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5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는 한 부부가 있다. 어린이 그림책 전문 출판사 재미마주의 이호백 대표와 서울상상나라 어린이박물관 장화정 학예연구실장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널리 알리고자 노력해왔다.
서울상상나라 어린이박물관 장화정 학예연구실장과 재미마주 이호백 대표
1994년 10월 설립된 그림책 출판사 재미마주는 어린이들을 위한 책을 출간하고 있는 어린이 책 전문 출판사로, 어린이들을 위한 진심이 담긴 책을 선보이고 있다. 재미마주가 세상에 내놓은 책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예술성을 부여하는 책’이라는 점이다.
‘오래 만든 책이 오래 팔린다’는 출판의 교훈을 바탕으로 일년동안 만드는 책의 양은 서너 권에 지나지 않지만 한 권 한 권에는 공과 시간이 담긴다. 이러한 예술성은 독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적은 출판양에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재미마주’는 이미지와 만나는 즐거움, 배움의 즐거움을 뜻한다. ‘재미있게 마주한다’는 의미의 ‘재미마주’는 불어로 ‘J'aime image’로, ‘나는 이미지를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재미마주의 이호백 대표는 파리에 체류하던 시절, '재미'란 말과 '이마주(image)'란 말을 붙여 ‘재미마주’를 만들었다.
독자들에게 더욱 신선한 실험과 즐거움이 담긴 새로운 그림책의 세계, 그 어느 예술 분야보다도 수준 높게 우뚝 설 그런 책들을 선보이고자 하는 재미마주는 최근 ‘그림책, 어제와 오늘의 예술’이라는 전시를 통해 독창적인 문학과 예술을 그림책에 담아온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이호백 대표의 아내인 장화정 씨는 서울상상나라 어린이박물관의 학예연구실장으로, 어린이박물관 분야에서 30여 년간 몸담아온 전문가다. 서울예고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시각디자인과를 수학하면서 어린이 일러스트레이션 분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어린이를 위한 교과서나 교육자료들이 디자인 감각없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이를 개선하고자 어린이 교재를 만드는 웅진출판사에 들어가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이후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국립응용미술학교 중 출판산업과 그래픽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가장 전통 있고 명망 있는 ’에스띠엔느그래픽산업예술학교 École Supérieure des Arts et Industries graphiques (ESAIG)’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예술기술고등학위(석사) Diplōme Supérieur des Arts et Techniques de la Communication (DSATC)를 취득한 후, 파리시 중심 세느강변의 작은 어린이 전문출판사 밀라출판사 Editions Mila 에서 박물관〮문화예술〮놀이 출판물 디자이너로 일했다.
이러한 경험과 전공을 살려서 삼성문화재단 공채 1기 경력직으로 입사, 2년간 아동출판기획을 하며 ‘우리문화발견 시리즈’ 등 문화예술과 놀이를 접목한 기획출판물을 발간한 그녀는 1995년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삼성어린이박물관에 합류하면서 체험식 전시로 이루어진 어린이박물관 현장에서 출판물 디자인을 통해 경험한 디자인 감각과 박물관과 문화예술 놀이가 어우러진 콘텐츠를 다루는 기획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선보였다.
2013년 1월 삼성어린이박물관의 종료 이후, 그곳의 축적된 노하우가 보다 완성된 형태로 서울시의 공공 정책으로 뒷받침되고 실천되고 있는 서울상상나라에서 학예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들 부부로부터 어린이를 위해 일해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재미마주의 다양한 그림책들
‘어린이를 위한 예술적인 책’을 출간해 오셨습니다. 특별히 어린이를 위한 책을 선보여 오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호백: 어린이를 위한 책과 예술적인 책은 그동안 이율배반적인 듯 서로 매칭되기 어려운 분야라고 생각돼 왔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는 그 감성이 어른과 다르게 열려 있고, 예술적 감성의 폭도 오히려 더 넓다고 볼 수 있죠.
우리가 어른들의 입장에서 어린이에게 필요한 교육에 대해 생각하는 기준들은 대부분 아이들이 성장해가면서 진학과 취업 등에 활용할 수 있는 ‘기능적’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부모들도 이런 교육에만 올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어릴 때일수록 감성의 폭을 넓히는 훈련이 병행돼야 하는데, 이런 교육은 언어적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고, 예술적으로, 놀이적으로 펼쳐주는 프로그램들이라 할 수 있어요. 어린이와 어른이 예술을 매개로 격이 없이 소통하는 공간과 메체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책 속에서 언어적으로 메시지가 완결되는 그런 책이라기보다, 책을 통해 자신만의 스토리와 상상을 연결지어 줄 그런 매체로서의 그림책들이 어린이와 함께 하길 바랐고, 그런 책들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다양한 그림책을 만들어 오셨는데, 출간 기준이나 철학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호백: 재미마주는 걸림 없이 자유로운 아이들의 심성을 닮은 책. 여러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어린이들을 더 큰 문화적 보편성과 국제성으로 이끄는 책을 만들고자 노력하죠.
한 권의 그림책 안에서 작가 개인의 진정한 느낌과 생각이 기존의 출판적인 관행 안에서도 그대로 표출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 속에 우리들의 보편적인 삶의 정서, 그리고 어린이들의 상상과 놀이가 드러나기 보다는, 잠재되어 있는 그런 그림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다른 어린이 그림책들과 재미마주의 그림책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호백: 일단 겉 모습에서 재미마주의 책은 좀 다르다고 합니다. 저희는 표지 디자인을 할 때 시선을 잡아 끄는 그래픽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 책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시간이 흘러도 편하게 함께할 수 있는, 원래 그런 책이 있었던 것 같이 좀 점잖은 그래픽을 추구합니다.
내용을 읽어보고, 그 속에 담긴 그림을 감상하고 난 다음에는 책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그런 책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메세지를 찾아보려고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합니다. 재미마주의 책들은 한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고, 두고두고 꺼내 보는 그런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책, 어제와 오늘의 예술'전 전경
‘그림책, 어제와 오늘의 예술’전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이호백: ‘그림책’은 문학과 예술이 가장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있는 가장 오래된 인쇄 매체입니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과 커뮤니케이션 혁신 속에서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넘겨보는’ 변치 않는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죠.
이번 전시는 그림책이 걸어온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며, 프랑스의 메모 출판사(EDITIONS MEMO)가 펴낸 책들을 통해 어떤 예술가들이 어떤 사연으로 ‘그림책’이라는 매체에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문학과 예술을 담아 왔는지 함축적으로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메모 출판사는 저희 재미마주의 책들을 프랑스에 출간해 소개한 출판사로 인연이 있는 출판사예요. 이 출판사는 지난 30여년 간, 우리에게 잊혀 가는 20세기 초부터도 지금의 어린이들이 즐기고 감동받기에 손색이 없는 멋진 어린이 그림책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리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새 책처럼 다시 출간해 주기도 했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조용히 사라져 갈 뻔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책들이 메모 출판사의 제판과 인쇄 전문가의 손 끝에서 화려하게 다시 태어난 것이죠. 그리고 이런 고전적 전통의 유산을 자신의 실험적인 창작에 밑거름으로 삼고 있는, 전통을 중시하는 혁신적인 그림책 아티스트들의 신작들도 꾸준히 발간해 왔습니다. 모든 것이 디지털 그라운드에서 공중분해 돼 새로운 AI의 시대를 여는 이 시점에 메모 출판사가 출간한 100년 간의 그림책을 감상하는 전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습니다.
장화정 선생님께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해오셨는데요.
장화정: 어린이박물관은 진보적 사상이 꽃피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혁의 시기에 태동한 혁신적인 교육적 박물관으로서 어린이를 그 중심에 놓은 기관입니다.
저는 어린이박물관이라고 하는 독특하고 멋진 일터에서 어린이를 위한 체험 전시 개발을 하면서 죤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철학을 비롯하여 하워드 가느너의 다중지능 이론, 칙센트 미하이의 몰입이론 등 훌륭한 이론들이 학문의 영역에서만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 박물관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박물관이 전통적으로 귀중한 유물과 값비싼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아이들의 접근은 잘 허락되지 않던 권위적인 곳이었으나, 어린이박물관은 그 이름에서부터 답을 알 수 있듯이 바로 ‘어린이’를 위해서 박물관의 문턱을 낮추고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맞이하는 친절한 공간입니다. 어린이가 자신을 위해서 알맞은 크기로 안전하게 제작된 재미있는 전시물들을 직접 체험해보고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놀이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도 있도록 하는 일에 저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녹여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죠.
어떤 역할을 하시나요?
장화정: 하나의 전시를 새로 만들기 위해 아동학, 철학, 교육학, 심리학, 디자인 등 여러 전공의 큐레이터들과 디자이너들이 연구하고, 주제를 발굴하고 조사를 하며 콘텐츠를 구성하고 전시를 연출하는 일들을 디렉터로서 협력하고 총할하는 일을 합니다.
잘 구성된 전시계획안을 토대도 전시제작회사가 기획의도에 맞도록 설계하고 안전하게 제작을 해서 전시장에 설치하죠. 저는 이런 전체 전시개발과정을 리드하고 아이디어를 보태고 여러 전문가들가 토론하고 조율하며 전시의 결과물이 만들어지도록 결정하는 역할이죠.
'마음아 안녕'전 전경
'모두를 응원해'전 전경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으시다면요?
장화정: 여러 전시 사례들이 있겠지만 두 가지만 예로 든다면, 서울상상나라 개관 5주년 기념 기획전 ‘마음아, 안녕! Hello, Heart!(2018)’과 ‘모두를 응원해 Go for It!(2023)’를 들 수 있겠네요.
‘마음아, 안녕! Hello, Heart!’은 제가 직접 기획한 콘텐츠로, 어린이가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며 처리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체험전시입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 감정과 마음을 주제로 전시를 개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 자녀 가정이 많은 요즘 시대 어린이에게 지능의 발달만큼 정서적 발달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어서 만든 전시입니다. 지금은 남양주어린이비전센터에 순회전시를 하고 있어요.
2023년 5월 2일에 개막한 10주년 기념 기획전 ‘모두를 응원해 Go for It!’는 모든 어린이의 빛나는 도전과 행복한 성장을 응원하는 전시로, 도전의 즐거움,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해냈을 때의 성취감과 서로 협동하고 응원하는 따뜻한 마음을 느껴보는 내용입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지친 마음들을 위로하고 마음근력과 회복력을 키워주기 위해 기획한 것으로, 아동학과 박물관교육을 전공한 윤서희 큐레이터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고, 저를 비롯한 학예연구실 팀원과 서울상상나라의 전문가들, 전시회사인 아미랜드 제작진들이 머리를 맞대어 만들었어요.
두 분이 함께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하신다는 것이 매우 뜻깊으실 것 같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이호백: 대학 때부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과 전시 디자인 등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어린이를 위한 전문적인 그래픽과 디자인 등이 체계가 없던 시절이었는데, 결혼 후 프랑스에 함께 체류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선진국의 앞서 있는 모습에 크게 감흥을 받게 됐죠.
귀국 후 저는 길벗어린이를 창립해 어린이 출판사를 시작하게 됐고, 그때 아내도 삼성문화재단에서 새로운 그림책 출판 지원 사업을 기획하게 돼 출판과 전시 분야 등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이 분야의 경력을 각자 독립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저는 그 이후로 길벗어린이에서 독립해 출판사 재미마주를 운영하게 됐고, 아내는 삼성어린이박물관에서 어린이를 위한 전시 기획 일을 하게 됐고, 지금은 서울시가 건립한 서울상상나라 어린이박물관에서 계속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장르지만 어린이를 위한 공통의 철학을 공유해오고 있습니다.
두 분이 갖고 계신 어린이들을 위한 철학 같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호백: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죠. 어린이를 돈벌이의 수단, 시장의 타겟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어린이의 본질에 다가가 어린이와 함께하는 여유로운 친구같은 그런 어린이 문화를 곁에 두자는 것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이분법 적으로 구분되는 책과 시설이 아니고, 어린이와 어른이 자연스럽게 함께 보고 즐기고 배우는 그런 그림책과 전시들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로 구체화될 수 있겠죠.
장화정: 아이의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존중하고 스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일들을 발견하면서 성장하도록 지지하는 역할이 부모에게나 전문가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이도 제가 일하면서 배우게 된 좋은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기르기 위해 노력한 것 같아요.
구름연못
아드님과 며느님도 일러스트 관련 일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이호백: ‘구름연못’이라는 이름의 동양적 사유의 아름다움을 매개로 대중과 소통하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 중입니다. 아들 이담은 프랑스 페닝겐 그래픽 학교(ESAG, Penninghen)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곳에서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동북아시아의 문화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프랑스 게임 회사에서 동양의 음양오행 사상을 담은 ‘겨울 신기루’(Mirages of winter)라는 게임을 만들면서 이런 생각을 구체화하게 됐습니다.
이후 파리에서 만난 자신의 아내와 함께 설립한 스튜디오 '구름연못'에서도 동양철학에 담긴 풍부한 이미지와 언어 체계를 현대적인 접근법으로 다시 해석해 그 심리적이고 심미적인 가능성을 대중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주 명리학을 심미적인 도구로 활용해, 천간과 지지 그리고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을 구시대의 부끄러운 미신이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적 언어로 재해석한 구름연못 그림사주 서비스를 운영중이에요.
앞으로도 동양의 유불도 사상과 동양 미술사를 기반으로한 다양한 컨텐츠를 개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www.instagram.com/lacdenuage_kr
앞으로 두 분의 계획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호백: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만,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 중 발전시킬 것은 발전시키고, 정리할 것은 아카이빙해서 작게나마 어린이 문화의 한 축으로 남아 사람들과 소통해 나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이호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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