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5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의 주도 산타페 마을(City of Santa Fe). 이곳은 미국 50개 주 중에서 유난히 유럽, 남미의 정취가 짙다. 아메리카 원주민, 스페인, 멕시코 그리고 카우보이 문화가 뒤섞여 산타페는 도시 곳곳이 문화유산이다. 이 때문에 2005년, 유네스코 공예·민속예술 분야 창의도시(UNESCO Creative Cities Network)로 선정되기도 했다. 역사와 문화, 자연이 조화를 이룬 예술의 도시 산타페를 만나보자.
성스러운 태양이 춤추는 믿음의 땅
아메리카 원주민이 거주하던 뉴멕시코주에 16세기부터 이방인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뉴멕시코에 금광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스페인 원정대가 들이닥친 이후 본격적인 뉴멕시코 원정 개척이 시작됐다. 이후 200년 동안 스페인 지배를 받다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국의 47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훌륭한 예술은 언제나 고통과 핍박 속에서 탄생하는 법. 기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고통받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뉴멕시코 산타페는 그들만의 문화와 정서가 다채롭게 녹아든 예술 마을로 거듭났다. 푸에블로 원주민들은 이곳을 '태양이 춤추는 땅'이라 불렀고, 이후 이 땅을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은 '성스러운 믿음'이라는 의미의 산타페라 불렀다. 이제는 수백 년의 문화 예술이 혼재하는 '성스러운 태양이 춤추는 믿음의 땅'이 된 셈이다.
산타페의 이국적인 풍경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황톳빛 진흙 건물 '아도비 하우스(Adobe House) '이다. 남부 사막지대의 강한 햇빛과 모래바람을 견디기 위해 토담집처럼 흙벽돌로 지은 집이다. 산타페시는 1950년 이후 산타페의 도시에 지어지는 모든 신축 건물은 반드시 어도비 양식으로 짓도록 규정하고, 3층 이상의 현대 양식 건물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인 주택은 물론 학교, 관공서 등 산타페시의 80%가 이 같은 아도비 형태이다 보니 붉은 흙 건물은 산타페의 상징과도 같다.
Museum of Contemporary Native Arts ⓒ Junghyun Kim
New Mexico Museum of Art ⓒ Junghyun Kim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도시
산타페는 유난히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데다 가장 높은 곳(해발 2,135m)에 위치하며,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인 총독관저(Palace of the Governor)가 있기 때문이다. 총독관저는 1610년 스페인 식민지로 시작된 산타페의 정체성을 집약한 곳이다. 스페인에서 부임한 총독이 아메리카 신대륙의 식민지 땅인 뉴멕시코, 텍사스, 애리조나 일대를 총괄하기 위해 식민지 중앙청에 해당하는 관저를 지었다. 미국 자치령에 편입되기 직전까지 사용된 이 건물은 현존하는 건물 중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청 관사로 기록되고 있다.
Palace of the Governor ⓒ Junghyun Kim
Palace of the Governor ⓒ Junghyun Kim
예술 마을을 탄생시킨 '뉴멕시코 미술 박물관'
산타페 역사는 도시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겨놓았다. 예술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산타페에는 300개가 넘는 화랑이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뉴멕시코 미술 박물관(New Mexico Museum of Art)이다. 전형적인 푸에블로 리바이벌 건축양식(Pueblo Revival Style)에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건축 양식이 잘 혼합된 건물로 박물관 자체가 이미 예술작품이다. 2만여 점의 방대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수시로 특별전을 열어 이색 볼거리를 제공한다.
현재는 1900년대 타오스 아티스트 협회 작가들의 작품 전시회가 한창이다. 주로 뉴멕시코의 광활한 대자연이나 소박한 원주민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캐서린 카터 크리처(Catherine Carter Critcher 1869~1964)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뉴멕시코의 자연과 문화에 예술적 영감을 얻어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예술가들의 활약으로 오늘날 산타페는 예술의 마을이라는 공식이 탄생했다.
Catherine Carter Critcher. Hopi Pottery Maker, 1927 ⓒ New Mexico Museum of Art
(좌)Leon Kroll. Santa Fe Hills, 1917 ⓒ New Mexico Museum of Art
(우)Gerald Cassidy. View of Santa Fe Plaza in the, 1850s, 1930 ⓒ New Mexico Museum of Art
인디언 시장을 소더비 경매처럼
산타페가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선정된 배경에는 푸에블로 인디언과 스페인 앵글로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 특성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예술문화박물관(The Museum of Indian Arts and Culture)은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지역의 푸레블로, 나바호, 아파치 인디언들의 생활상과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당시 사용했던 옷과 생필품을 전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각종 기획전을 마련해 인디언 문화의 파급력을 강조하고 있다.
Turquoise Water and Sky, Gift of Doris and Arnold Roland; 56423/13, Origin/Artist: Shonto Begay (Navajo, b. 1954) ⓒ Museum of Indian Arts and Culture
Angie Reano Owen uses the ancient technique of turquoise inlay on shell to create a contemporary cuff. The entire cuff is made from a large shell. ⓒ Museum of Indian Arts and Culture
매년 8월 3째주 목요일마다 산타페에서는 이틀 동안 산타페 인디언 시장(Santa Fe Indian Market)이 열리는데, 여기에 천여 명의 인디언 공예 미술가들이 작품을 출품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시장 규모가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작품의 질도 높아지고 있다. 완성도 높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려는 재력가들이 이곳으로 모이면서 산타페 인디언 시장은 어느새 소더비에 버금가는 예술품 경매장으로 자리 잡았다. 예술가와 소비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건전한 시장을 만들어 지역 경제를 일으키고자 한 산타페시의 똑똑한 정책이 빚은 결과다. 지역 예술시장이 활발해지자 인디언 전통문화예술은 더불어 꾸준히 계승·발전하고 있다.
로레토 성당(Loretto Chapel) 기적의 계단
1873년, 고딕식 건물로 지어진 로레토 성당은 스프링 나선 형태로 만든 나무계단이 유명하다. 360도로 두 번 회전하며 아래층과 성가대석을 이어준다. 이 계단은 못과 풀을 전혀 쓰지 않고 나무로만 조각해 이음새를 완성했다. 7m 높이의 계단을 지탱해주는 기둥도 없다. 게다가 재료로 쓰인 원목은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는 자라지 않는 희귀한 나무로 아무도 계단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다.
Loretto Chapel ⓒ Junghyun Kim
Miraculous Staircase of Loretto Chapel ⓒ The Loretto Chapel
더욱 신비한 것은 이 계단의 단수는 33개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햇수와 일치해 기적의 계단(Miraculous Staircase)로 불린다. 성당 건물을 처음 지었을 당시 기본적인 공사는 마쳤으나 입구에서 성가대석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미완성 상태였다. 당시 기술로서는 좁은 공간에 계단을 만들기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이름 모르는 목수가 나타나 스스로 계단을 짓겠노라 선언하고 3개월 만에 완성하고는 대가도 받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후 그 목수를 찾기 위해 수녀들은 신문에 광고를 내고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해 기적의 계단은 오늘날까지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그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뒤엉킨 역사와 문화를 독특한 예술로 발전시킨 도시 산타페. 산타페의 독특한 자연환경이 주는 생경함은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도시가 지닌 묘한 매력 덕분에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터를 잡아 산타페에서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창작활동을 한다. 미국 내에서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다음으로 미술시장의 규모가 크다.
내 안의 예술혼을 끄집어낼 새로운 영감이 필요하다면 황량한 사막 위에 그림처럼 내려앉은 예술의 마을 산타페로 떠나보자.
글_ 이소영 워싱턴 통신원(evesy02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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