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4
오시환 선생은 카피라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21년간 광고계에 몸담았다. 그랬던 그는 어느 날 요리사로 변신했고, 해장금이라는 레스토랑을 10년간 운영했다. 광고인이 요리사가 된 사연은 각종 매체를 통해 소개가 됐고, 그의 요리 실력은 널리 인정을 받았다.
봉화에서 인생 3부작을 살고있는 오시환 선생
21년의 광고인생, 13년의 요리인생을 거쳐 현재 그는 봉화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3부작으로 나눈다. 1부작 광고인, 2부작 요리사, 3부작 농부다. 오시환의 인생 3부작을 위해 그는 청정지역 봉화에서 친환경 농법으로 논과 밭을 가꿀 뿐 아니라 봉화라는 지역의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캄보디아에 학교도 지었다.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이하 수레꾼)’ 활동을 통해서다. 이 활동을 위해 그는 ‘유튜브도 개설했고, 모든 작업을 직접 하고 있다.
그가 수레꾼 활동을 통해 캄보디아에 학교를 짓고 우물을 파는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13살 차이가 나는 누나가 있는 그는 누나가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고, 자신도 야학의 선생님이 됐다. 여러가지로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던 그는 캄보디아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기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생 3부작을 살고 있는 오시환 선생의 생활이 궁금했다. 봉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 봉화로 갔다. 봉화 그의 집 앞엔 예쁜 꽃들이 심어져 있었고, 대문 옆으론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우편함이 서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디자인된 우편함은 오시환 선생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이는 봉화에서 그가 펼치는 새로운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청정봉화를 더욱 아름답고 따뜻한 곳으로 만드는 ‘봉잼’의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오시환 선생의 그간의 이야기와 현재 하고 있는 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었다.
오시환.
서울출생. 카피라이터로 (주)대우에 입사해 광고계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 코래드, ㈜MAPS, (주)거손 등을 거치면서 AE로 프로스펙스, 대우전자, 대우자동차, 경동산업, 한국야쿠르트, 보령제약, 삼진제약, 에스콰이어, 기아자동차 등의 광고업무를 진행했다. IMF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플로리다와 뉴욕 맨하튼의 식당에서 3년간 주방보조로 ‘쿡헬퍼’ 수련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북촌에서 바다요리 전문점 ‘해장금’을 운영하다 2011년 경북 봉화로 귀농해 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 그동안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의 기획국장으로 캄보디아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세웠고, 2023에는 수레꾼 공예학교를 세워 캄보디아 오지 마을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 중에 있다.
저서로는 <마흔 여덟에 식칼을 든 남자>가 있고, 엮은 책으로는 무여선사의 <쉬고, 쉬고, 또 쉬고>, 기후선사의 <네가 던진 돌은 네가 꺼내라>, 지상스님의 <꽃은 피고, 꽃은 지고>가 있다.
Q. 처음 카피라이터로 시작했는데.
1980년 대우그룹에서 광고를 전담하는 기획조정실 카피라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카피라이터 2세대라 할 수 있다. 카피라이터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연대 국문과 출신 카피라이터들이 모여 스스로 스터디를 하며 공부했다.
대우에 들어간 뒤 얼마되지 않아 기업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기업들이 인수, 합병됐고 내부에도 변화가 있었다. 카피라이터가 갑자기 다큐멘터리 나레이션을 쓰는 역할을 하게 됐다. 그 일을 한 2년 했고 총 6년간의 대우에서의 생활을 끝낸 후 해태그룹의 광고 전문회사 ㈜코래드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광고기획을 하게 됐다. 코래드에서 나와 에스콰이어그룹의 MAPS, 독립광고 에이전시 ㈜거손 등에서 광고 마케팅 기획자인 AE로 15년간 프로스펙스, 마데카솔, 게보린, 영에이지, 기아자동차 크레도스, 스포티지 등의 광고를 기획, 제작했다. 이후 광고를 하지 않기로 하고 광고계를 떠났다.
Q. 광고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있나.
싫었다. 광고업계는 을의 세계다. 전문직종이지만 접대를 함께 해야 했다. 그러한 문화가 싫었다.
Q. 요리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광고를 하지 않기로 하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접대를 많이 하다 보니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았고, 요리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요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연이 닿아 미국 플로리다에 가게 됐고, 일식당에서 1년간 밑바닥 생활을 했다. 칼에 베이고 튀겨지고 고생을 많이 했다. 1년뒤 불법체류자가 됐는데, 또 어떻게 연이 닿아 뉴욕으로 가게 됐다. 한국식당에서 2년간 야간 일을 했다. 그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해장금을 차리게 됐다.
Q. 해장금이 많이 알려졌었는데.
광고쟁이가 요리사가 된 것이 나뿐이었나보다. 그래서인지 주목을 많이 받았다. 매체에도 많이 소개됐다. 서울 북촌에서 작은 가게로 시작했는데 사람이 늘 많았다. 돈 버는 재주가 없는지 돈은 별로 벌지 못했다. 10년간 해장금을 했고, 이후 2011년 봉화로 내려왔다.
Q. 불교와도 인연이 깊은데.
종교는 불교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러나 불교는 명상이 포인트다. 나는 명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IMF때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화두 참선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갔을 때도 큰 도움이 됐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집중이 안될 때 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기도와는 다르다. 기도는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지만, 참선은 고요다. 가장 큰 포인트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stop thinking’이다. 생각을 멈추고 멈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명상의 포인트다.
가장 쉬운 것은 숨에 집중하는 것이다. 바로 호흡법, 숨쉬기 집중법이다. 이걸 불교에서는 어려운 말로 가르친다. 숨에 집중하면 생각이 자동적으로 멈추게 돼 있다. 극한으로 복잡할 때에도 숨에 집중하면 해결책이 올라온다. 고요하게 해결된다. 명상이 없었으면 파란만장했던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없었을 것 같다.
Q. 캄보디아에 학교를 지었는데.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이하 수레꾼)’ 활동을 하고 있다. 수레꾼은 2008년도에 캄보디아 뽀디봉 마을에 뽀디봉 초등학교를 세웠다. 그 이후 후속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고민을 하던 수레꾼의 공동대표였던 한 소설가님이 날 찾아왔다. 그해인 2010년부터 수레꾼의 기획자이자 사무국장을 맡게 됐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초등학교가 지어진 이후 방문을 했는데 전기는 물론 물도 없었다. 흙탕물을 항아리에 떠서 침전시켜 마시고 있었다. 이후 4, 5년간 그 마을에 37개의 우물을 팠다. 학교가 세워진 곳은 정말 가난한 지역이다.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만 세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문맹퇴치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상급 학교로 진행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2012년에 중학교를 세웠고 작년에는 공예학교인 ‘수레꾼 뽀디봉 공예학교’를 세웠다.
현재 600여 명의 초등학생, 300여 명의 중학생이 있다. 이들에게 자신이 평생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을 가르쳐주고자 한다. 아직 운영자금이 충분치 않아 첫 번째 단계로 재봉기술과 목공예 기술을 가르쳐주는 걸로 시작하려고 한다. 기술교육은 후진국 사회 발전을 이끄는 커다란 원동력이라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지금은 미비하겠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캄보디아 공예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이 학교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우수한 공예가가 돼 공예품을 공급하는 학교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오시환 선생의 봉화에서의 생활
Q. 봉화에선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인생3부작이 시작됐다. 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농부다. 봉화는 ‘청정봉화’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한 슬로건에 맞게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봉화에서도 많은 농가들이 제초제를 사용하며 농사들을 짓는다. 군 자체에서 봉화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마케팅 정책을 펼쳐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관광도 마찬가지다. 봉화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 일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청정봉화니까 자연을 주제로 ‘농부의 삶에 예술을 입히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마음 맞는 사람들 몇 명이 모였다. 내가 기획서를 쓰고 제출해서 선정이 됐다.
오시환 선생은 자연을 주제로 ‘농부의 삶에 예술을 입히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Q. 어떤 일을 하게 되나.
‘청정봉화’라는 이 지역의 특색에 맞게 ‘청정’과 ‘자연’을 상징하는 ‘흙, 나무, 돌, 꽃’을 소재로 삼아 자연친화적 소품들을 직접 디자인, 제작해 각 구성원의 정원과 경작지 둘레에 배치하고 독특하고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조성하고자 한다.
소나무를 이용해 새집도 만들어 나누어 주고 우편함도 만들어 나누어 주고 그런 소품들로 멤버들의 집을 꾸미는 일부터 시작했다. 봉화 답게 꽃으로 아름답게 환경을 가꾸기도 한다.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니 풀이 나는 곳엔 꽃을 심고 직접 만든 것들로 장식을 한다. 자체 워크샵과 정기모임 등을 통해 공예기술을 익혀 나가고 있다. 우리집 작업실에서 목공을 함께 하면서 오브제도 만들고 작은 가구도 제작한다.
‘농부의 삶에 예술을 입히다’ 프로젝트 구성원들의 정원과 경작지 둘레에 배치되는 자연친화적 소품들
Q. 이러한 일을 기획한 이유는.
봉화를 위한 아름다운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봉화는 매력적인 천연공간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시설이나 프로그램이 미미하다. 관광객에게 보여줄 만한 콘텐츠가 부재하다는 거다. 지자체마다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다. 한 계절만 가는 행사도 진짜 그 지역을 살리는 일이 아니다. 트렌드나 단일성 행사가 아닌 지속적인 콘텐츠가 필요하다. 1년내낸 봉화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관광이다.
우리 그룹 ‘봉잼’의 활동을 통해 봉화 농부가 스스로 ‘삶의 품격’을 높이고, 귀농, 귀촌인의 귀감이 되며, 도시민으로부터 관심을 촉발시키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봉화’를 주제로 새로운 농박 형태를 만들어서 봉화의 농사꾼은 어떻게 사는지도 보여주고 싶다.
Q. 삶의 모토가 있다면.
광고가 싫어 그만두었지만 난 내 인생이 ‘기획인생’이라 본다. 기획을 그만두고 한 가지 정한 것이 있다.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기획을 통해 큰 그림은 그리되 목표하는 시간을 정하지 않는다. 시간을 정하기 시작하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일의 진행도 더디다. 계획을 세울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책도 더 많이 쓰고 있다.
Q.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연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은 ‘씨앗’이고 ‘연’은 ‘조건’이다. 씨앗은 조건을 만나야 인연이 되는 것이다. 연을 만나지 못하면 인은 그냥 씨앗일 뿐이다. 해바라기 씨가 내 손바닥 위에 있으면 그냥 씨일 뿐이지만 흙을 만나면 해바라기가 된다. 그것이 바로 인이 연을 만나는 것이다.
캄보디아 학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학교를 세웠는데 그냥 두면 그대로 끝난다. 그곳에 우물을 파주고 학생들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 연이다. 그들에게 우린 연이 되어주었다. 인연이라는 소중함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나 또한 인이며 연이다. 앞으로도 인이 연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오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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