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9
비엔나 디자인 위크 2019를 통해 본 디자인 솔루션
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6일까지 열흘 동안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비엔나 디자인 위크 2019(Vienna Design Week 2019)’가 열렸다. 매년 가을 비엔나에서 릴리 홀라인(Lilli Hollein) 총감독의 지휘로 열리는 연례 디자인 페스티벌은 올해 ‘디자인으로 가득 찬 도시(City Full of Design)’라는 대주제 아래 오늘날 오스트리아와 주변 유럽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진단하는 사회문제와 해결책을 조명했다.
오스트리아의 디자인공방 비엔나 모더니즘 2.0(Wiener Moderne 2.0)이 선보인 실내용품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현대미술가와 디자이너들과 협업으로 디자인됐다. 올해 ‘비엔나 디자인 위크 페스티벌’ 기간 동안 비엔나 도심 케른트너슈트라세 6번지에 위치한 매장에서 동시 전시됐다. Photo: Philipp Lipiarsky
MZ들이 바라보는 세상
21세기로 접어든 후 디자인계는 디자이너들에게 정치 갈등, 경제 위기, 환경파괴 끝에 빚어진 온갖 사회문제에 솔루션을 제시하는 해결사가 되라고 재촉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세상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모바일 인터넷 통신 기술에 힘입어 24시간 소셜미디어 환경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세계 지정학적 갈등은 테러리즘을 낳고, 주기적으로 닥치는 금융위기와 경제 저성장은 고용 위기와 불안감을 야기하며, 기후변화에 대한 획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지구가 지속가능할 것이라 경고한다.
비엔나 황제가구박물관(Hofmobiliendepot)에서 영구 전시 중인 비더마이어 시대풍 가구가 있는 실내장식. 작고 낮은 천장의 한 칸짜리 방에 침대, 다용도 테이블, 의자, 옷장이 갖춰져 있는 이 방은 오늘날 현대 젊은이들이 사는 원룸의 원형이다. Courtesy: Hofmobiliendepot / Möbel Museum Wien
오스트리아의 2인조 디자인팀 흐마라.로진케(chmara.rosinke)가 디자인한 모바일 주방(Mobile Kitchens)은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이란 단지 집 안의 공간이 아니라 이동이 가능한 손님 환대시설이자 주변 환경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립, 변형되는 라이프스타일 툴이라 재정의한다. 미니멀하지만 기능적인 DIY 수공예 룩이 특징적이다. ⓒ chmara.rosinke
밀레니얼과 Z세대는 이제 우리 사회 속에서 새로운 대중문화 유행의 선도자 겸 크리에이터인 동시에 전방위 총체적 ‘디스럽트(Dsirupt)’의 홍수 속에서 부유하는 소비자로 자리 잡았다. 글로벌 경제 및 회계자문회사 딜로이트(Deloitte)가 올해 발표한 ’2019년 글로벌 밀레니얼 연구(The Deloitte Global Milllennial Survey 2019)’ 리포트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 두 젊은이 세대를 뭉뚱그려 현대의 사회적 분열과 테크 전환이 빚어낸 ‘디스럽트된 세대(a generation disrupted)’라고 정의한다.
야콥 글라스너(Jakob Glasner)가 디자인한 ‘컨템퍼러리 실버웨어(Contemporary Silverware)’는 음식과 관련된 각종 현대적 금기와 규율-예컨대, 계율적으로 금지 허락된 음식, 특수 식이요법, 다이어트 등-로 인해 사회적으로 복잡해진 식문화를 테이블용 식기 디자인으로 풍자했다.
흔히 ‘디스럽트’는 기술 혁신과 획기적인 비즈니스의 산실로 알려지 있는 실리콘밸리의 창업정신과 기업가 문화가 높이 사는 위험감수성, 민첩성, 눈부신 성장과 결부돼 긍정적 경제적 효과라 받아들여진다. 특히 지난 약 10년 사이 급속화되고 있는 첨단 과학기술 기반의 4차 산업혁명은 무한한 경제성장과 새로운 고용기회를 창출할 것이라고 기약한다.
그런가 하면 테크 주도의 디스럽트는 기성사회구조와 경제체제를 인정사정없이 동요시키고 파괴하기도 한다. 급변한 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조직을 가차 없이 도태로 내몰기도 하는 디스럽트는 후유증을 가져올 수도 있다. 특히 2008~9년 국제금융위기를 촉발로 지난 10여 년 구조화된 저성장 경제와 노동시장의 변화를 경험하며 제도권 교육체제 속에서 취업과 경력관리를 하며 사회인으로서 개인적 성숙을 거치고 있는 MZ세대 젊은이들의 정서는 사뭇 염세적이다.
비엔나 응용미술대학(Universität für angewandte Kunst Wien) 학생들이 결성한 디자인 인베스티게이션(Design Investigations)팀의 ‘민주주의의 미래(FUTURES OF DEMOCRACY?)’ 프로젝트. 젊은 세대는 모바일 인터넷 기기와 친숙하지만 동시에 데이터의 디지털화, 인공지능, 안면인식 기술의 세련화가 민주주의와 사이버 보안을 침해할 것이란 우려가 큰 세대임을 반영한다. Photos: Jina Park
새로운 디자인 문화와 소비 트렌드를 이끄는 밀레니얼(’Y세대’로도 불리는 23~38세 연령대 인구)과 Z세대(2019년 기준 글로벌 인구의 32%를 차지하는 22세 이하 인구)는 이제 디자인의 가치와 기능적 개념을 사실상 재편했다. 패키징 디자인에서 모바일 기기의 UI/UX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을 일상에서 ‘‘무슨 용도’로 ‘어떻게’ 활용하나’에 중점을 둔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이 지배하는 테크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고 있는 젊은 세대가 주도한 세상의 디자인 미학은 심플하며 호감 가고 사용 경험이 유려한 기능주의 비주얼이 대세다.
EOOS 디자인 스튜디오와 오스트리아의 식수 생산업체 푀슬라우어(Vöslauer)가 협력으로 개발한 순환 샤워(Circular Shower) 시스템. EOOS가 개발한 식물을 이용한 오수처리 시스템은 하수도의 물을 깨끗한 물로 정화시킨다. Photo: Jina Park
타마라 바우어(Tamara Bauer)와 나타샤 이케르트(Natascha Ickert)가 디자인한 ‘자취 탐색기(Spürensuche- Hinter die Fassaden hören!)’는 스마트폰과 집안 먼지 흡입기를 연동시켜 문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식구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보안체제다. 글로벌화로 범죄율 증가와 공공 치안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한 테크 디자인 솔루션이다. ⓒ Tamara Bauer & Natascha Ickert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20세기 후반기까지만 해도 눈부신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는 정치적 갈등, 경제 불평등, 삐걱대는 정부와 행정을 덮어줬다. 그 속에서 디자인은 산업화로 인한 경제성장의 역군, 편리하고 기능적인 공산품과 소비재를 보기 좋게 꾸며주는 외장과 포장, 기왕이면 다홍치마 격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더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더해주는 미적 부가가치였다.
스위스의 백팩 제조업체 퀘스천(QWSTION)이 개발한 바나나텍스(Bananatex®)는 바나나에서 추출한 섬유다. 방수성이 좋고 견고해서 건축과 디자인용품 소재로 쓰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폐기되면 자연분해되기 때문에 플라스틱을 대체하는 친환경 섬유가 될 잠재력이 큰 소재이나 아직은 생산비가 높다는 것이 숙제로 남아있다. Photo: QWESTION
실리콘밸리식 비즈니스 혁신 문화와 글로벌 인구통계학적 지형 변화가 주도돼 디자인의 의무와 실무도 변했다. MZ세대는 지난 반세기 여에 걸친 후기산업사회 소비시장에서 홍수를 이뤘던 과잉 가공된 판박이 대량생산 가공식, 공산품, 소비재에 ‘이제 그만!’을 외치는 세대이기도 하다. 가짜와 가식으로 포장된 상품 대신 개별화된 성의와 수공적 손길이 느껴지는 진정성(authenticity) 담긴 디자인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요즘 세상과 소비자들의 기대치와 요구 사항은 너무 높고도 많다. 오스트리아의 타일 제조업체인 카락(Karak)은 비엔나 디자인 위크 행사장 맞은편 율리우스-탄들러 광장에 임시 모바일 공예공방을 설치하고, 지나가는 관객 누구나 공공장소를 아름답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직접 만들어 볼 것을 권유하는 시민참여 이벤트를 진행했다. ⓒ Philip Heckhausen
디자인의 착상-실행-완성에 이르는 창조 과정도 달라졌다. 과거 디자인이란 기업 내 디자인 부서 소속의 산업 디자이너가 최적의 생산가와 효율적 제조 라인에 맞춘 대량생산품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디자인은 디자이너와 소비자 모두의 개성과 창의성이라는 가치관과 목표점을 향해 여러 전문지식을 보유한 전문가들이 협력해 콘텐츠를 창출하는 ‘창조적 여정’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강철은 무겁고 경직된 소재’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공기처럼 가볍고 경쾌한 인테리어 아이템으로 반전시킨 독일 출신 디자이너 세바스티안 멘쉬호른(Sebastian Menschhorn)의 ‘구름 컬럭션(Cloud Collection)’ 디자인. 오스트리아의 첨단 강철 제조업체 더 스틸(The Steel) 사 생산. 기획: Engelstein & Grünberger Studios
영국의 행복 전문가이자 런던 정치 경제대학 교수 폴 돌란(Paul Dolan)은 ‘행복이란 소소한 기대를 충족시키며 살 때 성취하기 쉽다’고 말했다. 때론 우리는 이 탈 많고 심각한 문제거리들로 산재한 현실을 잠시 제쳐두고 행복감을 안겨주는, 작지만 예쁜 주변으로 눈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사회문제와 쟁점에 경각심을 자극하고 문제 해결사로서의 완장을 벗고 때론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사하는 행복메신저이고 싶다.
글_ 박진아 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jina@jinapark.net)
Images courtesy: VIENNA DESIGN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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