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6
Y와 X 그리고 그 둘을 잇는 ∞사이에서
남녀평등을 외치는 젠더 뉴트럴 디자인이 몰려온다. 21세기 현대 인류는 그동안 사회와 문화 사이 가로 쳐져 있던 갖가지 경계와 분리선을 없애느라 바쁘다. 성별 구분 철폐! 성중립! 성전환! - 우리는 더 이상 타고난 육체적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사는 무력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더 아름답게, 더 매력적으로, 더 색다르게, 우리의 외모와 아이덴티티를 변형시키고 화장하고 장식하면서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사회적 디자인도 사회 변화과 문화 개혁에 기여한다. 다양하고 다층적인 인간이 모여 살며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디자인은 어떻게 하면 만인에게 공평하게 봉사할 수 있을까? - 유니버설 디자인은 바로 그 접점을 모색한다.
유니섹스 콘셉트를 내세운 유니클로 U 2019년 봄여름 컬렉션. Courtesy: Uniqlo U 홈페이지 캡처
패션은 이미 유니섹스 의류를 일찍이 포용했다. 젊은이들일수록 유니섹스 피복제품을 선입견 없이 폭넓게 포용한다. 여자 아기가 태어나면 분홍색 유아복과 장난감을 사주고, 남자 아기에게는 파란색을 사줘야 한다는 관념도 낡은 사고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가 핵심 소비자층으로 부각되고 있는 요즘, 성별 이분법을 파괴하는 넌바이너리(non-binary) 즉, 유니섹스 패션은 가장 인기있는 핵심 트렌드 중 하나가 됐다.
남자 아기는 파란색, 여자 아기는 분홍색. (왼쪽)〈The Blue Project: Jake and His Blue Things, NY, USA〉, 광제트 인쇄, 2006년 © JeongMee Yoon. (오른쪽)〈The Pink Project: Emily and Her Pink Things, NY, USA〉 2005년 ©JeongMee Yoon. Courtesy: Ulm Museum.
과학기술의 발전과 근대사회가 열리기 시작한 20세기 초, 인류에게 봉사하는 ‘좋은 디자인(good form)’이란 독일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만인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을 뜻했다. 긴 역사를 거쳐 문명이 발전하는 동안 인간과 그 속의 남자와 여자의 사회문화적 위치와 기능은 달라졌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교육의 균등화, 정신 집약적인 문화, 기계화 덕분에 남성과 여성이 타고난 신체적 차이와 성별에 따른 할 일과 기능 사이의 경계는 더 모호해져 간다.
성중립 화장실에서는 남자도 앉아서 여자는 서서 소변을 볼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생겼다? 2017년 미국에 이어 올해 성중립 공중화장실법 개정을 한 스코틀랜드의 학교에 새로 도입된 남녀 공용 화장실 심벌
현대 공공 디자인은 정부 차원의 정책에 힘입어 젠더 디자인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 영국에서는 화장실을 남녀가 함께 쓸 수 있는 공용화장실로 바꿨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영국 리버풀에서는 학교 화장실 공간이 교내 학생들의 흡연, 따돌림 폭력, 무단결석에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학생용 화장실 변기 사이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칸막이를 제거한 새 화장실 디자인을 소개했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의 초등학교에서도 남녀 구분돼 있던 화장실을 ‘유니섹스’ 화장실로 개조했다. 문제는 학교 화장실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수업 중 물 마시길 거부하는 학생들이 늘었으며,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담배 피우는 어린 여자아이는 칠칠치 못한 아이, 담배 피우는 어린 남자아이는 자랑꾼? 1963/65년 독일 울름 디자인 학교에서 제작된 금연 캠페인 광고 사진 Courtesy: Ulm School of Design/Ulm Museum
학교라는 공공시설에서 유일한 ‘사적’인 공간 역할을 해오던 학교 화장실은 어쩌다가 ‘공포의 공간’이 됐을까? 영국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의 남녀 공용 화장실 전환 프로젝트는 본래 시대가 현대화해 갈수록 늘어나는 성소수자(LGBT) 인구에 대한 성적 자의식과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성소수자 권리옹호자들에 따르면, 공공 화장실을 남녀 공용으로 만들어 사적 공간을 가급적 공공 공간으로 전환함으로써 성소수자 학생들 중에서도 특히 성전환자를 향한 따돌림성 학교폭력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태까지 남녀 구분이 가장 뚜렷하던 스포츠계에서조차도 최근 선수의 신앙이나 성별을 쟁점으로 한 경기 참가 자격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1980년대 여자 테니스의 전설인 나브라틸로바는 스스로 LGBT 옹호자이지만 성전환자가 여성 경기에 참여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주장해 LGBT 단체와 충돌했다. 2년 전 미국에서는 크리스 모지어라는 철인 3종 경기 선수가 국가대표로 선발되고 나이키 광고 모델로 기용되어 화재를 모으기도 했다. 여성의 몸을 갖고 태어났지만 남성으로 새 인생을 사는 모지어는 이제 남성용 전립선 보호용 특수 디자인된 자전거 안장에 앉아 자전거를 질주한다.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라 지적되곤 하는 이슬람권에서도 머지않아 여성 스포츠 스타가 나올 때가 됐다. 2017년 ‘나이키 프로 히잡(Nike Pro Hijab)’ 프로젝트의 모델 자이나 나사르(Zaina Nassar) © Nike
공공 공간에서의 사적 활동의 노출이라는 쟁점으로 사회적 논쟁이 멈추지 않는 주제로 공공장소에서 아기에게 모유 수유하기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파 우는 아기에게 젖을 주기 위해 엄마는 장소를 가리 않고 공공장소 아무 데서나 속살을 노출할 자유와 권리가 있는가? 타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은밀한 신체 부위 노출과 수유 활동이라는 타인의 사적 순간을 무조건 너그러이 봐줘야 할 의무가 있는가? -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와 누릴 권리는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나?
체코의 디자인팀 스튜디오 52hours가 디자인한 수유모와 아기를 위한 수유 벤치, 2018년 작 Photo: Gašparović ©52 hours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소수자가 등장할 때마다 기존 질서 내의 영역을 마련해주기 위한 충돌이 빚어지게 마련이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과거 여성을 존중하는 시대와 문화일수록 사회는 배려와 보호 차원에서 여성 전용 화장실이나 사적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그 같은 흔적은 18세기 파리 공공 도서관과 레스토랑과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과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독일 울름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젠더 디자인’ 전시회 포스터 Courtesy: Ulm Museum
디자이너는 의문 던지기를 그칠 수 없다. 과연 인위적으로 남녀 사용자를 중성화시키고 이를 반영한 사회적 디자인은 진정 만인을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뜻할까? 그와 같은 진지한 질문에 대한 실마리는 결국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라는 실존적인 화두에서 시작해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젠더 디자인(Nichtmein Ding: Gender im Design’전은 독일 울름 박물관(Ulm Museum)에서 2월 14일부터 5월 19일까지 열린다.
글_ 박진아(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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