립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타이포그래퍼이자 시각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교육자이다. 한국에서 아트 디렉터로 활동한 뒤 미국에서 디자인 교육과 국제 전시·컨퍼런스를 기획해 왔으며, 대통령상 등 국내외 주요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총19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2024년부터는 순수미술 창작에 집중하며 물성과 수작업 기반의 반추상 회화를 통해 새로운 작업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글_ 정석원 편집주간 (jsw0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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