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6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둔 지금, 최초의 근대적 선거였던 1948년 5·10 제헌국회의원선거부터 올해 4·15총선까지 73년 선거의 역사를 통해 선거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의 삶과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전개시켜왔는지를 살펴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새일꾼 1948-2020: 여러분의 대표를 뽑아 국회로 보내시오’ 전시장 입구 (사진제공: 일민미술관)
일민미술관 및 신문박물관 전관에서 열리고 있는 ‘새일꾼 1948-2020: 여러분의 대표를 뽑아 국회로 보내시오’는 일민미술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동 주최로 선보이는 전시로, 한국 선거사 아카이브와 사회극을 결합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73년의 선거 역사가 기록돼 있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기록보존소 소장 자료와 함께, 이를 기반으로 선거사를 설치, 퍼포먼스, 문학, 드라마, 게임, 음악 등으로 다양하게 재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에는 김대환, 김을지로, 놀공, 박혜수, 안규철, 양경렬, 업체 eobchae, 옵티컬레이스(김형재 박재현), 윤현학, 이동시, 이미정, 일상의 실천, 정윤선, 조은하, 천경우, 최이다, 최하늘, 한솔, 홍유경, OOO, Sasa[44] 등 21명(팀)의 작가들이 참여하며, 전시는 일민미술관 1~3층, 동 건물 5, 6층에 위치한 신물박물관에서 총 5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1층에서는 ‘애국자가 누구냐’를 주제로, 최초의 선거였던 1948년 5·10 제헌국회의원선거를 비롯해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선거 아카이브를 통해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살펴보고 선거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작품들을 전시한다.
민주화 아카이브와 함께 전시된 작가들의 작품 ⓒ Design Jungle
전시장 중앙에 놓인 여러 개의 의자들은 천경우 작가의 <Listener’s Chair>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자 하는 사람만 참여하는 관객 참여 작품이다. 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는 미술관 외부에 설치된 ‘스피치 룸’에서 수집된 다양한 참여자(speaker)들의 개별적인 사연이다. 에디터가 앉은 자리에서는 중국어로 된 사연이 흘러나왔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경청했고, 경청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벽면에는 회색과 파스텔 색조로 이루어진 69개의 캔버스가 설치돼 있다. 역대 대통령선거벽보에서 후보자의 시선, 표정, 제스처를 지우고 선거 구호만을 남겨 모노크롬 회화로 전환한 안규철 작가의 <69개의 약속>인데, 많은 캔버스가 비슷한 색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놀랍다. 벽보 속 다양한 색을 하나의 평균값으로 도출한 이 작업은 약화된 변별력, 반복되는 이상적인 미래에 대한 문구, 우리의 현재를 보여준다.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는 민주화 아카이브 역시 작가들이 구성한 것으로, 흥미롭게 선거의 역사와 의미를 전한다.
관객 참여형 게임, 놀공의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 Design Jungle
1963~1987년도의 선거 홍보 포스터 ⓒ Design Jungle
2층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투표 안내소’를 볼 수 있다. 놀공의 <반드시 해내겠습니다!!!>라는 이 작품은 총 19번의 대통령선거를 새로운 과정으로 경험시켜주는 관객 참여형 게임이다. 관객은 후보의 이름이나 정당이 아닌 공약만으로 후보들을 선택하게 되고, 그 결과는 모니터를 통해 확인된다. 비록 게임이지만 대통령이 바뀌는 이 경험은 공약을 고민하는 과정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우리의 올바른 선택과 그 기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한 표 찾아 팔도강산’이라는 주제로 꾸며진 2층 공간은 선거유세장을 자기표현 및 교류의 행위로써 일상화된 퍼포먼스의 장으로 재현한다. 후보자들의 선거 포스터, 표어 등과 함께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각이 전시되는데, 경합, 갈등, 축제 등이 공존하는 일종의 페스티벌을 선보인다.
<얼굴들 2020>, Sasa[44], 관객 참여형 작품으로 참여자들의 사진으로 벽이 채워진다. ⓒ Design Jungle
<동물은 어떻게 투표하는가>, 이동시, 빨간선 안쪽은 인간출입금지구역이다. ⓒ Design Jungle
<얼굴들 2020>(Sasa[44])은 얼굴을 포함한 관객의 정보와 투표했던 역대 대통령 후보들의 목록을 수집, 전시하는 관객 참여형 작품이다. <동물은 어떻게 투표하는가>(이동시)는 곰, 말, 닭, 곤충이 투표하는 모습을 조각작품으로 설치한 동물들의 투표를 가정해 선거문화에서 소외돼 온 주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인포그래픽 작품 <I WAS, I AM, I WILL>(옵티컬레이스)에서는 각기 다른 시대와 연령대에 걸친 정치인들의 활동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한국몽>, 최하늘 ⓒ Design Jungle
전시장 중앙에 설치된 여러 개의 조형물은 최하늘 작가의 <한국몽>이다. 알록달록한 색과 모호한 형태의 작품들은 난민, 이주노동자, 미혼모, 동성애자 등의 소수자 집단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상상을 담은 조각상이다. ‘당선기념 공연은 토요일 12시 이태원 트랜스에서 열립니다’, ‘제가 너무 바빠서 당선 소감은 생략할게요’, ‘이 영광을 투옌년비엣남에게 돌립니다’ 등 5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진다.
제3·대 정·부통령선거 후보 선거벽보를 배경으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 Design Jungle
1963~1987 선거 홍보 포스터, 제3·대 정·부통령선거 후보 선거벽보 등의 선거운동 아카이브가 함께 전시된다.
부정선거의 역사와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볼 수 있다. ⓒ Design Jungle
3층 ‘대단히 ○○○한 투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는 부정선거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선거사가 펼쳐진다. 아카이브를 통한 부정선거의 역사와 2020년 선거법에 적용해 본 프로파간다의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국가: 유토피아>, 일상의 실천 (사진제공: 일민미술관)
대통령들의 선거 벽보 속 400여 개의 단어 수집으로 이루어진 <이상국가: 유토피아>(일상의 실천)는 관객이 참여해 자신이 원하는 이상 국가의 단어를 직접 조합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시장엔 수집된 단어들이 새겨진 레터프레스가 전시돼 있고, 관객은 원하는 단어를 조합해 이상 국가의 문장을 직접 만들 수 있다. 가시적인 형태로 완성되는 ‘실체 없는 내일’, ‘불완전한 선언’이다.
ⓒ Design Jungle
<광화문체육관- ‘부정의 추억’>, 정윤선 (사진제공: 일민미술관)
체육관과 포차를 동시에 연상시키는 <광화문체육관- ‘부정의 추억’>(정윤선)은 ‘체육관 선거’가 이뤄졌던 장충체육관과 ‘막걸리 선거’가 펼쳐졌던 유세장을 재구성한 작품으로, 부정선거를 추적하는 공간이다.
<웅변술에 관한 지침>, 윤현학 (사진제공: 일민미술관)
이 밖에도 독재자 동상들의 반복적 제스처의 근원을 탐구, 결과를 공간에 전시하며, 제스처 매뉴얼을 몸으로 익히는 과정을 보여주는 <웅변술에 관한 지침>(윤현학) 등의 작품들은 이상국가는 불가능한 것인지, 한국의 선거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역사를 소개하는 ‘선거 24’. 매주 진행되는 ‘Weekly Vote’의 개표도 이루어진다. ⓒ Design Jungle
5층에서는 ‘선거 24’시를 주제로 공정한 선거를 만들기 위한 선거관리위원회의 역사를 소개한다.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 불리는 종로의 역대 국회의원선거 당선자 선거벽보를 비롯해 투표함, 투표용지 및 기표용구, 선거에 사용된 표찰 등의 선거관리위원회 아카이브가 전시되고, 1층에서 매주 새로운 주제에 대해 진행되는 ‘Weekly Vote’의 개표가 시연된다.
전시장 곳곳의 <선전탑>(조은하)에서 암호처럼 띄엄 띄엄 흘러나오는 정치인들의 연설 내용도 귀를 사로잡는다.
‘미디어라운지 Election & Book’ ⓒ Design Jungle
6층 ‘미디어라운지 Election & Book’에서는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이해 ‘선거’와 ‘민주주의’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수집, 토의해 제작한 영상 <2020 Election Word Collection>이 상영되며, 선거와 관련된 다양한 도서자료들이 전시된다. 선거에 대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액티비티를 제공하는 이곳에서는 디지털 선거벽보 만들기, 총선거 기념우표 스탬프 체험 등의 참여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전시 기간 동안에는 입법 극장, 개표 퍼포먼스, 작가들의 작품과 연계된 퍼포먼스가 진행되며, ALAND, OOO과의 컬래버레이션 전시 굿즈도 만날 수 있다.
전시 오픈 일 다음 날인 3월 25일에는 <도래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노래>가 발매됐다. 밀레니얼세대의 전자음악가, 디자이너, 기획자의 참여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전시 연계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온라인 음원사이트를 통해 공개된 음원은 밀레니얼 세대 전자음악가 다섯 팀이 제작한 미래 세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으로, 선거 제도에 ‘투표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The Songs for the NOT-YETs)’라는 질문을 던진다.
<도래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노래>, 디자인: 개개인 (사진제공: 일민미술관)
삽지 중 일부 이미지, 디자인: 개개인 (사진제공: 일민미술관)
앨범의 커버 디자인은 프로젝트 디자인 그룹 ‘개개인’이 맡았다. ‘사람들은 같은 원을 늘 새롭게 돈다’라는 문장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재해석한 120개의 주석과 그림 중, 각 트랙과 어울리는 5개의 주석과 그림을 매칭해 앨범 삽지로 수록했고, 선별한 다섯 개의 일러스트를 재구성해 앨범커버를 디자인했다. 그림과 글, 음악, 청자의 관점이 또 다른 해석을 만들어내는 재미를 주는 이 음반은 기성세대의 소리 기록 매체인 바이닐(LP)로 한정 제작돼 4월 7일 발매된다.
광화문 집회 공간이 눈앞에 보이는 일민미술관 외벽에는 ‘새일꾼’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걸렸고, 이제 우리는 곧 선택을 해야 한다. 선거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고 확대하는 과정, 선거와 투표가 동시대 예술의 플랫폼이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전하는 이번 전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의미 있는 선택을 하게 할 것이다. 전시는 6월 21일까지.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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