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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내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물빛공원

2011-11-18


<인터뷰>

“연신내 물빛공원이요? 어디를 얘기하시는 건가요? 거기에 물빛공원이라는 이름이 있었나요? 아~ 그냥 길을 건널 때 지나다니는 곳이라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아서 이곳이 공원이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 했어요”

- 30대 은평구 거주 여성-


“물빛공원은 공원 같지 않아요. 그냥 지나다니는 길이기도 하고, 크기도 작고, 나무도 많이 없고.. 친구들을 기다리는 장소정도? 파발 그림만 지나다니다가 멀리서 봤을 뿐이지 한 번도 자세하게 본 적이 없었는데... 그냥 물빛공원은 특별한 공간 같지 않아요”

- 10대 은평구 거주 고등학생-




일반적으로 공원이라고 하면 푸른 잔디가 깔린 넓은 공간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생각에 비해 연신내 물빛공원은 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작고 왜소하다. 도로 한가운데, 그것도 좁은 짜투리 공간에 나무도 없이 몇 개의 조형물을 중심으로 만들어 지다 보니, 이곳은 공원이라기보다 수많은 길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인터뷰에서처럼 물빛 공원은 자세히 들여다 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 하찮고 사소한 일상의 공간인 것이다.

‘일상’, 이 말은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일을 나가고,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시시한 ‘일상의 공간’이 과연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일상은 하루하루의 날씨 변화만큼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다른 모든 것이 변한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될 생명력을 지니며, 이를 통해 사회 전체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라고 정의하며 그 중요성을 언급했다. 제도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일상은 존재하며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는 일상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주변에 겸손하게 자리하고 있어 눈여겨보지 않았던 일상적인 공간, 연신내 물빛공원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해 주는 것일까?

글, 사진 | 전누리 d-페다고지 기획 & 리포터
에디터 | 최동은( dechoi@jungle.co.kr)


연신내는 은평구의 마을로 그 주변에 흐르던 ‘연서천’이라는 개천 이름을 우리말로 풀이해서 부르게 된 곳이다. 지금 이 연서천은 복개되어 사라졌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일대 가구의 생활하수가 흘러들던 곳이었다. 1980년 지하철 3호선을 위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노선 변경과 예산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어 오다가 지하철이 완공되면서 연서천은 그 이름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1987년 지하철 3호선으로 출발한 연신내역은 2000년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면서 크게 달라졌다. 두 노선이 만나는 환승역이 되면서 은평구 주민뿐만 아니라 일산, 파주 등 고양시 주민들의 왕래도 많아졌고 의류, 음식, 유흥의 복합 상권이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편리한 교통시설과 지리적 위치, 다양한 상업 시설들로 인해 연신내는 은평구의 중심 지역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물빛공원은 이러한 변화와 함께 디자인 서울이 요구하는 문화적인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불려 나온 것이 연신내의 옛 이야기였다. 공원으로 조성되기 전 큰 길을 건너면서 만나는 작은 공간에 불과했던 이곳은 2000년 10월 조형물 설치와 조경의 재정비를 통해 ‘물빛공원’ 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과거 공원의 이름은 여의도 공원, 올림픽 공원처럼 조성목적이나 지리적 위치를 나타내는 단순한 정보위주로 지어졌던 반면, 최근 조성된 공원은 하늘공원, 서울숲과 같이 설계자의 의도와 가치를 담은 이름을 부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곳 역시 물빛공원이라는 서정적인 이름으로 예전의 평범한 길목이 아닌 새로운 공간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역사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물빛공원


자투리 공간에 만들어진 물빛공원은 이미 말했듯이 숲과 나무가 울창한 공원은 아니지만, 이곳만의 특별함을 담았다. 바로 이 지역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뜻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도에서 물빛공원은 ‘파발’의 역사를 테마로 한 파발벽천, 물길, 일출분수의 3가지 조형물로 구성되었다. 왜 이 번잡한 상업 중심지에 공원 설계자는 지역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구조물을 설치했을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한 역사학자 E.H.카 (Edward Hallett Carr)의 교훈처럼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며 그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물빛공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원의 가장자리에 설치된 파발벽천이다. 조선시대 연신내는 변방으로 가는 공문서를 전달하는 통신수단인 파발(擺撥)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화강암 벽면에 새겨진 글과 마패와 말, 파발제 행렬도의 이미지가 이 곳, 파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파발벽천에 글과 그림의 구체적인 방식으로 연신내의 역사적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일반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뛰는 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그 표현이 정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간결하게 추상화 된 것도 아니어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적 소재의 의미가 아무리 깊어도 그것을 구현하는 기술이나 기교가 없다면 과거의 것들은 현재에서 제대로 그 가치를 부여받기 힘들다. 이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창의성, 문화성, 이야기 등의 문화적 요소와 함께 그것을 물질로 실현하는 테크닉의 구현체로 그 특화점을 갖는 것이다.


파발벽천 앞쪽으로는 일출분수로 흐르는 물길이 있다. 이 물길은 느리게 흐르면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키가 낮게 설계되었다. 물길 주변에는 작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굴곡진 형태가 마치 작은 산을 연상시킨다. 나무와 흙 같은 자연의 요소가 많지 않은 공원이기 때문에 조형물을 통해서라도 자연의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의도로 짐작된다.


파발벽천이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했다면 물길은 태극 문양을 사용한 추상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중국의 고전인『주역』에서는 태극을 서로 대칭되고 반대되는 음양을 통일하는 개념으로, 만물이 만들어지는 근원이라 정의한다. 즉 태극은 동양의 고유한 사유체계가 상징적으로 함축된 의미 있는 그림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태극을 정의한 주자학이 발표되기 수 백 년 전인 신라시대부터 태극도형을 사용해 왔으며 그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곳에 사용되었다. 현재까지도 태극문양은 우리민족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문양의 대표적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이렇게 보면 태극은 우리에게 일종의 집단 무의식적 도상이다. 집단 무의식이란 우리의 경험과 의식이 개개인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깊이 내재되어 의식하지 않아도 아는 것, 즉 전혀 배우지 않은 정보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이 구체화된 것이 원형(archetype)이며, 태극문양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삶의 원형을 담아내는 상징적 도상인 것이다. 이렇게 물빛공원에서 파발벽천을 통해 역사를 확인하고 태극문양의 물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는 마치 지워지고 잊혀져도 또 다시 그곳으로 다른 옷을 입고 돌아오는 우리의 삶 혹은 일상 그대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스어로 다시(pailm)와 지우다(psestos)의 합성어인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는 ‘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쓴 고대 문서’를 가리키며, 다시 지우고 쓰더라도 먼저의 흔적이 어떻게든 배어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마치 우리의 기억 같다. 시간이 흐르며 그 모습이 아무리 달라져도, 지나간 사건이나 서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면서 다른 형태나 이야기로 복원되어 그 권리를 주장하는 것. 그것이 한 지역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인 것이다. 마치 도시를 정보가 꽉 찬 하나의 문서로 비유하면 오늘날의 도시가 현대적 건물로 꽉 들어찬 공간일지라도 그 밑바탕에는 보이지 않는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어떤 도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건물, 도로, 상점 등 도시를 이루는 물리적인 요소만이 아닌 그 장소가 가진 역사의 이해가 전제될 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공학박사 이규목은 창조적인 도시는 그 외관뿐 아니라 내적인 작용, 과거의 역사적 요소까지도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만약 과거의 모습이 그대로 보전되지 않았다면 역사적인 조사와 기록, 문화, 예술품 등을 통해서 확인하고 현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연신내 물빛공원 역시 창조적인 도시, 과거와 현대가 소통하는 공간의 창조를 위해 역사를 발굴하고 조형물을 설치하는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의 상징, 일출분수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삶 속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어쩌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재로부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지 못하는 미숙한 상태로 머물지도 모른다. 내가 속한 사회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나의 역사의 뿌리, 정체성을 이해하는 진정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와 동일한 것이다. 역사를 테마로 한 물빛공원의 조형물은 연신내 시민들의 사고의 겹을 두껍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물빛공원에는 이 지역의 밝은 미래를 기약하는 상징도 자리하고 있었다. 일출분수는 투명한 유리 소재의 사각형 벽면에 붉은 색으로 된 둥근 구조물을 설치해 간결하며 현대적인 모양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유도했다. 유리 벽면을 타고 물이 흐르면서 푸른 바다 위로 해가 뜨는 진취적인 기상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추상적인 조형은 과거 파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연신내처럼 미래에 더욱 발전된 모습을 그려주는 희망의 메시지로 보였다. 하지만 일출분수가 미래를 상징한다는 설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시민들은 얼마나 될까? 미래를 상징한다는 깊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안내판 하나 없이 지저분한 벽면에, 버스 정류장처럼 보이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고립된 공간의 아늑함

차로 사이에 삼각형으로 남은 자리에 위치한 물빛공원은 마치 교통섬(traffic Island)을 연상시킨다. ‘물로 둘러싸인 육지’인 섬은 ‘소통의 징검다리’로, 다른 한편으로는 ‘고립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조형물을 통해 둘러본 물빛공원은 ‘역사적 사실을 테마로 한 특색 있는 공원’이지만, 도로와 도로를 이어주는 ‘연결지대’ 이기도 하고, 또한 도로로 둘러싸인 ’고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고립된 공간의 면모는 휘황찬란한 인공 물질의 도시와는 다른 역사적 공간이라는 맥락적인 면에서, 그리고 번쩍이는 도시의 가로 사이에서 떨어져 나온 물리적 공간이라는 면에서 ‘고립된 섬’과 같다.


물빛 공원은 한쪽에는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유흥시설과 음식점들로, 다른 편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차들로 둘러싸여 있다. 물빛공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으면 이렇게 복잡한 주변에서 벗어나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의 복잡함, 그 바깥의 세상으로 잠시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표면의 반짝거림만이 남은 곳에서 살짝 비켜난 과거의 것들이 켜켜이 쌓인 팰림프세스트(Palimpsest)의 공간이기에 그럴 것이리라.

공원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고립된 ‘구석’이 떠오른다. (『공간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이미지가 단순한 구석에서는 몽상이 더욱더 위대해지며 그 구석 속에서 몽상가는 열정의 정상에서는 으레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해서 명상한다...(중략).. 시인들은 구석 속에서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의 내부에 침잠한 몽상가와 더불어 그 자체 속에 웅크리고 들어가 있는 세계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들려 줄 것이다.”


바슐라르는 고립된 구석이 사색의 공간으로서 삶의 진지한 면을 가득 담은 곳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그러한 감싸는 공간에 들어 있을 때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며, 구석이라는 공간은 사소한 곳이 아닌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 철학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물빛공원은 사방이 막힌 구석과 같은 공간은 아니지만 도로로 둘러싸여 복잡한 외부와 단절되고 고립되었다는 면에서 바슐라르의 구석과 유사하다. 우리는 복잡하고 다양한 이미지가 중첩적으로 펼쳐지는 거리의 풍경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단련되어 있으면서도, 그렇게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물빛공원에서 가끔은 바슐라르의 구석진 공간에서처럼, 한때 추방되었던 이름이 돌아오고 그 흔적이 억지로라도 층위를 쌓아가려는 역사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에서처럼 세상과의 이별을 잠시 고해보는 것은 어떨까?




* 참고문헌

조경비평 봄, 『공원을 읽다』, 나무도시, 2010
이규목, 『한국의 도시경관』, 열화당, 2002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한림미디어, 1996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앙리 르페브르 외, 『일상생활의 사회학』, 한울아카데미, 2010
담디 편집부, 『LANDSCAPE ARCHITECTURE (조경디자인1)』, 담디, 2002
최용희, 『태극으로의 여행』, 수피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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