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31
[스토리 × 디자인 3]
우리 인간 대다수에게 밤은 잠자는 시간이다. 어둑어둑한 하늘을 배경으로 달과 별이 빛나기 시작하면 실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형광등, 백열등 또는 흔치 않지만 촛불 같은 은은한 등을 하나둘 켜기 시작하고 낮 동안 일하던 사람들은 집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 베를린 주택가 지붕 위에서 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낙서화가. 낙서화가는 밤 속 어둠을 틈타 공공시설이나 건물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화를 그리고 자기표현을 하는 ‘밤의 미술가’다. Photo: Roger Hecht, 2016
우리는 밤이 되면 낮과는 다른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고 외부 세상과 교류한다. 밤이란 어떤 이에겐 하루 일과의 끝인 동시에 휴식의 시작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생계를 위한 또 다른 일의 시작이거나 낮일의 연속이다. 밤의 어두움 속에서 반사되는 옅은 달과 빛은 낭만주의 정서와 그림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1980년대 와서는 고스족이라는 하위문화집단이 등장해 검은색 옷차림과 화장을 하고 세상의 종말, 죽음, 악을 내용으로 하는 록 음악에 심취했다.
그림자 없는 빛은 없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무대 장치 디자인. 오페라 속 타미노와 파미나 두 연인이 혼란과 어둠의 밤을 함께 헤쳐나가며 사랑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Internationale Stiftung Mozarteum Salzburg
자연 생태계는 낮과 밤으로 나뉜 두 개의 다른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밤이 되면 야행성 동물들은 먹이를 찾아, 또 짝짓기 할 이성을 찾아 숲속, 바닷가, 길거리를 배회한다. 고대인들은 특히 밤 동물들을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 신화나 전설로 남겼다. 유럽인들은 중세부터 온갖 동물을 관찰하고 스케치한 동물 우화집(Bestiary)을 써내고, 밤 하늘을 관찰하며 천문학을 연구했다. 야간용 회전목마 놀이기구를 타고 노는 등 실존과 상상, 낮과 밤, 빛과 어둠 사이를 오가며 자연을 이해하려 애썼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천상 지구본. 이 책에서 주인공 앨리스는 밤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의 의미와 질서를 이해하려 애썼다. 런던 Greaves & Thomas 제작, 2001년 © Greaves & Thomas, London
어둠이 가라앉고 밤 시간이 되면 온 세상은 달라 보인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밤에 대한 신비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그로부터 영감받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밤은 어둡다는 이유로 공포, 엽기, 사악, 타락을 상징하며 문학, 미술, 대중문화에 이른바 ’공포의 미학’이 탄생하는데 영감을 줬다. 흡혈귀, 늑대인간, 마녀는 밤에만 나타나 인간을 괴롭히거나 해치는 무서운 존재들이다.
밤이 되어 어둠이 깔리면 낮에 보이지 않던 생명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2인조 미술팀이 제작한 〈밤 생명체 빛〉 설치작. 빨강, 파랑, 녹색을 이용해 밤에 대한 공포와 신비를 표현했다. © Carnovsky, Milan
밤은 또 인간 군상에게도 낮에는 할 수 없는 활동이 허용되는 밤놀이(nightlife)를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유흥가의 음식점, 술집, 밤 카페들이 하나둘씩 영업등을 켜기 시작하고 밤놀이를 하러 나온 유흥객들이 거리로 나와 술렁댄다. 예를 들어, 스튜디오 지블리가 제작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속 주인공 소녀 치히로가 길을 잘못 들어 폐허의 놀이공원에 들어서자 갑자기 세상은 밤으로 어스름해지고 놀이공원은 왁자지껄한 유령들의 유흥가와 장터로 변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듯 밤은 전에 알지 못한 세계로의 모험을 뜻하기도 한다.
19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생긴 밤 노동자에게 물이나 술이 함유된 음료를 나눠주는 야간 음료수 가판대는 지금도 3백 여 군데에서 운영되고 있다. 밤 11시까지 영업한다. Photo: Anselm Buder, 2017
19세기 말 진공 유리관 속에 전류를 방전시켜 빛을 내는 네온 인공 빛이 발명된 이래, 도시의 밤 풍경은 현란해지고 덩달아 밤에 일하는 밤 직업을 탄생시켰다. ‘밤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낭비되는 때’라고 말한 에디슨은 백열전구를 발명하는 순간 낮과 밤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근대기에 갓 접어든 20세기 전반기, 인류는 두 차례 세계 전쟁과 경제공황이란 격동과 파란의 시절을 겪으면서 잠 설치는 불안한 밤, 허기지고 지쳐 잠이 오지 않는 밤, 밤이면 오락과 유흥을 찾아 나오는 온갖 군상과 군중을 만나고 돈벌이를 해야 하는 밤거리 유흥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왼쪽)1920년대 독일 베를린의 야간 유흥계를 주름잡았던 무용수 아니타 버버스(Anita Berbers)의 밤무대 쇼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해 놓은 〈라이겐(Reigen)〉 잡지 표지, 1924년. (오른쪽)1920년대 판 모르는 남녀 사이끼리 통화와 만남을 주선해 주던 무도회장 탁상용 전화기 © Werkbundarchiv - Museum of Things, Photo: Armin Hermann
밤은 잠을 자는 시간이며 하루 8시간 조용하고 편한 잠을 자는 것이 당연한 권리가 된 것은 20세기 후반기 평화와 윤택해진 경제생활이 정착된 이후부터나 가능해진 럭셔리였다. 그러나 직업과 직종에 따라서 밤에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늘 있다. 예컨대 야간 화물트럭이나 택시를 모는 직업 운전기사는 각성제나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밤길을 달리고, 조간신문사 기자들은 밤을 지새우며 야간 취재와 기사 송고 마감을 하며, 병원 간호사나 소방수 등 서비스업 종사자, 익일 물품 배달 서비스도 밤 시간 내내 일하는 물류 및 배달업체 직원들의 밤 노동 덕분에 가능하다.
1950년대 밤 노동자들의 각성제로 애용한 ‘할로오 바흐(Halloo Wach)’ 에너지 드링크. 디르크 로쓰만(Dirk Rossmann GmbH) 생산. 각성 성분이 첨가되어 있어서 일반 상점에서 자유롭게 구입할 수 없었다. 오늘날 24시간 사회 속에서 에너지 드링크는 가장 많이 팔리는 음료수 중 하나다. Photo: Peter Boesang
올해 7월 27일은 2003년 8월 27일 이후로 15년 만에 처음 있는 개기월식일이었다. 나사 미국 항공우주국의 천문학자들은 이 날 밤 달은 지구 그림자 속으로 숨어 1시간 43분 동안 어둠이 계속되고 달은 마치 핏빛처럼 묘한 붉은색으로 빛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과거 인류의 조상들은 붉은 블러드문(Blood Moon)이 뜨는 개기월식을 나쁜 징조라고 여겼는데, 이는 어둠이 오래 지속될 때의 밤과 연루된 사악한 범죄, 인간 내면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24시간 어디서나 빛이 없는 곳이 없는 오늘날, 밤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이나 두려움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오히려 휴식하고 잠자고 꿈꿀 수 있는 밤은 자꾸만 짧아지고 사라져간다. 생계를 위한 노동이든, 정처 없는 마음을 달래기 위한 유흥을 즐기기 위해서든, 혹은 작가나 예술인처럼 영감과 집중을 위해 밤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든,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밤이란 또 다른 낮 시간의 연속이다.
밤마다 수많은 가정 실내에 인공 빛을 밝혀준 1930년대 메르쿠르(Merkur) 백열전구 광고 포스터. 메르쿠르는 20세기 다수의 백열전구 제조업체 중 하나였다. © Museum für Kommunikation Frankfurt
21세기 현대인들은 다시금 ‘잠이 없는 밤’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낮 동안 하던 일을 밤에 계속하고, 낮일을 마친 후 밤일로 돌입하는 투잡·쓰리잡족이 늘면서 낮과 밤, 일과 여가, 구속과 자유 상태의 구분은 불분명해졌다. 손에서 놓지 못하는 스마트폰은 수시로 삑삑대며 경고음과 메시지를 보내고 깊은 한 밤중에도 파란 LED 빛을 발산하며 우리의 잠을 방해한다. 테크와 모바일 기기로 둘러싸인 글로벌 시대 현대인은 사실상 24시간 낮이 계속되는 밤이 사라진 시대를 살면서 덩달아 잠도 잃어가고 있다.
‘밤 - 잠 이외의 모든 것들(The Night - Everything but sleep)’ 전시 포스터 이미지. 잠은 커피를 충분히 마시지 않았다는 의미일까? 인간에게 밤이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화전시 ‘밤 - 잠 이외의 모든 것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커뮤니케이션 박물관(Museum for Communication Frankfurt)에서 오는 8월 26일까지 계속된다.
잠은 하루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떵떵대며 인류에게 인공 빛이라는 근대적 선물을 선사한 발명가 에디슨이 밤이란 낮에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아도 되는 ‘낮의 연장’이라고 한 예언은 적중한 셈이 됐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의 밤 시간, 우리의 몸 못지않게 영혼도 함께 깨어 있는가’다. 밤에 잠 자지 못한 자는 꿈을 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글_ 박진아(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