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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인터뷰

[디자인정글 특별초대석] ‘기본’을 중시하는 디자이너, 명계수 건국대 명예교수

2024-08-29

명계수 교수는 ‘기본’을 중요시 여기는 디자이너다. 그는 오랜 시간 학생들을 지도하며 디자이너로서 가져야 할 자세로 기본을 강조해왔다. 그는 도전과 변화에 있어서도 밑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기본이라 여긴다. 그는 누구보다 기본에 충실한 디자이너다. 

 


명계수 교수, 203 인포그래픽 연구소에서 (사진: 장성환)

 

 

디자이너로서 또 교수로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온 그는 은퇴를 할 때까지 학생들을 바르게 지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기를 경험하며 디자인에 필요한 기술적인 요소는 물론, 평생 디자이너가 가져야할 기본기와 마음가짐을 가르쳐왔다. 결과보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집중하는 자세를 학생들에게 일깨워준 그는 2004년 건국대학교 교육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3년생으로 올해 71세인 그는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직후 쌍용그룹을 시작으로 대웅제약, 동아그룹, 농심, 코오롱그룹, 조흥은행, 문화방송 등 굴지의 기업의 CI 및 BI 디자인에 참여하기도 한 그는 1978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2019년 2월 건국대학교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들에게 그래픽 디자인과 디자인 컨셉트에 대한 교육을 해왔으며,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뿐 아니라 현대 회화와 아트 미디어에 대한 폭넓은 분야에까지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왔다. 

 

한국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아이덴티티 디자인 및 비상업적 이미지를 전문적으로 다루어 온 그는 기업의 브랜딩 작업을 하면서 본문폰트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바탕으로 1994년 ‘밝은체’를 선보였으며, 윤폰트와 협업하여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2013년 오픈소스 폰트로 출판하기도 했다. 

 

현재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로 미국그래픽아트학회(AIGA),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회(KSIR),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KFDA), 한국브랜드디자인학회(BDAK), 한국디자인학회, 홍익시각디자이너협회 등의 활동을 펼쳐온 그는 전 세계 디자이너들과 교류한다. 미국, 멕시코, 스페인, 아랍에미리트, 튀르키예, 중국,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각종 포스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며, 여러 포스터 전시에 초대되는 그는 여전히 디자이너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자신의 작업을 세계 곳곳에 선보이고 있다. 

 

Q. 처음 어떻게 미술을 시작하게 됐나. 


보광동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때부터 미술반 활동을 시작했고 고등학교때 본격적으로 미술반 활동에 참여했다. 미술학원은 다니지 않았다. 당시엔 남자가 미대에 가면 굶는다고들 해서 집에선 내가 미술을 한다는 걸 몰랐다. 고3이 되니 걱정이 되더라. 고민을 하다 부모님께 넌지시 말씀을 드렸더니 깜짝 놀라셨다. 혼나기를 반복하고, 내가 그린 그림들을 보여드리는 등 우여곡절 끝에 설득되신 아버지께서, 당시 후배분이 하시던 미술학원에 날 데려가셨다. 그 분으로부터 향후 디자인의 발전 등을 고려하여 디자인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고, 나는 구성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입시를 2개월 정도 남겨두고 향린미술학원에 갔다. 그후 바로 시험을 봤다. 

 

Q. 대학생활은 어땠나. 


그렇게 72년도에 홍대 응용미술과에 입학해서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는데 사실 처음에는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회화를 하는 친구들을 보며 갈증을 느꼈고, 디자인 쪽엔 고등학교 선배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친구들과 사귀고 하며 재미를 붙였다. 당시 8명이 모인 ‘*팔화실’이 있었다. 아현동 언저리에 있던 작은 방에 있던 화실이었다. 선배였던 여홍구 선생이 권했고, 조의환 등과 함께 5기의 멤버를 구성했다. 그렇게 점차 사람을 폭넓게 만나기 시작했다. 학교를 다닐 땐 디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오로지 학교 과제 등에 심취했었다. 
 

명계수 건국대 명예교수 인물 관계망 (정리: 203 인포그래픽 연구소)

 

 

Q. 홍대를 졸업했는데, 홍대만의 스쿨 컬러는 무엇이었나.


홍대는 비유하자면 들풀 같다. 분위기에 따라 잘 휩쓸린다. 정해진 틀이나 형태 없이 움직이는 것, 좋게 표현하면 에꼴로지와 같은 것이 었다. 

 

Q.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어떻게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나.


76년도에 대학을 졸업했다. 취업은 75년도, 4학년 2학기때 했다. 이상철 선생의 아티플랜(artiplan, 이가솜씨의 전신)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작업을 도와드리는 개념으로 일을 시작했고, 대학원에 바로 진학을 해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대학원 1학기를 마치면서 76년 7월 홍대 졸업생 1기로 비샌하우스(권명광 디자인연구소)에 합류하게 됐다. 작은 가건물 같은 곳이었는데 비가오면 비가 샌다고 해서 비샌하우스라 이름 붙여졌었다.  

 

비샌하우스의 시작

 

서울그래픽센터의 시작은 1976년 여름의 끝자락부터 시작된다. 
지금의 서울그래픽센터 건물이 세워지기 전 그 터에는 진화방이 있던 1층짜리 슬라브 건물이 있었는데 옥상이 흙으로 덮여있고, 절개면과 연결된 작지도 않고 넓지도 않은 마당이 있었다. 뒤편의 절개면 쪽으로는 허름한 시멘트 블록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이 서울그래픽센터의 전신인 비샌하우스이다.

 

시작 - 1976년 8월말 나는 대학원 2차 학기 등록을 마치고 수강신청을 위해 행정실을 찾았는데 그때 마침 권명광 교수님과 복도에서 마주쳤고, 나를 불러 세우시며 “명계수, 나하고 같이 일할 수 있나?” 하시며 쌍용그룹의 CI를 시작하게 되었고, 곧 사무실을 여는데 도와주기를 부탁하시면서 권명광 교수님과 나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그날 위의 현장을 같이 둘러보고 며칠 후부터 사무실 공사가 시작되었다. 벽을 뚫고 큰 유리창을 내고, 한쪽엔 출입문을 내는 계획으로 인부를 써서 골격을 잡고, 아현동 언덕에서 창틀과 문짝을 주문하고, 을지로에서 경첩, 자물쇠 등의 장식을 구입하면서 약 3~4평 정도의 디자인 업무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 쓰러져가던 집(이웃에 사시던 분들은 무허가 집이라고 불렀음)이 집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가 없었다. 공사 과정에서 이웃이 시끄럽다고 공사를 못하게 하거나, 동사무소에 무허가 공사라고 고발을 해서 잠시-하루정도 이지만-쉴 수 있는 시간을 얻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옆집, 뒷집 아주머니들과 인사도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으나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때 나를 중매 서시겠다던 옆집 아주머니는 어디에 계신지....

 

지붕은 슬레이트(물결형태의 간이 지붕 마감재)를 얹었는데 처음엔 이상이 없었으나 다음 해에 문제가 발생하여 비가 오면 모든 그릇을 동원하여 빗물을 받아야하는 원흉이 되었다.
비샌하우스라는 이름은 그때 얻어졌고 그렇게 불리우며 서울그래픽센터의 시작이 되었다.

 

오리 - 작업 테이블은 을지로 중고 가구상에서 구입한 file box 위에 mdf 판을 얹어서 사용하다 후에 주문제작한 튼튼한 판넬에 유리를 얹어서 그럴듯한 작업 테이블로 사용할 수 있었다. 권명광 교수님이 퇴근해서 오시면 쌍용그룹 ci의 기본 안 스케치 등을 점검받고 작업 지시받고 하면서 혼자서 비샌하우스를 지켰다. 그해 겨울은 무척 추웠는데 아마도 외로움 때문 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리 한 마리가 마당을 누비고 다녔는데, 먹다 남은 자장면과 짬뽕을 맛있게 받아먹기도 했다. 얼마 후 그 오리는 한쪽 발 물갈퀴를 잃고 절름발이가 되었는데(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직도 궁금함) 뒤뚱뒤뚱 절름절름 걷는 모습이 무척 우습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너무도 불쌍해서 더 많은 짬뽕을 나눠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불쌍한 오리는 비 오는 겨울의 끝에 죽음을 맞이했고, 나는 마당 구석에 날개 접은 외로운 오리를 묻어주었다. 

 

사람들 - 1977년 대학원에 갓 입학한 문철(홍익대학교 교수)을 내가 권명광 교수님께 추천해서 식구가 늘게 되었고 한참 후 서홍선이 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권명광 교수님은 그때 나를 서울그래픽센터 초대 실장이라 불렀다.
홍익대학교 류재우 교수, 영남대학교의 이봉섭 교수, 단국대학교의 방재기 교수, 목포대학교의 고창훈 교수 등이 객원 디자이너의 역할을 담당했다. 나는 1985년 건국대학교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비샌하우스를 지켰다. 그 시기는 정치적 격동기이기도 했는데, 부마사태, 박정희 대통령 서거, 12.12사태, 광주사태, 비상계엄령 등을 맞이하게 된다.


비샌하우스를 지켰던 약 10여년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비샌하우스를 방문하였는데, 홍익대학교 안상수 교수, 디자인파크 김현 대표, 단국대학교 김상락 교수 등 오늘날 한국의 디자인계를 이끄는 쟁쟁한 사람들은 물론 학점 때문에 찾은 학생, 업무 관계로 방문한 사람, 청탁하러 온 사람, 꾸중 들으러 온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비샌하우스를 다녀간 많은 사람들은 후에 걸출한 인물로 변하여 권명광 교수님의 뒤를 잇고 있다. 

 

2009.12.10.

명계수 건국대학교 디자인조형대학 학장 


Q. 어떤 일을 했나. 


바로 쌍용 CI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엔 ‘데코마스_Decomas: Design Coordination as a Management Strategy라 불렀다. 경영전략으로서의 디자인 통합’. 당시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했다. 로트링펜, 오구, 운형자 등을 사용했다. 77년 말에 쌍용 심볼이 결정됐다.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수많은 밤을 새워 레미콘차량 등의 모형을 만들어 시안이 결정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등, 디자이너로서 큰 활동을 한 것이 처음이라 개인적으로도 뿌듯한 프로젝트다. 그 뒤에 대웅제약, 코오롱 등의 작업도 했다. 

 


 

 

 

 

 

 

 

 

 

 

 

쌍용 CI (이미지 제공: 서울그래픽센터)

쌍용 CI 디자인 작업 당시. 가운데가 권명광 교수, 그 오른쪽이 명계수 교수다.

 

 

Q. 지금으로 치면 브랜딩 디자이너로 활동한 셈이다. 


그런셈이다. 전용폰트도 전부 다 손으로 레터링했었다. 전용서체를 한자한자 손으로 그려가면서 작업했다. 그때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부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밝은체’도 이때부터 준비가 됐던 거다. 그땐 새로 만들어지는 글자는 헤드라인체가 많았다. 본문용 서체는 그래픽체, 굴림체 로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다 명조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용 서체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본문용 서체를 만들어야겠다 는 생각을 이때 가졌다. 
 

 

 

밝은체로 디자인된 홍익시각디자인협회 포스터 이미지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Q. 학생들은 언제부터 가르쳤나.


1978년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1980년에 서울예술전문대(현 서울예대) 강의를 나갔고, 1981년에 전임으로 임용 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때까지 계속 비샌하우스를 오가며 디자인 협력을 하였다.

 

Q. 학생들에게 어떤 과목을 가르쳤나.


서울예술전문대학에서는 CI, 문자디자인, 전공실기 등을 가르쳤다. 당시엔 CI라는 과목이 없었다. 전공과목 중에서 부분적으로 CI를 가르쳤었다. 1985년 건국대학교로 옮기고 난 후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거의 모든 과목을 맡아 가르쳤다. 1985년에 설립된 학과였고 학과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었으며, 전임교수는 나 혼자였고 책임시간을 의무적으로 채워야 했기에 2학년 과정까지는 개설된 모든 과목을 맡아서 가르쳐야 했다. 주로 타이포그래피, 편집, 아이덴티티, 디자인컨셉을 지도했다.  

 


명계수 교수, 203 인포그래픽 연구소에서 (사진: 장성환)

 

 

Q. 밝은체는 언제 만들게 됐나. 


건국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1990년에 미국 뉴욕주 시라큐스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가게 됐다. 그곳에 가서 우리나라에 막 도입이 시작됐던 매킨토시를 구입했다. 당시로서는 최고기종을 샀는데 하드드라이브 용량이 250메가였다. 매우 느렸고 파일 저장을 하면 버벅대기 일수였다. 작은 프린터까지 총 1만2천불(한화 860만원, 90년 1달러/716.7원) 이상을 투자했다. 그때 컴퓨터를 가지고 만든 것이 밝은체였다. 그 당시 나는 Fontographer 라는 소프트웨어를 몰랐었다. 지금의 Adobe illustrator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Aldus사의 Freehand 를 사용해서 한 글자 씩 다듬었다. 그리고 199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틈틈이 계속 다듬어서 1994년도에 출품하였다. 초기의 밝은체는 완성형 서체로서 모듈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글자 한자를 가지고 보름정도를 씨름한적도 있었고, 보직을 맡아 학교 행정을 하면서 몇달 만에 글자를 다듬은 적도 있었다.    

 


밝은체

 

밝은체 스케치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밝은체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밝은체가 사용된 책 표지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경기도 디자인 교과서 본문에 사용된 밝은체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Q. 밝은체로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는데.


1994년 문화체육부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주관한 한글 글자체 공모전이 있었다. 100자정도를 만들어 출품했고 최고상을 받았다. 그 이후 조금씩 업그레이드를 시켜 2013년 윤폰트와 협업하여 밝은체 폰트를 제작했다. 

 

사실 공모전에 출품을 할 때 고민이 많았다. 교수의 신분으로 공모전에 출품한다는 것에 대한 결정이 어려웠고 학생들과 똑같이 경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생 들과의 경쟁에서 질 수도 있지만 초심으로 돌아가서 한번 비교를 해보자 생각했고 마지막날 출품을 했다. 당시 500만원이라는 큰 상금을 받기도 했다. 윤폰트와 협의하여 처음 출시된 밝은체의 수익금 전체를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제작 기관에 기부하였다. 그후 윤폰트의 나눔폰트가 늘어 나는 계기가 되었다.

 

Q. 1990년 미국 뉴욕주 시라큐스대학교 교환교수, 2003년 보스턴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는데, 어떤 것을 느꼈나.


외국의 디자인교육 시스템은 어떠 한지, 외국에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학생들은 어떤 자세로 배우는지 궁금했다. 실력이 부족해도 자유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고, 우리 학생들도 정신적인 문제만 해결하면 어디에서도 부족할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기본 실기력이 부족해도 디자이너로서 활동을 시작하면 달라지는 미국 학생들의 상황이 부러웠고 그렇지 못한 한국 학생들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들에겐 디자인 교육, 실기교육 이외에 다른 것이 있었는데, 교육과정 전체에 걸쳐 주변학문과의 연결된 부분들을 대학 전공교육으로 이어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2003 보스턴대학 교환교수 시절 SUNY-NewPaltz 특강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Q. 이후 학생들을 지도할 때 어떤 것들을 강조했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었다. 전공 과목 이외에 인문대학, 사회대학의 강의를 듣길 권했다. 우물 속에 갇혀 있으면 새롭게 태어나질 못한다. 강의실 외에 바깥 공간에서 학생들과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면서 소통하는 시도를 많이 했다. 

 

Q.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경계를 겪었다. 커리큘럼,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에 대한 고민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학교에 컴퓨터를 도입하고 학생들이 사용하게 되면서 ‘컴퓨터가 모든 걸 다 해결해줄 것이다’ 라는 생각이 학생들 사이에 팽배했었다. 모니터를 켜 놓고 멍하니 앉아있는 것을 보면서 ‘손을 쓰는 스케치가 없어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아날로그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무리 과정과 마지막 결과물을 제외하고 그 직전까지는 모두 손으로 작업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학생들에게 결과물을 제출할 때 처음 아이디어 발상단계부터 결과물까지의 모든 과정을 기록한 노트를 함께 제출하도록 했다. 과제를 시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아이디어 스케치와 컨셉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다. 프로젝트 처음부터 학생들이 컴퓨터부터 켜려고 하는 것이 싫었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 실기실에 남아 작업을 했다. 실기실에서 쪽 잠을 자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컴퓨터가 도입된 이후로는 불이 꺼진 실기실이 돼 버렸다. 집에서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디스크를 가지고 오기 때문에 작업의 중간과정에 대해서는 교수가 알 수가 없다. 중간 과정 없이 결과물만 나오게 되는 것이다. 취업할 때 학생들에게 포트폴리오와 함께 스케치 등 사이드 자료를 반드시 들고가라고 한다. 결과물과 비교를 하면 모든 과정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신뢰가 생긴다. 

 

Q. 디자이너이기도, 교육자이기도 했다. 어떤 철학을 가졌었나. 


디자이너냐 디자인 교육자냐 그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학교 밖으로 나가면 디자이너고, 내부에 있으면 디자인 교육자인데, 학교 밖의 활동도 디자인 교육자로서의 큰 부분에 들어간다. 하지만 외부 프로젝트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학교를 등한시하게 된다. 디자인교육 쪽으로 집중하기 위해 외부 제안이 많았지만 거절했고, 외부일을 줄이며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Q. 지도했던 학생들이 어떤 디자이너가 되길 바랐나.


기초가 탄탄한 사람이 되길 바랐다. 우리는 학교에서 디자인 교육을 받을 때에 디자인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공부를 한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서 자신의 메인 전공을 찾게 되는 겁니다. 학생들과 상담을 해보면 3, 4학년 학생들은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것은 본인이 찾아야한다. 직장 경험도 많이 해야 한다. 직장을 수시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가 없이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기본이 되어있어야 한다. 

 

연구실에서의 명계수 교수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Q. 그 기본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학생들은 테크니컬한 부분에 집중한다. 편의적으로 쉬운 방법을 찾는 거다. 이런 것들을 좀더 쉽게 학생들에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포스터 디자인을 들 수 있다. 컨셉에서 출발해서 마지막 결과물을 완성하기까지 중간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다. 최종으로 향해가는 과정 말이다. 학생들은 컨셉만 결정되면 최종단계 까지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결과라는 것은 자신이 만족하기 전까지, 클라이언트가 만족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결정되고 최종안이 결정됐을 때에도 그것에 대한 레이아웃 변경을 많이 시킨다. 그 과정이 머리속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디자이너의 마인드이자 가야할 길이다. 

 

Q. 여러 단체 활동도 많이 했다. 특히 VIDAK(사단법인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어떤 활동을 했나. 


나는 비닥의 설립 발기 위원으로 또 임원으로 많은 활동을 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10대 회장을 맡았다.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활동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회장을 맡을 생각은 없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당시 협회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 여러 원로 은사님들의 추천으로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회장을 맡게 됐다. 특히, 재정상태가 무척 어려웠는데, 정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협회를 운영했다.  KIDP의 협조로 2013한국국제포스터전을 개최했고, 그때 지원받은 예산으로 협회의 일부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그 당시 모든 부채를 변제할 수는 없었다. 다만 부채를 줄여주거나 일부 탕감해주신 관련업체의 대표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1984년 비닥 창립전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중국 스촨성 교류전에서의 명계수 교수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2013년 회장 인사를 하고 있는 명계수 교수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Q. 당시 포스터전이 대규모 전시로 이루어졌다. 


430여 점 정도가 전시됐다. 외국 디자이너의 작품 300여 점, 국내 디자이너의 작품 150여 점 정도가 출품됐다.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을 맡았고, 비엔날레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는데 KIDP의 예산지원이 이어지지 않아 예산확보를 할 수 없었다. 이런 부분은 아쉽다. 전시가 끝난 후 모든 작품을 KIDP에 기증하였다. 

 

 


2013 대한민국 국제포스터전 (이미지 제공: 명계수 교수)

 

 

Q. 협회 운영에 있어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협회 등의 사단법인 단체들이 그들의 재정으로 운영이 된다는 부분이다. 외국의 경우엔 정부단체나 기업 등에서 후원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그런 시스템이 약해서 항상 단체들이 어려움을 겪는다. 


협회 활동을 하게 되면 정부와의 연결이 적지 않다. 당시 대통령 선거 공청회에서 디자인 단체의 위상을 높여주면 좋겠다는 의견과 정부 및 지방자치체 장들을 위한 디자인 교육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디자인 활성화와 디자이너를 위한 혜택을 위해서였다. 좋은 의견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듯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늘 디자인과 관련된 행정 및 예산이 뒷전인 점이 안타깝다. 

 

Q. 국내파임에도 불구하고 해외 디자이너들과의 교류가 활발하다. SNS 활동도 활발하고. 


2013년 개최한 국제포스터전과의 인연으로 해외의 많은 디자이너들과 교류를 하게 됐다. 퇴직 후 SNS도 활발히 하고 있다. 외국 디자이너들에 비해 한국 디자이너들은 디자인관련 SNS 활동에 소극적이다. 그들은 자신을 알리기 위한 활동에 무척 적극적이다. SNS를 하는 이유는 좀 더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을 연계해주는 큐레이터 역할도 하고 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나는 2019년 2월 퇴직을 하면서 이후 학교의 강의를 맡지 않았다. 학교의 요청으로 몇차례의 특강은 했지만 정규강의는 하질 않았다. 나이가 들면 과감히 손을 털 줄 알아야 한다.

 

사실 퇴직 후에는 디자인을 떠나 그림을 그리거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재직 중에도 그랬지만 퇴직을 몇 년 앞두고 외국에서 포스터 초청을 받게 되었는데, 이후로 점점 늘어나서 1년에 약 30점 이상의 작품을 여러 나라에 보내주고 있다. 수입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아도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상 추천서도 써주고 작품도 보내주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나에게 사실은 엄청난 스트레스라 할 수 있다. 당분간 몸이 허락하고 정신이 허락하는 한 지금의 상황을 유지 하려한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 장성환 기획편집위원
정리_ 최유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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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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