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7
1993년 대한민국에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국내 최초로 열린 대전엑스포‘93이 바로 그것이다. 올림픽, 월드컵과 더불어 엑스포는 ‘지구촌의 3대 잔치’로 불리는 메가 이벤트다.
당시 세계엑스포가 우리나라에서 열린다는 것은 전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큰 이슈였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세계엑스포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엑스포는 당시 108개 국가와 33개 국제기구가 참가하였고, 1천 4백만 명의 관람객을 유치한 ‘가장 성공한 엑스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빛탑 광장에서 대전엑스포 동우회원들의 단체 사진
대전엑스포가 올해 8월 7일 개최 30주년을 맞이했다. 당시 대전엑스포 준비를 위해 젊음의 열정을 바쳤던 조직위원회 직원들, 안내를 맡아 드넓은 박람회장 구석구석을 누볐던 도우미들, 대가없이 자발적으로 헌신의 의지를 불태웠던 자원봉사자들에 이르기까지 대전엑스포에 관계했던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들 중 25명이 다시 모여 그날의 영광을 되새기고 추억을 회상하며 <어게인~!! 대전엑스포‘93>을 함께 외쳤다. 지난 8월 5일 한빛탑 광장에서 만나 대전엑스포 동우회의 재건을 다지는 행사를 가졌다.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열린 대전엑스포 개최 30주년 기념 모임 총회
이에 앞서 디자인정글은 대전엑스포 당시 활약했던 조직위 관계자의 그룹인터뷰를 실시하여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대전엑스포‘93 성공을 이끈 조직위 관계자 그룹인터뷰
[대전엑스포 개최 당시 조직위 관계자 그룹인터뷰]
<참석자>
-김광원: 당시 대전엑스포조직위 홍보국장
-이수현: 당시 <대전엑스포‘93> 회보 편집장(현,JK SEARCH 부사장)
-김명호: 당시 문화행사과 계장 (현,소담샘 문화예술극단 단장)
-정석원: 당시 홍보국 디자인실장 (현,엑스포디자인그룹 대표, 디자인정글 편집주간, 인터뷰 진행자)
김광원 (당시 대전엑스포조직위 홍보국장)
김명호 (당시 문화행사과 계장: 현,소담샘 문화예술극단 단장)
이수현 (당시 <대전엑스포‘93> 회보 편집장: 현, JK SEARCH 부사장)
정석원 (당시 홍보국 디자인실장: 현,엑스포디자인그룹 대표, 디자인정글 편집주간, 인터뷰 진행자)
Q. 대전 엑스포가 개최 30주년을 맞이했다. 소감이 어떠한가?
김광원: 당시 대전 엑스포는 전기자동차, 태양열 무인자동차, 자기부상열차 등 첨단기기들을 선보였다. 오늘날 현실화 되고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로선 전혀 생소한 것들이었다. 여기엔 오명 위원장이 강조했던 과학기술을 집약해서 미래를 내다본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당시 엑스포는 빅뱅이후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에 어떻게 나아갈 것이냐에 대해 답변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 인공지능(AI)의 성장으로까지 이어진 거라 본다. 내가 그러한 역사적인 현장에 참여했다는 것과 그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낀다.
이수현: 첨단 과학기술과 세계의 문화예술이 만난 거대한 이 축제의 현장은 대전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많은 국민들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가장 드라마틱하고 보람찬 일 중 하나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다.
대전엑스포‘93 당시 개막식 모습(사진: 김세권)
Q. 당시의 분위기는 어땠나?
김광원: 당시만해도 엑스포를 개최한 나라가 몇 되지 않았다. 올림픽은 개최해도 엑스포는 개최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자신감, 자존감이 매우 높아졌다. 우리에게 남은 건 엑스포였다. 하지만 엑스포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1989년도에 조직위원회가 구성되던 당시에는 1991년에 대전엑스포를 개최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세계박람회기구인 BIE로부터 인증을 받는 박람회로 목표로 두면서 1993년 개최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단순한 무역박람회 수준에서 국제적인 수준의 종합박람회로 규모를 업그레이드하여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수현: 원래 대전이 개최지가 아니었다. 5곳의 후보지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엔 안산으로 정해졌다가 반대 여론이 많았다. 수도권과 어느정도 거리가 있어야 하고 영호남 지역에서도 접근이 용이해야 한다는 의견에 후순위였던 대전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김명호: 대전엑스포가 시작된 후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엑스포 회장을 다녀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으로 주요 전시관엔 입장이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 나는 퍼레이드를 담당했었는데, 관람객들에게 퍼레이드가 무척 인기가 많았다. 하루 두 번 열리는 퍼레이드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한빛탑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때서야 음식점들이 겨우 휴식시간을 가질 정도였다. 밤엔 불꽃놀이도 했다. 문화행사 측면에도 당시 엑스포는 최선을 다했다.
대전엑스포‘93 당시 입장을 대기하고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 (사진: 김세권)
대점엑스포‘93 당시 박람회장을 방문한 각 국의 VIP들 (사진: 김세권)
Q. 성공적인 엑스포 개최를 위해 가장 많이 노력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이수현: 엑스포가 열리기 전엔 홍보가 가장 중요했다. 국민들에게 대전엑스포를 알리는 것. 홍보는 최소 예산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어야 하는 일이다. 당시 홍보업무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피드백을 받았는데, 아직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엑스포를 모른다는 평을 들었다. 최대한 매체를 활용해 관련기업, 관련인물을 인터뷰하고 알리는 작업에 매진했다. 당시 방문 관람객 수를 천만으로 예상했는데, 1400만명이 관람을 하면서 초과달성을 했다. 당시 인구가 4천만명 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엑스포가 시작된 후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거다.
김명호: 장소 및 공간, 즉 시설의 사후활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개최도 중요했지만 당시 사후활용에 대해서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현재는 테마파크가 남아있게 되었고, 한빛탑은 대전의 상징이 됐다. 도룡동 일대와 둔산동 일대가 천지개벽한 것은 대전엑스포가 만들어낸 최대 열매다.
대전엑스포‘93 당시 회장 안내를 맡은 도우미들의 활동 모습 (사진: 김세권)
대전엑스포‘93 당시 시범도우미들의 모습 (사진:김세권)
Q. 대전 엑스포 이후 어떠한 변화들이 있었나?
이수현: 당시 화두가 개발도상국이었다. 대전 엑스포는 개발도상국에서 최초로 열린 엑스포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됐다. 30년동안 그 부분이 변화했다. 그 변화의 발판이 된 것이 대전엑스포였다.
‘도우미’라는 말도 그때 탄생했다. ‘컴패니언’이라는 어려운 이름 대신 쉬운 우리말로 이름을 짓기 위해 공모를 했었다. 그때 탄생한 도우미들은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광원: 대덕연구단지는 과학단지다. 면적이 상당히 넓다. 당시 주차장으로 사용하던 둔산동 자리에 정부제2청사가 자리잡았다. 대한민국이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단계에서 대전 역시 엄청난 발전을 했다. 당시 전시관들이 있던 자리에 높은 빌딩의 그림이 그려졌다. 설마 저것이 실현되겠나 했는데, 지금 현재 그 모습이 이뤄져 있다.
김명호: 당시 우리나라 이벤트, 엔터테인먼트가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해외 연예인팀들이 무척 많이 왔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문화행사가 큰 발전을 하게 됐다.
대전엑스포‘93 당시 박람회장 전경 (사진:김세권)
Q. 대전 엑스포가 이루어 낸 성과는 무엇이며, 개최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고 보나?
김광원: 대전 엑스포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을 위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본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알렸고, 기술개발을 통한 경제 선진화에 기여했다. 여러 분야의 산업발전으로 이어진 것이 바로 대전엑스포다. 이후 국내에서는 크고 작은 수많은 엑스포가 열리게 됐다.
김명호: 과학의 발전을 빼놓을 수 없지만 엑스포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에도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씨를 뿌리게 됐다고 생각한다. 엑스포는 과학뿐 아니라 문화, 예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대전엑스포로 인해 우리나라에 ‘이벤트’라는 말이 생겨났다. 대전엑스포를 기점으로 진짜 이벤트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것은 현재에 이르러 K팝으로 연결된다. 세계의 중심이 된 K팝 역시 그 뿌리에 대전엑스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수현: 대전 엑스포를 계기로 서울-대전 간 고속도로가 확장되기도 했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한밭대로, 갑천우안대로, 대전-신탄진 간 도로, 3대 하천 정비, 시가지 녹지 환경사업 등을 통해 대전의 발전을 앞당겼고, 대전이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대전엑스포‘93 당시의 회장 야경 및 불꽃놀이 행사 모습 (사진: 김세권)
Q. 대전엑스포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더 많이,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이를 위해 어떠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이수현: 개최 당시만해도 ‘대전엑스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들로부터 대전엑스포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 MZ세대들은 아예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대전엑스포가 우리나라 엑스포의 효시라는 점이다. 앞으로 어디에서 어떤 엑스포가 열리든 대전엑스포가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각종 기록물이나 소중한 자료들이 잘 보관되어야 하는데 방치되어 있어 안타깝다.
김광원: 대전엑스포 기념관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최초 설립 때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방대했던 자료들도 상당히 유실된 것같다. 기록물 공간의 크기도 키우고 그 기능을 좀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더 구체적이고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다. 대전엑스포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지속시켜 가는 게 맞는 방법이라 본다. 대전엑스포 동우회 같은 조직에서 그 운영권을 맡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있다.
Q.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열릴 세계엑스포에 대해 전망한다면?
김광원: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을 보면 국내외적으로 각 분야가 발전했다. 문화, 과학, 기술, 예술, 체육 등 모든 분야가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평가받는 것이 대전 엑스포라는 하나의 매듭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국제적 행사의 목적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현재의 것을 발전시켜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도약을 해나가야 한다.
김명호: 대전엑스포는 과학의 미래를 열었다. 현재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2030 부산엑스포 역시 현재 사회의 이슈가 아닌 새로운 차원을 열어야 한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아젠다를 가지고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
Q. 대전 엑스포 개최 30주년을 맞이해 정부 또는 국민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이수현: 대전엑스포가 끝나고 후속 기념사업을 위해 동우회가 운영됐었다. 서울의 상록회관에 동우회 공간이 만들어졌고, 거기서 직원으로 일하면서 계간 소식지를 만들고 각종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했었다. 그런데 대전시로부터 예산 지원이 안되자 그 활동도 끊기게 됐다. 동우회 활동이 중단된지 10여년 정도 된 것같다. 이제 개최 3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동우회 활동이 다시 부활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엑스포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인적 자원을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동우회 활동은 지속되어야 한다. 동우회원들이 모일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라도 확보되었으면 좋겠다.
김명호: 우리는 대전엑스포 개최를 위해 젊음을 바쳐 열심히 일했지만, 많은 국민들의 기억속에는 대전엑스포가 잊혀지고 있다.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행사든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 차원에서 엑스포에 대한 연구 시스템을 구축하면 좋겠다. 대전엑스포뿐 아니라 모든 엑스포와 관련된 인적자원에 대한 사후관리가 필요하다.
김광원: 지금 대한민국은 2030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부 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염원하는 초미의 관심사다. 엑스포는 어느덧 대규모의 산업이 되었다. 유치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성공적으로 치르느냐가 더 중요하다. 엑스포를 치러본 경험있는 사람들의 지혜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 기반이 조성되었으면 한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 (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 (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대전엑스포 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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