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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명작이 주는 묘한 흥분과 기막힌 감동,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 전

2006-01-04


전시기간: 2005년 12월 3일 ~ 2006년 3월 5일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평일 오전 10시~오후 9시, 토/일/공휴일 오전10시~오후6시
전시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주 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경제신문사, SBS
후 원: 문화관광부, 주한 프랑스 대사관
문 의: 02-2124-8800, www.matissekorea.com


2004년 50만 관람객에게 샤갈을 소개했던 서울시립미술관이 서울경제신문, SBS와 공동주최로 2005년 12월3일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이란 전시를 열었다.
올해 3월5일까지 계속될 이 전시는 ‘춤’, ‘붉은 방’, ‘모자를 쓴 부인의 초상’ 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다소 친근한 작가 앙리 마티스를 비롯하여 야수파라는 수식어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 20여 명의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야수파 작가들이 펼치는 화려한 색채의 향연은 명작이 주는 묘한 흥분과 기막힌 감동을 주었다.
비록 짧은 기사로 전시를 완전하게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전에서 느꼈던 감흥을 그대로 전해본다.

취재 | 김유진 기자 (egkim@jungle.co.kr)

1905년 ‘살롱 도톤느’에서 야수주의라고 명명된 사조는 1904년부터 1908년까지 20세기에 최초로 일어난 미술운동이다. 이번 전시는 야수파 탄생 100년을 기념하여 짧은 기간 동안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야수주의와 이를 거쳐갔던 20여 명의 작가와 12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다.
전시를 위해 장 폴 모네리, 장 미술 포레이, 서순주 미술평론가 등 3명의 자문위원 및 커미셔너가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과 파리 시립미술관 등 25개 곳의 소장처를 통해 작품을 수급했고, 이로서 한 미술사조를 소개하는 대규모의 전시가 이루어졌다.

그들에게 ‘야수’라는 과격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한 전시에서 비롯됐다. 1905년 앙리 마티스, 샤를르 까무엥, 앙리 망겡, 알베르 마르케, 모리스 드 블라맹크, 키스 반 동겐이 제3회 살롱 드 도톤느(Salon d’Automne, 가을 살롱)에 출품하게 된 것이 그것이다. 주최측은 원색 위주로 구성된 색채와 거칠고 강한 터치의 회화작품들을 놓고 어찌할 수 없어 고민하다가 결국 제7전시실에 한데 몰아 넣고 ‘야수들의 우리(cage des fauves)’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로써 ‘야수주의(Fauvism)’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당시 그들은 평론가들로부터 ‘데생, 구성, 원근법을 무시한 그림’, ‘자연과 대중에 대한 가장 철저한 경멸’ 등의 악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작품들은 색채에 대한 과감한 실험으로 회화에 새로운 개념을 부여했다. 이전의 미술사조는 뎃생이나 선이 그려낸 형태 위주의 작업이었으며, 색은 사물이나 풍경이 가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사용되는 도구였다. 하지만, 야수파는 색채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

야수파 화가들은 인상파 화가들이 재발견 해낸 빛을 색채의 문제로 환원하여 표현하였다. 그들은 다양한 색깔의 채도로 명도를 표현하였고, 색깔이 주는 강함과 약함으로 빛을 표현하였다. 이는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의 최대 화두인 ‘빛’을 어떻게 구현하고 재현할 것인 가에 대해 고민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색채의 표현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 개인의 판단과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는 여태까지 실재하는 원본의 이미지를 복제하거나 현실의 이미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기법과 철학을 제시했던 미술사조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화가의 심상과 주관성이 그림에 반영된다는 것은 곧 그림의 대상을 마음대로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구상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 추상화로의 확대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20세기의 첫 미술운동인 야수주의는 구상화와 추상화의 가교 역할, 인상주의와 이후 20세기 모더니즘의 다양한 경향을 연결시켜주는 고리로서 의의를 가진다.


색채의 가능성은 공간감이나 원근감에서도 유용하게 쓰였다. 뎃생이나 그림의 구도가 아닌 색채가 주는 특유의 느낌으로 이러한 기법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마티스의 작품 ‘춤’처럼, 바닥과 하늘의 색깔을 단순화 시켜 나눈다거나, 인물화의 양쪽 배경을 다른 색깔로 채색하여 한쪽이 더 가깝게 느껴지도록 하는 식의 시도들이다.
이는 기법으로서의 색채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선보다는 색채를 담고 있는 ‘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작품들을 보면, 작가들의 선과 면의 구성에 집중하게 되는데, 여러 작품들의 선이 면을 위한, 혹은 채색을 위한 효과로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야수파의 활동기간은 매우 짧았다. 특히 몇몇 작가들은 야수파이기를 거부하기도 하고, 다시 인상파로 회기 하려는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사실 이들이 다른 유파처럼 정확하게 몇 명의 인물들을 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초현실주의처럼 동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룹을 형성해 조직적으로 활동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야수주의 혹은 야수파라는 경향에 대해서 미술운동이라고 붙이는 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동시에 보여주었던 색채를 중심으로 한 회화의 한 경향은 명백히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첫 움직임이라 할만한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야수파’의 다양한 작품들을 자유롭게 전시한 첫 번째 전시실은 이는 마치 ‘야수주의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내놓은 자유로운 주관식 답안과 같다. 피에르 보나르, 앙드레 드랭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작가의 작품 중 야수파의 화풍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위주로 구성했는데, 이 곳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면, 일단 강한 임펙트를 주는 색채와 이미지가 머리 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마티스와 야수파의 기점지가 된 꼴리유르에서 활동했던 앙드레 드랭은 마티스와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색채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했던 작가다. 초기 스케치가 그대로 비치는 수채화 <황금시대를 위한 습작> 은 대략적인 형태 묘사에 미완성의 작품처럼 보이는 채색이 인상적인데, 기존에 당연하게 보여졌던 형태에 새롭게 의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다.
오히려 대충 완성한 듯한 작품의 형태감이 대상에 새로움 질감을 부여한다. 그는 일부 그림에서 점묘법의 화법까지 동원하여 인상주의 풍의 작품을 완성하였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색채 자체 보다는 색채가 주는 형태감에 더욱 주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마티스와 함께 국내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작가인 피에르 보나르의 작품들은 주로 작은 것들이 많았는데, 다른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과 달리 섬세한 선의 사용이 인상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스케치나 뎃생은 작품의 설계 차원이 아니라 작품의 완성 차원에서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사용한 선은, 면을 드러내기 위한 윤곽선인 것이다.

모리스 마리노의 <창가에 바느질 하는 여인> , <여인과 아이들의 모임> 등은 빛을 머금은 입체의 질감을 색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살려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알베르 마르케의 작품도 재미있었다. 대상을 단순화 시켜 표현하기 때문에 강한 색깔을 써도 원색의 느낌이 들기보다는 차분한 그림톤이 유지된다. 그의 작품 이력에서 야수파의 영향은 매우 짧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전시된 작품들은 야수파에서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의 작품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야수파의 그림들을 감상하고 나면 마티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반가움’을 선사하는 유명한 작품도 몇 편 보이지만, 주로 ‘발견’의 의미를 주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1898년부터 1950년대 작업까지 그의 작업물들을 전시를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1898년 작인 <과일이 있는 정물> 은 야수파가 탄생하기 이전의 작품이지만, 과감한 터치와 색상, 색채를 통한 정물의 구성이 마치 야수파의 시작을 예견하는 듯 하다. 붓터치로 모호하게 표현한 정물의 형태와 과감하게 생략된 배경, 화려한 색채의 사용 등은 야수파의 특징적인 경향을 암시하고 있다.
어두운 색에 대한 실험으로 해석되는 <모델> , 대상의 형태가 모호하여 추상화의 느낌을 주는 <꼴리유르> 등 발견의 즐거움을 주었고, <희고 노란 옷을 입은 책 읽는 여인> 이나 <니스의 실내풍경> 은 우리가 보아왔던 마티스 작품들의 연장선 상에서 감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작품들이다.


완전히 다른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작업들도 있다. 바로 종이작업과 흑백 작업들이다. 마티스 하면 강렬한 원색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본다면 흑백작업이야 말로 그의 색채실험을 완성하는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에는 이런 내용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는 색채로 풍경을 그렸고, 연필로 인물을 그렸으며, 어둠으로 빛을 그린 화가이다.”

판화로 제작된 그의 흑백 작품들은 매우 산뜻한 느낌을 주었는데, 매우 완벽한 뎃생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선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특유의 개성이 녹아나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29년작 <페르시아 여인> 은 흑백의 작품으로도 빛을 머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색채 작업이 빛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석판화 작업에서 힌두교 여인, 오달리스크 등 동양 여인들의 모습을 주로 그린 그가 중국, 일본, 베트남 종이를 사용했다는 것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흑백 작업물을 별도로 전시한 것은 강렬한 색채만을 사용했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마티스의 색채실험을 보다 심도 깊게 이해해 보자는 기획의도와 맞닿아있다.
병상에 누워있던 그가 말기에 작업했던 대표적인 종이작업의 결실인 <오세아니아, 바다> 역시 거대한 작품의 크기와 신선한 이미지에 조합이라는 점에서 눈을 사로잡았다.

그 다음에는 프로방스 지방의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남프랑스의 시골 항구마을 꼴리유르로부터 비롯된 다른 야수파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경향들을 보이고 있었다. 강한 원색과 보색대비, 혹은 강한 윤곽선을 사용하는 등 과감한 시도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야수파를 스쳐갔던 작가들의 이후 작품들은 각각의 작가에게 야수주의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작품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오귀스트 사보의 <그라브송> 과 <삯마차> 에서 보여지는 면과 면을 구분하는 검정색 윤곽선은 원색의 이미지 보다 훨씬 더 강력한 느낌을 주었고, 어두운 색들의 주는 효과를 새삼 실감케 했다. 유화라는 질감을 100% 활용, 두꺼운 유화물감이 또 하나의 재질감으로 느껴지게 표현한 르네 세이소의 작업이라던가, 원색의 사용이 강렬함 보다는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는 알프레드 롱바르의 <마르세이유의 바 n> , 보일 듯 말듯한 검정 윤곽선과 뿌연 배경으로 대상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주는 방식으로 빛에 대한 고찰을 한 <양산을 든 폴린드> 등이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다.

전시가 끝나갈 무렵에는 야수파에 몸담았던, 혹은 그 실험을 계속 해왔던 작가들의 후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작가는 라울 뒤피였다. 야수파의 면모를 각인시킨 <셍트아드레스 해변> 이나 <카페의 테라스> 의 작품도 언급할 만하지만, 야수파 화풍을 유지하면서 좀더 정갈하게 변화를 모색하는 <7월14일>, 부드러운 컬러와 선을 사용한 <타오르미나> 등이 더 매력적이다. 이후 그는 선의 효과에 집중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의미의 선이라기 보다는 야수파의 경향에 녹아있는 붓터치로서의 선으로 이해된다. <센느강의 지류들> <모델> 등이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이 의의를 갖는 것은 야수파 이전으로의 회기가 아닌, 야수파를 지나온 히스토리를 그대로 작품에 껴안은 채로 변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여한 작가의 숫자가 많다던가, 작품의 수가 많은 대규모 전시라는 문구가 오히려 전시의 질에 대한 의문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야수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함으로서 다각도로 야수파와 그들이 선물하는 다양한 색채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미를 따지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야수파의 작업들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티스는 “예술에서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유효하지 않다”고 했다. 더 이상 현실세계나 실재하는 것들을 재현하는 데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야수파의 자유로운 그림들은 그래서 더 큰 감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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