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13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왕국, 바빌론에는 공중정원이 있었다. 기원전 600년 경의 신바빌론 왕국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뮈티스를 위해 만든 정원이다. 고원 지방에서 자란 이국 출신의 왕비는 바빌론의 건조한 사막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왕은 그녀를 위해 궁전 안 높이 25미터의 넓은 단을 5층의 계단처럼 쌓아 올린 테라스에 흙을 묻고, 수목과 꽃을 심었다. 멀리서 보면 이 모습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고 하여 공중정원이라 전해졌다. 그 유적으로 추정되는 자리가 현재의 이라크 남부 바그다드 교외에 남아있다. 이처럼 신비한 아우라를 지난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했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기록으로만 전해져 오고 있었다.
글 | 김종혁 d-페다고지 기획 & 리포터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미국 조경가 시어도어 오스몬슨은 저서 ‘옥상정원’에서,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서구 역사상 '옥상정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현실 상에 존재하는 공중정원의 원형은 어디에 있을까. 오스몬슨은 뉴욕 록펠러 센터에 있는 옥상정원 5곳이라고 말했다. 건축가 렘 콜하스 역시 이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의 저서 ‘정신착란증의 뉴욕’에서 옥상정원의 시초로 록펠러 센터를 지목한 것. ‘정신착란증의 뉴욕’은 뉴욕 맨하탄 섬을 무대로 삼아 메트로폴리스 현상의 역사를 추적한 책으로 록펠러 센터가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대공황에 의한 불안정한 경제상황, 다수의 자본가와 건축가가 참여한 의사결정 과정 등의 영향으로 록펠러 센터의 건축계획은 수 차례 수정되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록펠러 센터는 오피스 공간은 물론이거니와, 극장 그리고 방송국 등 상업에서 문화적 요소까지 두루 갖춘 거대한 복합 공간으로 완공되었다.
렘 콜하스는 이러한 과정을 메트로폴리스의 구조적 유연성이라 말한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메트로폴리스는 자신의 인위성에 대항했던 반(反)도시주의 건축의 수법, 즉 옥상정원과 같은 자연물도 담아낼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으로 증명된 것이다.
한국에도 거대한 옥상정원을 가진 건축물이 있다. 바로 가든파이브. 2010년에 개장한 가든파이브는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쇼핑몰 공간으로, 우리나라 문화 특구로 지정된 이력도 있다. 전체 면적은 영등포 타임스퀘어의 2배, 삼성동 코엑스몰의 6배나 된다. 복합쇼핑몰 역할을 하는 라이프(Life) 관 외에도, 공구전문상가 툴스(Tools) 관, 아파트형 공장이 있는 웍스(Works) 관으로 이루어져있다.
가든 파이브의 주인공은 라이프 관이다. 대다수의 일반소비자를 맞이하는 이곳은 4개 동의 빌딩이 밀착되어 있는데, 각 빌딩의 3~10층에 높이에는 연결부가 있으며, 건물 위쪽에서는 옥상정원이 가교 역할을 한다. 이렇게 연결된 4곳의 옥상정원 면적을 합하면 축구장 3배 면적이라고 한다. 이 곳과 라이프 관의 지상에 있는 중앙광장 '센트럴가든'을 포함하면 5곳의 정원, 곧 가든파이브가 되는 셈이다. 옥상들을 연결한 구조, 그리고 지상과 옥상을 높이 내려다보는 시점으로부터 록펠러 센터와 같은 메트로폴리스의 유연성은 ‘정원도시’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청계천과 가든파이브 :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가든파이브는 서울시와 SH공사가 청계천 상인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추진된 공간이다. 청계천 복원을 위한 청계천 상가 철거가 시작될 때, 상인들은 생계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서울시는 이주 대체 상가를 약속했다. 그리고 2003년, 동남권 유통단지 및 청계천 이주전문상가 조성계획이 확정되었다. 입지 조건은 좋았다. 가든파이브가 자리한 곳은 강남권과 분당 중산층 밀집 지역의 중심이며, 송파대로, 지하철 장지역과 바로 붙어있다. 인근의 문정동 법조단지를 비롯해 장지 택지지구, 거여/마천뉴타운, 송파신도시 등의 개발 프로젝트도 예정되어 있었다.
서울시와 SH공사는 가든파이브의 성공을 낙관했다. 하루 이용객 수는 15만 명, 상주 인원만 1만 명 이상에 달할 것이라 예상과 함께 화려한 광고를 선보이고, 드라마 촬영지로 사용되며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잠깐이기는 했지만 아이돌을 이용한 가든파이브의 TV 광고는 그곳에 가면 또 다른 새로운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고, 이름이 주는 미묘한 낭만성과 함께 서울의 또 다른 지표가 될 것이라는 무의식적 동의를 얻게 했다. 하지만 현재 가든파이브는 서울시의 계륵이 되어 버렸다. 청계천의 입주 대상자 가운데 약 40%만 이주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2011년의 국정감사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아왔다. 처음 4천여 억에서 2배 이상 상승된 건설비가 고스란히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졌다거나, 청계천 형의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자율적으로 이용하는 공간이라는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이마트와 같은 대형 유통업체 유치에 매달렸다는 평가도 있었다.
가든파이브의 외벽 대부분을 덮은 반사유리는 이러한 내부사정들과 입주상점이 없는 텅 빈 공간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거대한 투명우산 형태의 ‘솔라파라솔’은 센트럴가든을 안온하게 덮고 있다. 센트럴가든은 가든파이브의 출입구이자, 가장자리에 놓인 파스텔 색상의 벤치에서 휴식할 수 있는 광장이다. 입구 쪽으로는 실개천과 나무다리, 그리고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입구 바깥의 진입로는 조형물과 나무들이 모여 있어 작은 공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안온한 낙원 같은 입구와 외관과는 달리 외벽의 원색적인 현수막에서는 가든파이브 사람들의 다급함이 들리는 것 같다. 몇 층에서 어떤 품목을 팔고 있다거나, 분양모집을 호소하는 내용의 문구가 큼지막한 글씨로 아우성치고 있다.
가든파이브를 현대화된 청계천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60년 대 청계천에 세워졌던 세운상가와 낙원상가는 국내 최초의 ‘상가아파트’로, 주거 기능과 제조 및 판매와 같은 상업적 기능이 통합된 공간이었다. 주거 대신에 유통 기능을 강화하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밀착시키려는 가든파이브의 계획은 복합쇼핑몰의 형태를 빌어 나타났다. 제대로 실현되었다면 인간 활동에 필요한 대부분의 시설을 갖춘 공간 즉 생산과 소비와 여가까지 한꺼번에 통합된 공간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제조업자들을 위한 아파트형 공장으로 기획된 구역인 웍스 관은, 몇몇 하중이 많이 나가는 기계설비나 소음, 금속 먼지가 배출되는 등 영세 제조업자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 되어 버렸다. 말갛게 잘 닦여진 유리벽을 지닌 웍스 관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도시형 공장 중 아파트형’에 걸맞는 법적 조건을 충족하고, 이 건물의 적정설계기준(진동, 하중, 소음 등)을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 또한 소비나 유통 부분으로 볼 때, 복합쇼핑몰 공간에서 '생활매장’으로 분류되는 청계천 상인들은 대형 유통업체들과 경쟁하게 되었다. 결국 작은 공방 혹은 시장과 같은 성격을 지녔던 청계천 출신의 생산자들은, 이곳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거나 겉도는 존재가 되었다. 산업사회에서 탈 산업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들의 영업장은 마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위, 옥상정원에서 서식하는 자연물의 처지와 닮아있는 듯 하지 않은가?
옥상정원 : 하늘로 가는 길가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높은 단 위에 있는 정원이었다. 고향을 닮은 풍경의 정원을 걸었을 왕비에게 그 아래 건조한 사막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가든파이브의 옥상정원에서도 바로 아래 지상의 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도시 공간에서 이만큼 호젓한 곳은 드물 터이다. 이곳은 가든파이브라는 이름과 친환경 요소가 브랜딩되는 장소적 역할에 충실하다. 사방으로 서울 남부 지역의 먼 풍경이 펼쳐져 있다. 지평선 가까이 완만한 산자락이 솟아있다. 그 산등성이까지 쭉 걸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곳의 면적은 널따랗다.
문득 테드 창의 SF단편소설, ‘바빌론의 탑’이 떠오른다. 신에 대항하는 인간적 권력 의지의 상징, 메트로폴리스의 거대함은 결국 인간의 신적인 시점이 구체화된 결과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좀 다르다. 이 소설의 특색이라면, 그 시점이 지상의 권력이나 자본이 주체가 된 것이 아닌 직접 탑을 쌓아 올리는 인부들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스로 쌓아 올린 땅에 농작물을 기르며, 수 세대에 걸쳐 탑을 만들어나간다. 그들에게 바빌론의 탑은 처음에는 ‘일터’였지만, 나중에는 ‘집터’로 여겨지게 된다.
“이중에 혹시 (지상의) 바빌론에 가 본 사람이 있습니까?”
쿠다의 아내인 알리툼이 대답했다. “아뇨.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다시 올라오려면 한참이 걸리는 데다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모두 여기에 있어요.”
“그럼 정말로 지상을 걷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겁니까?”
쿠다는 고개를 으쓱했다. “우리는 하늘로 가는 길가에 살고 있다네. 우리가 여기서 하는 모든 일들은 그 길을 더 연장시키기 위한 거지. 우리가 이 탑을 떠날 때면 위로 가는 경사로를 오르지, 아래로 가지는 않을 거야.”
‘하늘로 가는 길가에 살고 있다’고 하는 소설 속 쿠다의 말은, 자신의 이상을 체험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곧 ‘생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빌론의 탑’처럼, 가든파이브의 옥상정원에서도 미래에 살아나갈 자연 공간마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인간의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근성남공군기지에서 이륙했을 정찰기 하나가 상공을 선회하고 있다. 평소보다 비행기가 가까워 보인다. 마치 소설 속의 쿠다처럼, 높이 자리한 이곳의 편평한 옥상정원이 ‘하늘로 가는 길’로 여겨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잠깐의 느낌일 뿐이다.
소설 속 인부들처럼, 모험과 일상이 일치된 현대적 생활 및 노동과 생활이 일치된 자급자족 생활을 누리는 개인은 현실 세계에 없을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에서나마 우리는 그 세계를 한때 꿈꾸었었다. 도시의 거주민은 분업화된 역할을 수행한다.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 기능을 수행하며, 대부분 외부로부터 유통된 재화로 채워진 공간을 오가며 생활한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복합쇼핑몰에서도 그곳의 주도권은 그 거대공간을 만든 자본이 쥔다. 하나의 거대 기업으로 수렴되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들과, 그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상업공간의 풍경을 떠올려 보자. 쿠다처럼 자급자족하는 바벨탑을 꿈꾸기는 어렵다. 이렇듯 청계천 상인들, 즉 자영업자들의 특수성은 더욱 보호받기 어렵기에, 가든파이브는 점점 광활한 바벨형의 계륵이 되어 가고 있는 것 아닐까.
항상 도시의 확장은 거주민의 삶과 걸음걸이보다 한 발 앞서 계획된다. 이런 형상의 텅빈 공간을 품고도 도시 계획은 여전히 지속된다. 가든파이브 이남의 위례(송파)신도시에는 트랜짓몰(Transit Mall)이라는 대중교통 및 보행자 위주의 쇼핑 아케이드가 또 다시 조성될 예정이다. 도시인은 직접 만들어낸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누군가가, 어떤 힘이 결정한 공간 속에서 생활한다. 이곳에서 누가 '아래로 가지 않을 거야'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같은 도시의 거주민으로서, 한 사람의 소비자로 경험했던 이곳 옥상정원이 보여주는 호젓한 분위기는, 한편으로는 청계천 상인들은 누릴 수 없는 이상적 풍경이기도 했다. 이 차이는 또한, 옥상정원 아래로 청계천 상인들이 입주할 수 없었던 텅 빈 공간을 만들어낸 어떤 힘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 지점이었다. 그 태도가 실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는지 확인하려면 아래로 내려 가야만 할 것이다.
조형물 : 무덤과 기념비
라이프 관의 일부인 테크노 동은 전자제품 쇼핑 공간이다. 각 층마다 세부적으로 하위품목들이 분류되어 있지만, 정작 입주상점은 얼마 없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건물의 수직동선을 내려가 보자. 규칙적으로 배열된 조명 아래, 규격 면적에 맞춘 상점들이 드문드문 자리한다. 전체 공간에 비해 밀도가 희박한 전시상품들은 쉽게 휘발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상품이라는 완충재가 없이, 반복적인 내부 공간의 규격성이 직접 압박해오는 것 같다. 이처럼 매 층마다 동일한 그리드 평면이 누적된 내부 구조 외에도 출입부 바깥으로 굵게 돌출된 파이프라인의 형태, 깊이 없는 반사유리로 뒤덮인 외벽 등에서도 규격성은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유리와 철골 구조 아래 LED 조명과 시냇물이 공존하는 센트럴가든에서 나타나듯 기술적 기능성을 암시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규격성은 주위 조형물들에서 기술친화적 태도로서 강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남쪽 외곽에는 ‘블루오션’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피복을 벗긴 전선을 확대하여 높이 세워놓은 것만 같은 형상으로, 약 2,000개의 LED광원과 6,800가닥의 광섬유 조명이다. 파란색 광원이 꼭대기로 가까워질수록 분리된 채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옅은 그림자처럼 자리한 다른 선에 의해 지탱되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실선이 점선으로 투명해지는 과정은, 나노기술이나 스크린의 픽셀처럼 소형화를 지향하는 기술의 비유로 볼만 하다.
그 근방의 ‘거울분수’는 고요하다. 센트럴 가든 의 분수처럼 위로 솟구치는 물의 움직임은 없다. 소리 없이 분수 가장자리로 넘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물이 흐르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까만 바닥재가 수심을 감춘다. 마치 투명인간을 위한 위장복처럼, 이곳의 검은 바닥은 물의 투명함이라는 속성을 거울의 반사 효과로 전환시켰다. 분수를 들여다보는 시선은 되돌려보내고, 주변의 풍경은 수면 위로 끌어들인다. 아울러 수면의 출렁거림을 차단하기 위한 각종 장치(수량, 압력 등)들이 검은 석재 속에 감추어져 있을 것만 같다. 외형적인 특색은 강조될 필요가 없다. 검은 비석처럼 단촐한 사각형으로 충분하다. 지상에 드러누운 이 조형물의 오만함을 외벽의 반사유리와 동급으로 볼 수 있을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비록 규모로 따지면 왜소하겠지만, 하늘과 마주하는 거울은 더 높은 곳과 격이 맞는다.
솔라파라솔 위쪽으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옥상정원으로 시선을 옮겨 보자. 11층 높이의 옥상정원에는 갈대와 포도나무가 공존한다. 복개된 청계천의 이국적 풍경과 대응될 만하다. 청계천이 돌로 덮여 있다면, 이곳은 10여 층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덮고 있다. 지상의 거울분수가 수면을 포장재로 삼았다면, 이곳은 식물들을 포장재로 삼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 벗어난 건축은 없다는 관점에서, 아돌프 로스는 무덤과 기념비만이 예술에 해당하는 건축물이라고 말했다. 이 조형물들은 가든파이브를 청계천의 무덤이자 거대자본의 기념비로 여기도록 이끌어준다. 산업화 시대의 잔존물인 기계들, 공구들, 소소한 굴뚝 산업체들을 거대한 유리로 덮여진 건물로 끌어들여 첨단기술의 도시를 지향하는 서울의 한 구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때 산업화를 이끌었던 청계천의 상가들은 거대 자본이 투입된 건축물 속에서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현재의 현실과 괴리된 기술 낙관적 태도가 묘하게 떠 다니고 있다. 과거에는 기계적 기술로 경제부국을 이룩하려던 그 꿈이 이제는 단지 정보처리 기술로 바뀌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테크놀로지의 확신성
센트럴가든 입구에 있는 ‘장인의 손’ 조형물은 하늘을 향해 실뜨기를 하는 두 손의 외양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붉은 실로 만든 형태가 정육면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재주 아닌가. 그리고 두 손은 마치 은막 바깥으로 튀어나온 상태이거나, 은막 안으로 빠져들었던 흔적처럼 피부에서 광택이 난다. 영화 스크린이나 컴퓨터 화면과 같은 기술 공간과 현실 공간이 만난 상황을 의도한 것이다. 기술에 대한 낙관을 넘어 유희적 태도까지 표현하는 듯 보인다.
‘즐거운 상상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가든파이브의 홍보문구에는, ‘테크놀로지에 의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한 기술적 이상이 지상의 중앙광장에는 솔라파라솔과 반사유리로 나타났다면, 옥상정원은 자연물마저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에 찬 기술성이 나타난 것 아닐까?
현대인에게 이 풍경은 쇼핑 중에 스치는 잠깐의 경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든파이브와 같은 복합쇼핑몰은 다양한 기능과 메시지를 조합하여 소비자가 복합적인 경험을 얻도록 의도한다. 소비자 입장에서 복합쇼핑몰은 상품들이 전시된 갤러리이자, 신용카드 한 장만 있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근거리 관광지와 같다. 이러한 관광 경험은 동시성을 추구하는 똑같은 공업 기술에 의한 노동, 똑같은 이동 수단, 자유에 대한 똑같은 집착, 참된 감동에 대한 똑같은 추구,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의도로 여겨지는 똑같은 쾌락주의 등을 통해 생겨나기도 한다.
가든파이브도 ‘똑같음’을 바탕으로 하는 기술적 탁월함에 의해 지탱되는 복합적 소비문화공간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소비자를 위한 일상적 자급자족의 무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이 관광 경험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아니, 누구를 무엇을 위하여 지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몰
김사과의 단편소설 ‘몰(Mall)’의 화자는 ‘사람들은 내려갈 때, 언제나 올라가고 있다는 상상에 사로잡힌다. 추락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늘을 날고 있는 꿈을 꾼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몰에서 사람들이 길을 잃는 이유는 간단하다. 몰에 들어선 순간 그들이 몰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움직일 때, 몰도 당신을 따라 움직인다. 당신이 왼쪽으로 가면 몰도 왼쪽으로 간다. 그 사실만 정확히 이해한다면 길을 잃을 일은 절대 없다. 몰에 들어선 순간 당신이 바로 몰이라는 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지도는 필요하지도 않다."
소설 속 화자에게 몰은 직장과 집, 꿈과 현실의 사이에 있다는 ‘제3의 공간’이 아니다. 이미 몰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이곳은 그의 욕망을 유지시켜 주는 양수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몰 속을 휩쓸려 다니는 플랑크톤이다. ‘지도는 필요하지도 않다.’ 이미 자신의 욕망과 몰의 반응이 일치한다. 이미 ‘몰’이 그의 거울이자 지도가 된 것이다. 소비자 동선을 고려한 복합쇼핑몰의 구조, 혹은 소비자의 구매기록과 취향으로 도출된 온라인쇼핑몰의 추천상품 목록처럼 말이다. ‘몰’의 화자는 몰 바깥을 상상할 수 없으며, 내부에 대한 주도권도 없다. 또한 렘 콜하스의 표현대로,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한 ‘빅니스’는 비판과 해석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옥상정원의 자연물처럼, 대안적 가치나 시도조차 다양성이라는 음식으로 ‘거대한 것’의 피와 살이 되어버린다.
자본과 상품의 유통을 위해 사용될 뿐,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는 동떨어진 공간. 그것이 실현된 결과가 가든파이브 아닌가? 가든파이브의 반사유리를 마주해보자. 거기에 비친 모습은 이 건물이 보여주려고 애쓰는 ‘무대 위의 누군가’이다. 그 모습은 자연물을 기술적 환영의 껍데기로 덮은 가든파이브처럼, 무대장치에 적용된 최신 유행을 보여줄 따름이다. 물론 그 모습, 몰에 들어가는 순간 몰 그 자체가 되어 욕망에 따라 흐르는 모습을 완전히 벗어내기란 불가능하다. 그 역시 피와 살로 연결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건물이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면, 반대로 우리 스스로 그 모습을 분리하려고 애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 모습 이면에서 우리 욕망을 움직이는 어떤 힘을 헤아리는 것, 그리고 그 모습에 가려져 소외된 다른 누군가의 떠올리는 것, 그러한 분리 과정이 텅 비고 드넓은 도시의 정원, 즉 가든파이브를 수평, 수직으로 읽어 내게 만든 동인이었다. 그 결과로 공허한 사막과 같은 공간을 마주하더라도, 우리는 이곳에서 ‘건물을 축조하는 것과 그곳에서 사는 것, 자아 발전의 매개체로서의 건물과 자아를 구속하는 컨테이너로서의 건물(마샬 버만)’의 차이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시를 거대한 힘의 상징으로 보이려고 했던 주체들이 현재의 가든 파이브를, 탈 모던 시대의 또 하나의 바벨로 만들었다. 만일 가든 파이브라는 공간이 스스로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개별 주체들의 의식과 비전을 담아낼 수 없다면, 과거 수 많은 바벨들이 그러했듯, 공허하게 움직이는 기계 공간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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