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5
언제부턴가 ‘구멍가게’라는 말은 추억을 끄집어 낼 때나 쓰는 말이 돼 버렸다. 시골길을 여행하며 들렀던 구멍가게는 작지만 풍요로웠고, 낯설었지만 정겨웠다. 그래서인지 시골의 고즈넉한 풍경이 아니더라도, 도시의 골목길에서 간혹 작은 가게들을 만나면 괜히 반갑고 그렇다.
이런 구멍가게들이 점점 보기 힘든 곳이 되어가는 것 같아 아쉽다. 건물이 낡아 부분적으로 손을 보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개발로 흔적이 사라지거나 편의점이 대신 터를 잡기도 한다. 그래도 이미경 작가의 그림에선 구멍가게의 그 친근하고 따뜻한 감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이미경, <신거슈퍼>
이미경, <복사꽃가게>
이미경, <해남 우리슈퍼>
이미경 작가는 퇴촌으로 이사를 한 후 동네 구멍가게를 만나게 됐다고 한다. 작가에게 구멍가게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매일 들르다시피했던 가게였어요. 그런데 ‘아, 그림으로 그리면 되겠구나.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낡아있는 모습에 빛이 닿은 그 모습이 어느 순간 불현듯 무척 아름답게 와닿았어요.”
그녀가 본 구멍가게의 풍경과 그곳에서의 느낌은 가정을 꾸리고 육아를 하면서 잠시 멈췄던 그림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를 일깨웠고, 그녀는 펜으로 구멍가게를 그리기 시작했다. 두 달여 시간에 걸쳐 완성된 그림에서 포근하고 따뜻했던 기억 속 구멍가게를 발견한 그녀는 구멍가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23년 동안 구멍가게를 그리고 있다. “그림으로 그려진 구멍가게는 시간을 마치 어린 시절 한순간으로 되돌려준 것 같았어요. 더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한 곳 두 곳 늘어나 지금에 이르게 됐어요.”
이미경, <고려상회>
고려상회에서. 작가는 전국의 구멍가게를 찾아 다니며 구멍가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취재의 과정을 되도록 지키고자 한다.
그녀에게 구멍가게를 찾고 화폭에 담는 행위는 일종의 다큐 작업이다. 작가는 단순히 구멍가게를 찾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삶과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림을 그리면서 구멍가게의 기억과 추억들을 되살리기도 하는데 지금은 양철지붕으로 바뀌었지만 과거의 초가지붕이 더 정겨웠다면 예전의 모습을 그리고, 도로 확장으로 사람들의 쉼터였던 가게 앞 느티나무와 평상이 없어져 아쉽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림 속에 정이 묻어있는 나무와 평상을 그려 넣기도 한다.
이미경, <당리가게>
작가가 카메라로 촬영한 당리가게의 모습
단정한 선들과 시간의 응축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그림에선 압도적인 섬세함을 느낄 수 있는데, 작가가 펜화를 고집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더디긴 하지만 펜화가 제 작업과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선이 겹쳐져 면과 색을 완성하는 작업을 하면서 저도 인내하고 견뎌야 할 때가 있는데요, 그런 점이 어떠한 면에선 구멍가게 주인들의 삶과 비슷하기도 해요.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는 거죠.”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바느질을 하듯 펜촉에 잉크를 묻혀 그린 짧은 선 하나하나가 구멍가게의 오랜 세월만큼 많은 감정을 담은 한 점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이미경 작가는 최근에 두 번째 그림 에세이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를 출간했다. 전국 각지에서 만난 구멍가게들의 그림과 구멍가게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첫 번째 책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을 쓰고 나서 더 이상 찾아뵙고 싶어도 찾아뵐 수 없게 된 구멍가게 어르신들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리며 이번 책은 아직까지 열려있는 가게들을 위주로 구성했다. “이번 책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쓰는 동안에도 닫힌 가게들이 있지만, 그분들의 삶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어요. 그분들을 위한, 그분들에게 바치는 글과 그림이에요.”
이미경 작가의 두 번째 그림 에세이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 위치한 구멍가게들의 그림과 작업의 여정, 구멍가게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책에는 서울뿐 아니라 남해, 제주도까지 각 지역의 아름다운 구멍가게 그림들, 그리고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는 작가의 여정부터, 구멍가게의 이야기, 작가의 어릴 적 골목에 대한 추억, 지금은 사라진 골목에 얽힌 정겨운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그녀가 그린 작은 구멍가게는 한국뿐 아니라 해외의 언론에서도 주목할 정도로 화제가 됐지만, 처음 구멍가게를 그릴 때 작가는 구멍가게 그림을 전혀 세상에 내보일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에겐 소중하지만 남들은 별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구멍가게를 찾고 그리면서 그녀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180도 달라졌다.
“처음 구멍가게를 그리기 시작했을 땐 육아를 하면서 작업을 많이 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작업에 대한 욕구, 미술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앞날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들이 굉장히 컸어요. 구멍가게를 한 곳 두 곳 그리면서 그런 감정들이 해소가 됐고 이 작품들이 날 위로해 주는 걸 느꼈어요. 절 견디게 해준 힘이 된 거죠. 세상에 그림을 내보이기 시작한 후부턴 절 밀어준 힘이 됐고요. 구멍가게를 만나기 전에 했던 작업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업들이었는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저에게 소중한 것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어요. 인생의 중심이 달라지게 된 거죠.
이미경 작가의 작품은 구멍가게를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도 인기가 좋은데 작가는 그 이유를 ‘근본적인 향수’라 말했다. “반짝반짝한 것을 동경한다 해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새로운 환경이 신기할 순 있지만 오래 머무르기엔 낯설고 불편하잖아요. 우리가 결국 마음 편하게 있을 곳은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구멍가게 역시 낡고 오래된 곳이지만 정겨움이 내재돼 있는 공간이고요.”
구멍가게 그림들에서 좋았던 것은 아름다운 구멍가게의 모습, 섬세한 표현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작가가 전하는 구멍가게의 감성이었다.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수많은 이야기들이 작가의 손끝을 통해 빛났다.
이미경 작가
작가는 구멍가게 그림을 통해 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구멍가게를 찾고 그리고 알리는 것에는 삶을 살아내는 모습이 담겨있지 않나 싶어요. 성공지향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성공만 쫓을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걸 성장시키고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에겐 작은 구멍가게가 꿈 같은 것인데요, 구멍가게라는 나만의 꿈을 계속 닦고 키웠더니 슈퍼도 되고 마트도 되고 백화점도 되는 것처럼 작다고 무시하지 말고 자신이 가진 걸 보석같이 소중히 여기고 성장시켜나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갤러리이마주 전시 전경. 24점의 신작이 전시된다.
그동안 얼마나 나 자신에게 솔직했나 생각해 보게 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진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왔는지. 나를 위한 편안함, 진짜 내가 원하는 꿈을 들여다보게 해줄 이미경 작가의 작품은 오는 7월 11일까지 갤러리이마주에서 전시된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이미경 작가(www.leem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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