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25
통섭에 관한 강의 첫 번째 시간으로,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통섭’이라는 단어와 디자인에서의 통섭, 그 한 측면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통섭(consilience)이란 단어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도록 하죠. 현재는 ‘융합’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고 있지만 사실 이보다 먼저 더 광범위하게 쓰여진 단어가 ‘통섭’으로 통섭 개념은 몇 년 전부터 학계에서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켜왔습니다. 또한 통섭 개념은 저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의 설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1999년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이 설립되었을 때의 과정에서 하나의 학과 개념보다는 주제나 이슈, 프로젝트를 중심에 놓고 여러 랩에서 같이 해결하는 운영방식을 지향했던 점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죠. 지금도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은 여러 가지 실행 프로그램, 특강 등을 통해 이런 통섭적 지식의 분배를 실시하고 있으며, 여러 다양한 랩들 간의 통섭적 운영 및 물리적 방식의 통섭 개념까지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후 많은 한국의 대학원에서 문화와 디자인, 경영과 디자인, 기술과 아트와 디자인을 결합한 학과들이 신설되어 운영 중에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이나 한국에서의 사용방식의 문제가 어떻든 간에, 현재 디자인계뿐만이 아닌 모든 학계가 서로 다른 영역들과 교류를 해서 새로운 연구 결과를 산출하고 있으므로 통섭은 사실상 자연스럽게 우리의 디자인 현장과 실제 생활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통섭, 디자인 통섭’ 역시 또 하나의 통섭을 실천하는 기획입니다. 총 14번의 강의로 디자인 통섭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함이죠. 그 첫 번째인 이번 강의는 크게 세가지 부분으로 진행됩니다. 첫째는 통섭 단어의 어원과 개념,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고, 둘째는 디자인에서의 통섭을 디자인 교육 분야에서의 흐름과 그 특징을 중심으로 짚어보는 것이니다. 그리고 셋째는 현재 우리시대에서 디자인은 어떤 것에 대한, 무엇과의 통섭이 요구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강사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디자인학 교수
정리 | 김소연, 조현신
통섭의 뜻, 개념, 사용
통섭이란 단어는’이치 혹은 섭리를 통합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치나 ‘섭리’는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어떤 초월자의 뜻을 일상생활에서는 ‘섭리’라고 합니다. 좀 더 설명하면 섭리라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원리’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섭리는 주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 와 같은 자연적인 현상에 많이 사용되지만, 좀더 확장하자면 '엄마는 아기를 사랑한다'는 인간사, 또는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와 같은 인간의 도덕률, 도리까지를 통틀어서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자연과 인간사의 관계에 맞추어 그들이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잠깐 봅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라는 자연의 섭리와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라는 인간의 도리 관계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모든 지식의 집산지는 어른이었지요.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어른에게 물어보지 않거나 정보를 얻지 못하면 절기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해독하기 힘들어져 모내기 시기나 추수 시기 등에 대한 정보력이 떨어지게 되고, 자연히 그 공동체의 힘은 약해지곤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경 사회에서 어른에 대한 공경을 필수적인 항목이라고 할 수 있었죠. 그러한 자연계의 법칙인 사계절의 순환과 인간의 생존이 연결되는 어떤 지점을 기점으로 섭리는 관습적인 어떤 것, 즉 윤리로 나타났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자연계의 질서와 인간의 윤리가 통합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측면이 일면 통섭학자들이 주장하는 통섭의 기본적인 원칙이기도 합니다. 예술이나 미적인 감정까지 생물학자들은 생물학적 원리를 이용하여 설명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이유에서 통섭이라는 단어는 과학이 모든 학문을 지배하려는 의도를 띠고 있는 단어라고 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지금은 그리 흔하게 쓰이지 않는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생물학을 기본으로 만사의 진리를 통합한다는 초기의 개념은 퇴색되고 여러 학문간의 시너지 효과가 나는 섞임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스모폴로지’의 저자 스티븐 툴멘(Steven Toulmen)은 “1960년대 이래로 철학과 과학 모두가 데카르트 이전 마지막 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지적인 태도를 회복했다.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우리는 합리주의의 배타적인 이론적 연구주제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따라서 데카르트가 약 300년 전에 이루어낸 쿠테타에 의해 밀려났던 실천적인 문제들에 다시금 천착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을 통해 과학위주의 사회에서 불확실성을 받아들여야 함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예술과 철학이 분리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합하는 총체적인 지적 흐름이 없다면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통섭은 시작된 것입니다. 지식과 진리가 통섭되는 시대, 지식의 총체성을 회복하여 더 나은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인간의 가치와 만물을 움직이는 여러 진리들을 통합하고자 하는 흐름을 통섭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이번에는 통섭에 대한 어원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통섭의 영어인 ‘consilence’의 어원은 라틴어 ‘consiliere’에서 왔습니다. 여기에서 ‘con’은 ‘with’’ 라는 뜻이고, ‘salire’ 란 ‘to leap’ 이라는 뜻으로 둘을 합치면 함께 솟구친다는 ‘jumping together’라는 의미가 됩니다. 즉,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처음에 통섭이라는 개념을 쓴 사람은 윌리엄 휴얼 (William Whewell)로 그는 19세기 영국의 자연철학자이며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였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있었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논지를 발달시킨 인물은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통섭’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에 따르면 통섭이란 “서로 다른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인과 설명들을 아우르는 것. 예를 들면 물리학과 화학, 화학과 생물학, 그리고 보다 어렵겠지만 생물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 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윌슨이 발견한 인문학 및 사회과학이 물리 법칙으로 환원되는 지점은 바로 ‘유전자’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앞에서 말했다시피 사회에서 어른을 ‘공경’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고 그러한 성향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유전자에 자연스럽게 고착되게 된 것이라는 해석을 간단하게 나마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유전자가 전문 용어로 하면 후성 법칙에 의해서 규정이 되었다는 것인데, 결국 생물학적 기원을 가지고 문화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게 문화와 생물학이 결합되는 하나의 지점이에요. 한국에서는 최재천 교수가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 책 제목을 통섭이라는 단어로 번역하면서 국내에 퍼져나갔는데, 그는 “여러 분야의 학문이 합해져서 하나의 나무를 이루는 형상이다” 라고 통섭에 대해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의 뿌리가 생물학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 했더군요. 어쨌거나 에드워드 윌슨이 이야기한 것처럼 진리의 행보는 근대사회가 애써 만들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더 이상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왜 이런 개념이 나온 것일까?
먼저 근대의 이성중심, 예술과 철학, 과학이 분리되어 진행되던 학문 체계에 대한 의심이 생겨난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 세계는 그 동안 믿어 왔던 가치관의 혼란과 더불어 과학 분야에서도 불확실성의 원리 등이 등장하여 물리적, 객관적 법칙의 결과에 관찰자의 주관적 태도가 개입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가 확산됩니다. 또한 1968년 문화혁명, 이어서 온 오일 쇼크에 이은 세계 자원에 대한 불안, 제 3세계의 등장과 역사 속에서 소외되어 있던 사람들, 여성, 약자, 유색인종, 장애자, 성적 소수자 등등의 목소리가 등장하면서 근대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이성 중심의 사고가 의심받게 됩니다. 르네상스 이래 거대하게 진행되어 온 이성중심의 세계관, 그 동안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흐트러지는 시대가 온 것이죠.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이 만들어낸 버섯구름은 인류 모두에게 공멸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근대라고 하는 체계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되고, 포스트 모던이라는 기류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렇게 근대 사회가 지닌 여러 사고관이나 미래관에 대한 회의가 솟아오르면서 결국에는 근대를 유지하던 분리된 지식체계의 새로운 통합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지식의 통합을 이야기한 학자로 특이한 경력을 지닌 철학자는 켄 윌버(Ken Wilber) 입니다. 그는 “근대는 예술, 철학, 과학 즉 나와 우리, 그것이 분리되어 각각의 영역에서 연구되면서 각 영역의 분리가 심화된 시대이다. 즉 근대성은 나와 우리, 그것을 차별했으며, 우리의 정치적 혹은 종교적 폭정은 무엇이 객관적인 진리인지를 결정할 수 없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서 나, 우리, 그것이라고 하는 것을 학문 분과에 대입한 것이 흥미롭게 다가오는데요. 우선 ‘나’라고 하는 세계는 주관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창의성, 욕망, 개인성 등의 세계이고, 우리’의 세계는 윤리, 관계와 같은 사회이지요. 그리고 ‘그것’의 세계는 합목적성, 기능, 객관적 진실을 요구하는 과학이라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중세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윤리가 나의 윤리였고, 과학은 신과 대치를 하고 있었죠. 하지만 점차 나와 우리로 분리가 되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죠.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나는 이것을 좋아하고 우리는 그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어떠한 조사, 가령 1000명의 사람을 조사해서 그 1000명이 우리의 것을 좋아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 나의 판단이나 결정은 힘이 없어지고 우리의 방식이 옳은 것으로 떠오르게 되지요. 이때 1000명의 편을 들어주는 과정의 객관성, 엄밀성, 정확성 등은 과학적 통계나 수치 등을 이용한 과학이 입증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량적이면서 과학적인 방식의 가치관이 강하게 지배하던 방식을 근대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이렇게 그 지향점이나 가치가 무엇이건 간에 수치나 통계, 과학적 정합주의 등이 모든 진리에 대해서 우위를 점한다는 시각이 팽배하게 되면서 과학적 세계에 대한 신봉이 시작 되는 것이죠. 근대는 한 마디로 신의 자리에 이성, 즉 ‘그것’의 세계인 이성을 집어 넣고, 가치와 의미보다는 현상을 판단하는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이성의 성격은 정합성, 효율성, 결과의 확실성 등이고 근대는 이러한 가치체계에 의존해서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기능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를 연구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체계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 학문이고 학문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였죠. 그러나 세계의 문제는 더 복잡해졌고, 해결되지 않는 현상들은 크게 늘어났습니다. 통섭은 지금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또 하나의 개념으로 요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과 통섭은 어떠한가?
자, 그러면 이제 디자인에서의 통섭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수 많은 각도와 분야에서 디자인 통섭을 살펴 볼 수 있지만, 이 강의에서는 디자인 교육에서 통섭을 어떻게 찾아 볼 수 있을까를 논의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디자인 교육자 알랭 팽들리(Findeli, Alain)는 현재의 디자인을 다음의 세가지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제품공학과 마케팅이 디자인에 미치는 효과에 치중하고, 둘째는 물질적 진보에만 집착하여 형태와 특질에만 기반을 두게 되므로, 셋째로 자연히 미적 분야에서는 배타적 미학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런 평가를 받기도 하는 디자인 교육은 그 동안 어떤 식의 지식을 근거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예술과 과학, 경영의 통섭 시대
바우하우스의 월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Art and New Technology: a New Unity’라는 모토로 교육을 진행합니다. 여기서 기술은 수공예 중심의 기술을 벗어난 기계기술의 새로운 생산수단이었으며, 예술은 이러한 생산 수단의 경직성을 타파해줄 미적 층위의 기준이었지요. 또한 디자이너 전에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목수, 장인, 공예가라 불렸으며, 이들은 체험적 지식에 의해서 물건을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수공예 시대에 체험에 의해서 만들어지던 물건들은 기계 시대에 들어와 기계를 통한 일정한 매뉴얼 즉 공식을 바탕으로 생산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즉, 기계 생산에 맞춘 일정한 형태 이론과 일정한 제작이론이 필요하게 된 것이고, 그게 기술이라는 단어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술이 지닌 성격은 결국 과학적 방식이라고 인식되었고, 여기서 예술과 과학의 결합이론이 나오게 된 것이 현대 디자인 교육에 있어서 첫 번째 통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장인이나 공예가, 목수 같은 이들이 가진 체험적 지식을 매뉴얼화 하여 형태적 미학을 더하여 과학적 지식으로 만든 것이죠. 바우하우스에서 색채학을 가르친 요하네스 잇텐(Johannes Itten)의 색채학 이론을 보아도 이러한 지식의 매뉴얼화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바우하우스에서의 색채 교육을 바탕으로 쓴 ‘색채와 예술’에는 개인적인 색채 감각을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술과 관습적 만들기 방식을 과학적으로 하기 위해 디자인은 예술, 과학과 통섭했다가 디자인 교육에서의 두 번째 통섭 프로그램이 만들어집니다. 디자인이 꼭 예술과 과학만의 결합이 아니라 사회적인 욕구를 표상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 모홀리 나기(Lszlo Moholy-Nagy)와 사회학자인 찰스 모리스(Charles Morris)가 힘을 합쳐서 만든 것입니다. 찰스 모리스는 기호학을 차용하여 만들게 되죠. 이 프로그램은1937년 뉴시카고 바우하우스에서 등장하는데 과학, 인문학, 사회학, 통계학의 결합 도입을 시도하게 되고, 디자인 교육에 사회학 분야가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서 울름 조형대학이 설립되고, 토머스 말도나도(Tomas Maldoando), 막스 빌(Max Bill), 기 본지페(Gui Bonsiepe)등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초기의 바우하우스가 강조했던 예술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과학이 전면적으로 들어와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경험적, 예술적 차원의 교육 대신에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균질한 디자인 방법론을 강조 했었죠.
간단하게 근대 유럽에서 성숙한 디자인 교육의 주요 쟁점이란 예술, 그리고 테크놀로지(과학)의 상관성에 주목, 이 둘 관계의 비중이 강화가 되느냐 약화가 되느냐 하면서 진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사회학도 역시 과학의 한 분야로 포함되어서 말입니다. 한가지 또 다른 통섭을 살펴본다면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1930년대 미국에서는 디자인 컨설팅 붐이 일면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스타로 떠올랐죠. 이들은 디자인 경영, 비즈니스 분야의 영역을 마련하게 되면서 디자인에 대한 이론적, 종합적 체계가 예술, 테크놀로지, 비즈니스의 통섭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 모델은 현재 많은 기업의 디자인 분야에서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디자인 대학에서도 다양한 과목명으로 개설하여 이 과학과 예술과 경영. 디자인의 통섭 개념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알랭 팽들리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봅시다. 그는 “이제 탐구의 영역에 대한 기존의 경계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시스템의 경계 바깥을 포함하여 디자인 실천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여러 중요한 면모들을 연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 즉 프로젝트의 출발점과 목적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프로젝트의 출발점과 목적지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이 말은 곧 “1960년대 이래로 삶의 실천적인 문제에 천착할 수 있게 되었다. 라는 스티븐 툴멘의 말과도 연결 지어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일상적이고 실천적 삶의 감성과 진행을 형태와 색채와 물성으로 표현하는 일. 그것이 디자인의 출발점이며 목적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목적지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을 하다 보면 발생되는 형태의 독창성, 기능의 효율성, 비용, 성과 등등의 요건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변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디자인의 결과가 어떠한 결과를 산출했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보고서는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출발점과 목적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죠.
2. 우리시대의 디자인 통섭– 인문적 디자인 통섭
그러면 우리 시대의 디자인 통섭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제 디자인에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통섭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통섭은 하지 말라고 해도 필요한 곳에서는 다 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미 과학과 예술의 통섭적인 디자인은 이미 극을 달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유명 명품 브랜드와 예술가의 콜라보레이션 흔히 콜라보 작업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의 경우는 이미 예술과 기술, 과학, 경영과 마케팅이 다 통합되어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모든 극한에 다른 것들은 다른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지향하게 되거나 아니면 퇴락하게 되지요. 여기서 새로이 등장한 것이 디자인 주체의 문제입니다. 학문은 크게 기술, 철학, 예술, 과학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여기에서 기술, 예술, 과학의 통섭이 빠지고 나면 남는 분야는 결국 인문학분야밖에 없어요. 인문학의 최고봉은 윤리이고 철학, 역사, 문학이겠지요. 그럼 윤리와 디자인을 생각을 해봅시다. 그로피우스가 처음 바우하우스를 설립했을 때 윤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인데 오늘날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윤리를 수없이 이야기해요. 굉장한 변화인 셈이죠. 환경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생태 윤리가 나왔어요. 만약 끊임없이 풍족하면서 갈증을 못 느낀다면 이러한 이야기가 안 나왔을 거에요.
2-1. 디자인과 생태윤리
윤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합의 추상적 가치입니다. 그리고 사회 문제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디자인에서는 이러한 가치나 의미의 문제를 다루기에는 그 동안 디자인 분야 스스로가 설정한 일이 많았습니다. 과학에 예술적 감각을 가미해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고, 그것은 디자인의 본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전 세계 디자인의 공통 흐름은 디자인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9년에 나온 ‘디자인 레볼루션’이라는 책의 목차에는 water, well-being, 에너지, 교육 등이 보입니다. 이전까지 디자인이 관심을 가지지 않던 주제이기도 하죠. 이러한 변화를 디자인 윤리, 통섭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현재 디자인과 윤리가 통섭이 될 때 디자인 생태윤리가 주로 이야기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는 디자인지역윤리를 더하고 싶습니다. 디자인지역윤리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로컬리즘이 없어지면서, 꼭 필요하다고 보여지는 요소입니다. 특히 식민지를 거친 나라의 경우 자기 자신의 색깔이나 정체성에 대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반응이 많기에, 어떤 지역이 주는 특이한 정서적 감성이 보존되면서 우리의 일상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술, 과학, 사회과학, 경영에 지역성의 법칙 또한 가미하면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런 차원의 지역적 정서가 미치는 영향의 구체적인 표현, 일상적 삶의 양식을 다루고 성찰해 보는 것은 인문학, 즉 문학이나 역사 철학에서 다루는 주제들입니다. 이들을 통합하는 것이 지금의 디자인 통섭 과정이라 볼 수 있겠죠. 몇 가지 인문학적 시각의 디자인 결과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 인문학적 통섭 사례 1) 호모 디자이너쿠스로서의 시각
첫 번째 사례는 디자인 행위를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예입니다. 폐휴지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삼선동의 어느 할아버지 집의 부엌입니다. 이 할아버지가 어디선가 예쁜 종이를 얻어서 붙이고, 가스렌지를 초록으로 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보면 디자인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단순히 형태를 만들거나, 문제를 풀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실존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할아버지, 디자이너죠? 이렇게 그냥 그 행위 자체, 환경을 꾸미려는 본능, 실존적 차원에서 디자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이런 인간의 존재성을 다루는 분야가 인문학의 분야입니다. 잠깐 유행어로 환원하면 호모 디자이너쿠스로서의 인간을 보는 것이지요.
* 인문학적 통섭 사례 2) 참여를 통한 자존감의 표출
또 다른 예는 2007년 ‘티팟(Tea Pot)’ 의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티팟의 연구원이 전라남도 백운면에서 조사원들과 함께 1년을 살면서 제철소, 떡집, 약국 등 모든 가게의 간판을 갈아주는 일이었습니다. 마음대로 갈아주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였죠. 다시 말해서, 그 사람들의 기억, 의견, 정보 등을 총 수합해서 디자이너가 하나의 통로가 되어주는 거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붕어즙, 잉어즙 등을 파는 건강원인데, 디자이너가 그 할머니와 많이 이야기를 해서 지붕 위에다가 염소와 동그라미를 설치를 하고 서울로 돌아왔어요. 근데 그 할머니가 전화를 걸어서 자꾸 노랗게 칠해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보기엔 노랑보다 하양이 더 세련되어 보였기에, 할머니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요. 그런데 1년뒤에 내려갔더니 할머니가 노랑으로 칠해놓고 거기다가 박 넝쿨을 올린 거에요.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멋지고 서정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다는 이야기죠. 여기에서의 디자인 프로젝트는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할머니의 자존감, 삶의 활력을 회복하는 프로젝트가 된 것이죠. 이후에 이 곳은 굉장한 관광지로 알려지게 되면서 백운면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준, 커뮤니티 디자인의 성공적인 사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인문학적 통섭 사례 3) 여정과 결과가 똑 같이 아름다운 디자인
이번에는 해외 사례를 예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르테니카(artecnica)라는 디자인 팀인데요, 이들은 “우리의 디자인 여정은 그 결과만큼이나 아름답다“ 라는 멋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올림픽에서 영국 선수단이 입은 유니폼이 베트남 소년들의 노동을 착취해서 만든 것이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선수단복은 아름답지만, 그 여정은 아름답지 못했던 것이죠. 아르테니카는 과정과 결과의 일치를 주장합니다. 기존의 결과 지향적 디자인에서 벗어난 전 세계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디자인 집단이죠. 여기 사진의 하나는 베트남 장인의 죽공예를 이용해서 만든 공예품이고 또 하나는 아프리카 폐전선을 이용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가로 해외의 유명 갤러리나 미술관을 통해서 팔려나가고, 만든 이들에게 정당한 임금도 지불되죠.
위에서 인문학적 디자인 결과물이라고 살펴 본 것들은 아까 말한 삶의 목적과 궁극적인 지향점에 대한 성찰과 공감 등을 바탕을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디자이너가 구체적인 일상적 삶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삶을 체험할 때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멋있는 형태나 색채, 감각에 소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 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면면의 디자인 구성 요소들에 대한 즉 일상적 체험에 대한 관찰과 인식도 중요합니다. 요즘에 디자인 엑티비즘, 디자인 행동주의라는 말을 많이 들립니다. 예를 들어 아래 사진의 ‘Hippo Water Roller’를 봅시다. 디자이너인 요한 융커가 아프리카에서 힘들게 물을 동이에다 매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고안한 아이디어입니다. 이때 현상을 목격한 것이 ‘액트’ 행위입니다. 그리고 액트 행위 이후에 디자인 프랙티스가 이어지는 것이죠. 이처럼 디자인과 일상의 결합은 중요한 코드입니다. 일상은 역사와 철학, 문화를 다 망라하는 복합적인 그물망인 셈이죠.
정리하자면 이제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디자인에서의 통섭은 예술, 과학, 경영의 결합을 기반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발전해 오다가 포스트 모던 시대에 확장되어 소외된 지역들, 약자, 여성, 장애인들까지 범주에 넣어서 유니버셜 디자인, 환경을 위한 디자인이 가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광범위하게 인문적인 모든 범주를 통섭해야 하는 단계로까지 왔습니다. 이미 그것은 참여(participation) 디자인의 컨셉과 커뮤니티 디자인의 아이템으로도 진행되고 있지요.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하는 부분은 곧 경제나 부가가치, 단순한 미적 쾌감이나 효용성, 문제 해결 기능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을 다룹니다. 문학, 역사, 지역학, 철학등의 분야가 되겠지요. 우리 시대의 디자인 통섭은 결국 인문학적인 지평을 지닌 통섭이 필요한 것입니다. 문학을 잠깐 봅시다. 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은 글을 쓰고, 소설, 시를 쓰는 것일까요? 이러한 것의 궁극적 목적은 표현의 공유와 이해, 성찰, 그리고 치유이자 삶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도저히 합리화할 수 없고 계량화 할 수 없으며 보편화시킬 수 없는 어떤 문제들을 그 지역, 그 시간대에 맞는 정서로 해소하고 표현하면서 발전하는 것이 문학이며 역사이며 철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보편적이되 더욱 지역적이어야 하며, 더욱 개별적일 수 있겠지요.
그럼 마지막으로 학문의 통섭이라고 할 때, 정말 우리가 여러 학문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식의 양이나 그 다양성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다 수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지요. 결국 디자인을 인문학과 통섭하는 것은 인문학적 지평인 역사와 철학과 인식을 가진다는 것, 지역적 감성과 윤리성을 가진다는 것이지 인문적 지식이나 예술적, 과학적 지식을 한 사람의 디자이너가 다 가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디자인과 인문학을 결합시키는 것은 인문적 인식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지요. 이제는 이러한 디자인이 의미를 지니는 사회가 오지 않았나 합니다. 세계 체제라는 개념과 종속 이론의 창시자로 유명한 임마뉴엘 윌라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우리 시대의 학문은 협력적 학문활동(inter-discioline)을 넘어선 모든 학문의 철학적 통합(uni-discipline)을 해야 한다”라며, 테크노폴리를 통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사회를 거부하고 철학적으로 모든 지식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한 철학적 학문의 통합이 디자인에서는 ‘인문적 디자인 통섭’의 영역확장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