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1
‘프리랜서 디자이너’.
겉보기엔 자유롭다. 정해진 출근시간도 없고, 회의도 없고, 상사도 없다.
하지만 그 자유의 이면엔 말하지 못한 그림자가 있다.
책임은 무겁고, 보호는 없다.
자유는 있었지만, 권리는 없었다.
디자인업계에서 프리랜서는 점점 늘고 있다.
회사에 정규직으로 고용되지 않아도 능력만 있으면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자유로운 ‘노마드’가 아니라 언제든 대체 가능한 외주자의 삶이다.
“계약은 나중에요. 시안 먼저 좀 볼 수 있을까요?”
서울에 거주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 A씨는 올해만 해도 3건의 프로젝트가 계약 없이 파기됐다.
처음엔 이메일이나 메신저로 간단한 기획안을 받는다. 그리고 ‘러프하게 방향만 잡아보자’며 시안을 요청받는다. A씨는 기획서 분석, 자료 조사, 레퍼런스 수집, 스케치까지 수일을 투자한다.
그렇게 보낸 결과에 대한 답은 이렇다.
“잘 봤습니다. 내부 검토 후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그 연락은 오지 않는다.
정식 계약서도, 착수금도 없이 시작된 작업.
남는 건 파일과 피로뿐이다.
그런데 이건 ‘프리랜서라면 다 겪는 일’로 여겨진다.
심지어 동료들끼리 위로하며 말한다.
“그나마 무단 도용 안 당한 게 다행이지 뭐.”
착수금은 꿈, 중도금은 허상, 잔금은 환상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가장 큰 고통은 대금 지급의 불확실성이다.
통상적으로 디자인 용역은 착수금 – 중도금 – 잔금 구조로 되어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착수금 없이 작업이 시작되고, 중도금은 흐지부지되고, 잔금은 ‘클라이언트가 만족하면’ 지급된다.
기한은 무기한 연기되고, 담당자는 중간에 한번씩 바뀌고, 책임자는 없어진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서에 서명하거나, 아예 계약서 없이 일한다.
‘이 정도 금액이면 계약서까지는 안 써도 되겠지’라는 말은 착취의 시작이다.
프리랜서는 자유롭다. 그러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자유는 방치이고, 구조화된 고립이다. 디자인은 시간과 감정, 창의력을 갈아 넣는 노동이다. 프리랜서 디자이너 역시 그 노동의 주체로서 보호받아야 한다.(그림: AI 생성)
“프리랜서는 회사가 아니잖아요”
프리랜서에게 가장 많이 들리는 말 중 하나다.
“회사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예민하세요?”
“디자인 하나 하면서 뭘 그렇게 따져요?”
“이쪽은 다 그렇게 해요.”
그 말의 이면엔 이런 의식이 숨어 있다.
프리랜서는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
정규직이 아니므로, 계약의 주체가 아니므로, 디자이너라기보단 외주 작업자일 뿐이라는 인식.
그래서 정당한 요청조차 거부당하고, “불편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문제는, 이런 구조가 업계에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프리랜서에겐 회사의 직급도, 의사결정 해 줄 임원진도, 법적 문제 해결을 도와줄 법무팀도 없다.
그러니 싸우지 못하고, 침묵하거나 떠난다.
플랫폼조차 안전망이 아니다
최근 프리랜서 플랫폼들이 늘어나면서, 중개 수수료를 내고 프로젝트를 연결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역시 완벽한 보호망이 아니다.
플랫폼은 ‘거래 연결자’일 뿐, 프리랜서의 권익을 보호하는 역할까지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가 경쟁을 유도하고, 후기 평점으로 노동의 질이 평가되며, 불합리한 클라이언트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기조차 어렵다.
디자이너는 이중의 구조에 갇힌다.
클라이언트의 갑질과, 플랫폼의 무관심.
어디에도 목소리를 낼 곳이 없다.
프리랜서가 ‘직업’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프리랜서는 더 이상 ‘잠시 머무는 임시직’이 아니다.
수많은 디자이너가 이 형태로 커리어를 쌓고 있고, 이제는 독립 창작자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하다.
- 계약서 없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
- 착수금 없이 작업하지 않는다.
- 수정 횟수와 일정, 작업 범위를 문서로 명시한다.
-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업계 차원에서는 프리랜서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표준계약서, 분쟁조정 창구, 블랙리스트 제도 등 제도적 안전망이 마련돼야 한다.
그래야 프리랜서라는 직업이 존중받을 수 있다.
자유와 권리는 함께 가야 한다
프리랜서는 자유롭다.
그러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자유는 방치이고, 구조화된 고립이다.
디자인은 시간과 감정, 창의력을 갈아 넣는 노동이다.
프리랜서 디자이너 역시 그 노동의 주체로서 보호받아야 한다.
“프리랜서는 그냥 외주 작업자니까.”
이 말이 사라지는 날, 비로소 디자인업계는 더 나은 미래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이다.
기획취재_정석원 편집주간 (jsw0224@gmail.com) / 최유진 편집장 (yjchoi@jun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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