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3
예술의 높은 콧대에 한번이라도 주눅 들어본 이들이라면 이 전시가 더 즐거울 것 같다. 과연 살아있는 팝아트의 전설다웠다. 전시장에서 들리는 빠른 음악은 갤러리의 우아함을 깨는 것 같아 좋았고, 무엇보다 그의 흔적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운 에너지가 반가웠다.
케니 샤프는 키스 해링, 장 미쉘 바스키아와 함께 앤디 워홀 이후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슈퍼팝’의 세계를 창조했고, 공상과학만화의 캐릭터와 소비사회의 메시지를 결합시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펼쳐왔다. 롯데뮤지엄에서 10월 3일부터 그의 아시아 최대 규모의 기획전 ‘케니샤프, 슈퍼팝 유니버스’가 열린다.
클럽을 연상시키는 전시장 입구.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위치한 클럽 57에서 케니 샤프와 젊은 예술가들은 다양한 실험을 했다.
반짝이는 조명과 신나는 음악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전시장 입구는 클럽을 방불케 한다. 뉴욕 이스트 빌리지 반항아들의 집합소였던 ‘클럽 57’을 나타낸 것으로, 키스 헤링, 장 미쉘 바스키아 등의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자유롭게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며 저항정신을 꽃피우던 곳이자 케니 샤프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이번 전시의 시작 지점이기도 하다.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한 사진들과 영상은 지금 보아도 실험적이다. 비전문적이고 즉흥적이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주류 예술에 도전한 클럽 57의 새로운 문화, 현실에 대한 불안과 혼란에서 비롯된 또 다른 에너지는 그를 어떠한 세계로 이끌었을까.
뉴욕백화점 피오루찌 매장 전시를 위한 작품들. 이 전시가 케니 샤프의 첫 번째 뉴욕 전시다.
1979년 뉴욕백화점 피오루찌(Fiorucci) 매장에서 가졌던 첫 번째 전시에서 그는 우주에 집착했던 자신의 세계관이 담긴 작품이자, 이후 작업에서 보여줄 예술관이 담긴 〈Death of Estelle〉를 선보였다. 대중적인 소재들을 핵폭발과 지구종말이라는 이야기와 혼합해 초현실적인 팝아트(Pop Surrealism)의 방향을 제시한 〈Death of Estelle〉은 1980년대 새로운 예술의 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미술사의 흐름에서 빠질 수 없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케니 샤프는 만화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과 미래 시대 〈우주가족 젯슨〉에 큰 영향을 받았다.
어린 시절 방영됐던 만화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과 미래 시대 〈우주가족 젯슨〉에 큰 영향을 받은 케니 샤프는 과거를 의미하는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과 미래를 의미하는 우주가족 젯슨을 합쳐 ‘젯스톤’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석기시대와 우주시대의 전혀 다른 배경에서 첨단기술을 누리며 사는 천진난만한 주인공들을 혼합한 ‘젯스톤 시리즈’를 창조, 현실과 공포의 불안을 완충시키는 캐릭터를 표현한다. 핵 전쟁과 환경 파괴에 대한 두려움이 증폭되는 가운데 ‘젯스톤 시리즈’는 핵폭발에 의해 지구가 멸망한 그 이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과거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만화 캐릭터를 통해 현실의 고민을 담아냈다.
그의 독창적인 팝 아트 방식을 명확히 보여주는 ‘슈퍼 팝’ 시리즈
1980년대에 케니 샤프는 5~60년대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담긴 다양한 이미지들을 현실로 소환해 다양한 예술기법으로 시간과 공간이 혼재된 초현실적인 화면을 창조하며 ‘Pop Surrealism‘, ‘Super Pop’을 선보인다. 그는 “슈퍼 팝은 기존의 팝 아트에 전기충격을 가해 최고치의 출력을 끌어낸 것이며 내가 경험한 모든 미술 사조, 초현실주의는 물론이고 1950년대의 추상표현주의와 1960년대의 팝아트, 1970년대의 미니멀리즘 등이 내화돼 끌어올라 토해낸 것”이라고 말한다. 전시된 다양한 작품들은 30여 년에 걸친 ‘슈퍼 팝’의 변주를 보여준다.
케니 샤프의 대표작인 도넛과 핫도그 시리즈
도넛과 핫도그는 케니 샤프의 대표작들로, 물질주의 삶이 주는 화려함과 그 이면에 숨겨진 잔혹한 인간성이라는 양가적인 측면을 ‘도넛 시리즈’를 통해 표현했다. 만화적인 캐릭터와 초현실주의적인 화면, 그래피티적 요소가 혼합돼 있는 ‘블롭’에서는 작가 특유의 유쾌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1980년대 초 브라질을 여행하면서 시작한 정글 시리즈를 통해 환경에 대한 실질적인 목소리를 담기도 했다. 생명의 에너지가 가득한 초현실적인 팝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는 자연과 파괴적인 인간성을 표현, 환경문제를 공감하고 실천하기를 촉구한다.
핵폭발 장면을 귀여운 핑크 구름으로 표현한 〈Pikaboom〉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Dragon serpents adore Korea!〉
그가 말하는 얼굴의 가치와 유희적 에너지를 전하는 ‘Face Value’, 핵폭발에 작가 특유의 유쾌함을 담은 피크닉 테이블과 의자 ‘Pikaboom’, 이번 전시를 위해 용 두 마리와 태극문양을 배치해 제작한 10미터 길이의 대형벽화도 전시된다.
커스터마이징 된 로봇 청소기도 볼 수 있다.
시계, 라디오, 전화기 등의 사물을 저마다의 얼굴이 있는 의인화된 인격체로 재탄생시킨 ‘커스터마이징’ 작업도 볼 수 있다. 커스터마이징의 연상선상에서 골동품 가게나 버려진 이삿짐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가져와 그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고 새롭게 제목을 붙여 재탄생 시키는 ‘Born Again’ 시리즈도 선보인다.
2일 진행된 카밤즈 프로젝트. 케니 샤프가 자동차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념해 전시장 외부에서는 2일과 3일, 실제 자동차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려 커스터마이징하는 카밤즈(Karbombz) 프로젝트도 진행된다.
버려진 플라스틱 폐기물로 꾸며진 환상적인 공간, 〈Cosmic Cavern〉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Cosmic Cavern’은 공간으로 나아간 커스터마이징 작업의 확장판으로, 현실에서 벗어나 완벽한 세계에 도달하는 이상향이자 우주로 탈출하는 공간이다. 온전히 즐기고 싶은 기분이 드는 이 환상적인 공간은 버려진 플라스틱 폐기물로 꾸며졌다. 이번 작업에는 한국 관람객 50명이 기증한 폐장난감이 함께 사용됐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을 오마주한 TV도 설치돼 있다.
전시장 곳곳에선 그가 즉흥적으로 그린 그림과 낙서도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밝은 색감과 이미지로 표현돼 있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 세계의 문제들이 담겨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중한 메시지를 던지니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다.
케니 샤프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따분하고 반복적인 현대인의 삶을 예술적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그간 예술이 무엇인지 종종 의문이 들었었는데, 케니 샤프의 작업이라면 충분한 답이 될 것 같다. “예술에서 필요한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반항 정신”이라는 케니 샤프의 말도 통쾌하다. 점잔 빼는 예술 말고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재미와 활력을 불어넣어 줄 그의 작품세계는 내년 3월 3일까지 만날 수 있다.
한편, 전시장뿐 아니라 미술관 밖에서도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콜라보가 진행된다. 카 셰어링 브랜드 그린카의 차량 외관과 서울 지하철 2호선 전동차 내부에 케니 샤프의 작품 이미지가 랩핑돼 운행되고, 맥주 Fitz와도 콜라보를 진행, 그의 작품 이미지로 디자인된 Fitz 수퍼 클리어 캔이 한정판으로 제작돼 소비자와 만난다. 콜라보의 일환으로 10월 3일부터 9일까지 롯데월드타워 잔디광장에서는 ‘Fitz × 케니 샤프 비어가든’ 행사도 진행된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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