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4
동시대 작가 중 단연 돋보이는 행보를 보여온 양해규 작가의 개인전이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의 전시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양혜규 작가의 네 번째 국내 개인전이다.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볼프강 한 미술상을 수상하고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양혜규 작가는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서기 2000년이 오면’.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러한 전시의 제목의 궁금하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전시전경, 국제갤러리, 서울, 2019,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서기 2000년이 오면’이라는 전시명은 가수 민해경이 1982년 발표한 〈서기 2000년〉이라는 노래제목에서 비롯됐다. 미래에 대한 행복을 꿈꾸는 노래다. 가수 민해경이 이 노래를 불렀을 당시 2000년은 아주 먼 미래였지만 우리는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을 살고 있다. 그때 노래에서 희망했던 것처럼 우리의 2000년은 그러했을까. ‘서기 2000년이 오면’에서는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 우리가 품었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다.
양혜규, 양돌규, 양솔규, 〈보물선〉, 1977, 종이, 수채물감, 크레파스, 액자, 54.5×69.5cm, Private Collection, Seoul,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전시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키워드는 작가가 유년시절 동생들과 그린 그림 〈보물선〉이다. 도깨비와 시조새 등이 등장하는 상상 속 공간을 그린 이 그림은 전시장 입구 오른쪽 유리벽에 설치돼 있다. 전시에 노래와 그림 등의 요소를 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전시전경, 국제갤러리, 서울, 2019,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전시장에 들어서면 공간 전체를 둘러싼 벽지, 바닥을 타고 흐르는 안개, 독특한 냄새, 새소리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벽면을 감싼 벽지 작업 〈배양과 소진〉에는 양파와 마늘, 무지개와 번개, 의료 수술 로봇, 짚풀, 방울 등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과거와 현재, 기술과 문화, 자연과 문명이 융합돼 있는 작품이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전시전경, 국제갤러리, 서울, 2019,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양혜규, 〈소리 나는 운동〉, 2019, 분체도장 스테인리스강 프레임, 분체도장 격자망, 분체도장 손잡이, 강선, 검정 놋쇠 도금된 방울, 니켈 도금된 방울, 금속 고리, 122×70×7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양혜규 스튜디오,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천장에 매달려 있는 구 형태의 작품은 〈소리 나는 운동〉이다. 수많은 방울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품을 회전시킬 때의 모양과 소리는 주술사의 방울을 떠오르게 한다. 바닥에는 짐볼이 자유롭게 굴러다닌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독특한 향기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관람객은 전시를 보며 이 짐볼에 앉을 수도 있다. 전시장 중앙에 있는 블라인드 작업 〈솔 르윗 동차動車〉에도 바퀴가 달려있다. 역시 움직일 수 있는, 운동성이 부여된 작품이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전시전경, 국제갤러리, 서울, 2019,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사진과 같이 〈솔 르윗 동차動車〉를 움직여볼 수 있다.
전시를 둘러보는 동안 들리는 새소리는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때의 새소리다. 남북한의 두 정상이 도보다리 끝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그 장면을 작가는 독일에서 실시간 중계로 보았는데, 천국과 지옥 사이 연옥(limbo)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갑자기 흐르는 정적과 그 사이로 들리는 새소리는 작가로 하여금 매우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뛰어넘는 국면을 느끼게 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전시장 한편에는 텍스트 작업 〈융합과 분산의 연대기-뒤라스와 윤〉이 비치돼 있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의 연대기를 주관적 관점으로 교차편집한 작업으로, 사회적, 역사적 상황 속 이들의 이면 세계가 드러난다.
양혜규 작가는 일반적으로 다르다고 평가되는 두 가지 것들을 병치하는 것이 관심이 많다. 전시 ‘서기 2000년이 오면’ 역시 다양한 시간과 공간, 역사와 문화가 혼재한다.
양혜규 작가,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작가는 기자간담회에도 페이스페인팅을 한 채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편하지 않다는 작가가 ‘변신’을 위해 선택한 한 가지 방법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자신을 향한 기대감을 채우기보다 솔직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작가의 작품은 결코 쉽지 않고 작가 또한 작품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대신 작가는 전시설명문 작업에 열심히 임했다. 노래를 듣고 〈보물선〉을 보고 전시장에 비치된 전시설명문을 보며 작품을 천천히 살펴보다 보면 양혜규 작가만의 어법과 전시에 담긴 이야기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전시는 국제갤러리 K3에서 11월 17일까지 진행되며, 윤이상의 〈영상〉 연주, 드론 축구 비행, 도록 필자 강연 등의 연계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