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컬쳐 | 리뷰

[스토리⨉디자인] 옷으로 말해요_ 패션은 ‘입을 수 있는 글자’

2021-01-29

패션과 장신구를 사회문화 현상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기호라 봤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저서 <패션 시스템(Système de la mode)>(1967년)과 월간 패션지 <패션의 정원(Le Jardin des Modes)>의 한 기고문에서 “패션이란 사물이 아닌 브랜드가 만든 욕망, 브랜드가 표방하는 ‘꿈’이 아닌 기저에 깔린 ‘의미’를 파는 비즈니스”라고 했다. 바르트가 프랑스 철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패션을 그의 철학적 사유의 주제로 삼았던 1960년대 서구사회는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며 여유 있는 경제 형편과 자유분방해진 사회적 분위기에 취해 있던 소비자 대중과 방만한 소비문화에 저항했고, 반문화 운동을 주도한 지식인과 청년들이 공존하며 이념적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1967년 시사주간지 <타임> 발행 발렌타인데이 기념 별간지 표지에 실린 종이 드레스 디자인. 흑색 종이 위 백색 문자를 연상시키는 ‘옵 아트’ 효과를 이용해서 구독자들의 주목을 끌며 문자 메시지 전달, 매체로써 패션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Courtesy: Museum für Kunst und Gewerbe Hamburg. Collection: Campe’sche Historische Kunststiftung. Photo: MK&G

 

 

1960년대 미국에서는 종이 드레스가 등장해 여성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화장지 생산업체 스콧(Scott Paper Co.) 사는 젖어도 찢어지지 않는 키친타월 신제품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구매자가 쿠폰에 1달러를 넣어 우편으로 보내면 일회용 드레스를 우편으로 배송해 주는 마케팅을 실시했다. 여성과 주부들 사이서 큰 인기를 모으며 미국은 물론 영국의 가공식품업체와 언론사들은 물론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도 뒤따라 모방한 이 ‘종이 드레스 마케팅’은 오늘날 텍스트와 패션의 접목이 점화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보여준 성공 사례로 남아있다. 종이 드레스의 등장과 놀라운 성공으로 ‘의복은 반드시 직물을 원단으로 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옷은 구호와 선언을 전달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포스터 또는 팸플릿이 될 수 있음을 대중의 뇌리에 심어줬다.

 

쟝-샤를르 드 카스텔바작(Jean Charles de Castelbajac, 여성용 재킷, 1983년, 면과 혼방 섬유. Museum für Kunst und Gewerbe Hamburg ⓒ Jean Charles de Castelbajac, Photo: MK&G 

 

 

각종 전자 미디어와 광고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입는 옷들도 수시로 정보를 전달한다. 어패럴은 브랜드와 로고로 어떤 가격대에 어떤 가치관과 태도(attitude)를 추구하는 상품인지를 소비자에게 알리고 소비자의 마음에 어필한다. 디자이너의 의도에 따른 브랜드 로고, 폰트, 위트 있거나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있을 법한 메시지, 정치적 구호 등의 텍스트는 어패럴 디자인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입은 주인의 내면세계나 사적 의중을 은연중에 내보여주는 교묘한 기호이기도 하다.

 


전통 직조 방식으로 제조된 원단 패턴을 의복 디자인의 일부로 활용한 가브리엘르 ‘코코’ 샤넬의 고전주의(가운데)와 신소재 하이테크 미학을 내세운 쿠레쥬(André Courrèges)의 유선형 미래주의(오른쪽 검은색 드레스) 사이의 치열한 각축은 프랑스 패션사에 길이 전해오는 전설이다. Courtesy: Museum für Kunst und Gewerbe Hamburg. Photo: Henning Rogge 

 

 

우리말로 문구라는 의미의 ‘텍스트(text)’는 본래 텍스타일(직물, textile)에서 근원했는데, 텍스트와 텍스타일은 둘 다 라틴어 ‘textus’로 ‘짜다’, ’엮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낱말과 단어를 합치고 엮어 구성하는 ‘텍스트’라는 기록 문자와 짜고 엮고 떠서 만든 직물로 드레스, 바지, 윗도리를 만드는 작업과 개념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예컨대 그 같은 콘셉트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디자이너로 현대 패션계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는 ‘안트베르펜파’ 소속의 디자이너 월터 반 베이렌동크(Water Van Beirendonck)는 선명한 원색 색상의 어패럴에 자카드 직물, 붕대 뜨개질, 자수, 레이저 절단 등 폭넓은 재봉 기법으로 텍스트 메시지를 구성하듯 옷을 창조하는 기법을 미학적 전략으로 채용한 대표적 사례다.

 


월터 반 베이렌통크는 텍스트적 유희를 미학적 요소로 삼아 옷을 디자인한다. 저급한 욕설(‘fuck’)과 고급 문학 속 구절(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백조의 길>) 또는 데스 펑크 음악과 신변잡기적 낙서에 이르기까지 기존 범주의 문화의 상·하위 및 형식 사이의 경계선을 흐트러뜨리는 전복적 스타일이 특징적이다. Walter Van Beirendonck Fall/Winter Collection 2020-2021, W.A.R. - Walter About Rights, ‘I hate fashion copycats.’ Courtesy: Museum für Kunst und Gewerbe Hamburg. Collection: Stiftung Hamburger Kunstsammlungen. Photo: Dan Lecca for Walter Van Beirendonck 

 

 

패션 디자이너들은 문자와 서체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바르트의 기호학이 패션에 담긴 현대인들의 심리와 사회문화적 순응 습관을 가차 없이 분석했던 1967년, 대서양 건너편 캐나다에서는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미디어는 마사지다(The Medium is the Massage)>라는 책을 펴내고 “패션은 인간의 형체를 재맥락화・재구성시키는 매체”라고 선언했다. 즉, 옷은 더 이상 체온 조절과 외부 자극에 대한 보호 기제가 아니라 옷을 입은 자의 사회적 정체성과 예술적 표현 수단이라는 것이다.

 

기록 문자는 내용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때로 내용은 어떤 활자체 또는 폰트로 기록되었는가에 따라서 새로운 메시지로 전달되거나 재해석되기도 한다. 예컨대, 볼드체나 이탤릭체는 주의를 요하는 어휘나 문구를 두드러져 보이도록 강조한다. 곡선적이고 동적인 활자체는 정적인 내용에 음악적 율동감과 감정 유발을 자극한다. 두드러지게 엄격하거나 장난스러운 분위기의 서체는 형식과 내용에 연관된 감정을 자극하여 보는 이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데 효과적이다. 

 


다양한 텍스트 문구와 서체를 응용한 패션 디자인. 왼쪽부터 Devon Halfnight LeFlufy, Raf Simons, Sterling Ruby, <타임>지 종이 드레스, Devon Halfnight LeFlufy, Rosella Jardini (Moschino). Photo: Henning Rogge

 

 

물론 롤랑 바르트는 패션을 순수한 메시지 전달용 미디어라 본 맥루한의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펄쩍 뛸 것이다. 바르트에게 패션이란 일련의 시스템, 즉 정해진 수의 요소와 규칙 속에서 만남 상대-장소-시간-목적에 따라 소비자들이 응용하는 사회적 코드다. 학생용 교복이나 직업용 작업복처럼 기능성이 분명한 의복 이외에 거의 모든 의류는 한가하고 여유로운 생활과 고급스러움을 자랑하기 위한 과시에 봉사한다. 패션 디자이너들도 브랜드가 대담하게 찍힌 의류들이 고객들의 미적 감각, 유행에 대한 민감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력을 시그널 해주는 사회경제적 지표 역할을 해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플로라 미란다(Flora Miranda), ‘머신러닝 응용(Machine Learning Applied’ 오버롤, 2019년, 비스코스와 루렉스사로 기계자수, 보디 소재: 폴리아미드. Tüll Museum für Kunst und Gewerbe Hamburg. Collection:  Stiftung Hamburger Kunstsammlungen ⓒ Flora Miranda, Photo: Laetitia Bica

 

 

예컨대, 19세기 프랑스 사교계에서 큰 명성을 누렸던 영국 출신의 재봉사 찰스 프레드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는 브랜드=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기호임을 익히 알고 이를 잘 활용했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아내 외젠니 여제의 드레스 제작사인 명성을 이용해 자신이 디자인한 드레스 마다에 서명을 새겨 넣는 브랜딩 전략으로 양장사에서 의복 예술가로 입지를 굳혔다. 그 같은 연장선상에서 현대 디자이너들은 한층 더 세련되고 영리한 브랜딩과 로고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패션 하우스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네 땀의 흰 실로 스티칭한 특유의 흰색 라벨 아이덴티티는 인사이더 사이에서 통용되는 아는 자들 만의 기호가 되어 패셔니스타들을 유혹한다.

 

후세인 샬라얀의 항공우편 드레스(오른쪽에서 두 번째 흰색 작품), 1993년. Photo: Henning Rogge

 


항공우편 드레스. Courtesy: Sotheby’s

 

 

1960년대에 종이 드레스가 소비자들을 반짝 열광시킨 후 갑자기 사라진지 약 40년이 지난 후인 1993년,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후세인 샬라얀(Hussein Chalayan)은 다시 한번 ‘에어메일 드레스(Airmail Dress)’라는 종이 드레스를 선보였다. 백지상태의 재래식 항공우편 편지지와 봉투를 모티프로 한 이 자못 시적인 이 작품을 통해서 샬라얀은 실시간 전자로 숨 가쁘게 교류되는 문자와 의미들의 홍수 속에서 잠시나마 손편지를 보내는 자와 받는 자 사이 쓰이고 전달될 미지의 스토리와 느림의 가치를 상상해 보라고 권유하는 것을 아닐까? 

 

글_ 박진아 객원편집위원(jina@jinapark.net)

사진제공_ Museum für Kunst und Gewerbe Hamburg ‘패션의 언어(TheLanguage of Fashion)’전(2020년 8월 14일~2022년 10월 31일, 코로나19로 박물관 휴관중)

facebook twitter

#입을수있는글자 #패션 #구호와선언전달 #하이브리드포스터 #팸플릿 #옷 #의복 #어패럴 #어패럴디자인 #기호 #텍스트 #기호학이담긴패션 #종이드레스 #패션의언어 #스토리디자인 

박진아 칼럼니스트
미술평론가, 디자인 및 IT 경제 트렌드 평론가, 번역가이다. 뉴스위크 한국판, 월간디자인의 기자를 지냈고,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 뉴욕 모마, 베니스 페기 구겐하임 갤러리에서 미술관 전시 연구기획을 했다. 현재 미술 및 디자인 웹사이트 jinapark.net을 운영하고 있다.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